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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7 | [특집]
지역의 숨은 역사를 일구어 내기를
임진택․판소리꾼, 한국민예총 사무처장 (2004-01-29 14:34:39)
저는 김제에서 태어났지만 어린시절 일찍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에 사실 고향에 대한 추억을 별로 갖고 있질 못합니다. 추억이란 곧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어떤 애착 같은 것일텐데 고향에 대한 추억을 그리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지요. 해마다 방학때면 시골집에 내려가곤 했어도 옛동무 하나 제대로 없는 나로서는 고향의 분위기가 때로는 따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에게 막연하게나마 고향에 대한 어떤 미묘한 느낌들이 들어와 박혀있었다는 것을 저는 후에야 깨닫게 되었지요.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이를테면 잠재의식 같은 것이었는데 그 하나는 '서먹함' 또는 '낯설음'이라 할만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싹함' 또는 '괴기함'이라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친근하게 느껴졌어야 할 고향의 풍경에서 서울소년이 감지했던 그 이상한 분위기에 대해 잠시 고백을 해볼까합니다. 내가 늘 '서먹함' 또는 '낯설음'의 감정을 느꼈던 곳은 바로 내가 태어난 봉남면 대송리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지서앞에서였습니다. 지서와 면사무소와 우체국이 잇대있는 그 신작로를 지나가노라면 나는 언제나 사방에서 쏘아대는 경계의 눈초리를 의식했더랬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고향마을에서도 낯선 소년이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눈총들이 따갑게만 느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후 성년이 되어 호적초본을 떼러 면사무소에 들어갔다가 나는 어렸을 적 지서앞 신작로에서 느꼈던 그 따가운 눈총을 다시금 의식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고향에 대해 느꼈던 그 서먹함과 낯설음은 바로 6․25라는 동족상잔의 역사가 할퀴고 간 상흔이었던 거지요. 내가 '오싹함' 또는 '괴기함'의 감정을 느꼈던 것은 금산사 입구에 있는 어떤 커다란 사당앞을 지나칠 때였습니다. 나는 그 사당이 누구의 신주를 모신 집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웬지 귀기가 잔뜩 서려있다는 느낌 때문에 온몸이 오싹해짐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느낌은 그 사당의 괴기한 단청 양식과 퇴락한 모습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여겨집니다만, 후에 알고 보니 그곳에 증산선생 내외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결국 숙명적으로 백년전 이곳에서 그릇된 세상을 혁파하기 위해 노도처럼 일어났다가 좌절하고만 동학농민군의 후예였던 것입니다. 저는 가끔 전주에 내려올 때마 다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나 완고하리만큼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지역이 겪었던 그 처절한 역사의 격랑이 너무나 엄청났던데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이제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이곳에서 비로소 이곳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스스로 추스리고 북돋아나가는 작업이 본격화되었음에 반가운 마음 금할길 없습니다. 통권 50호를 맞는 「전북문화저널」에 찬사를 보냅니다. 다달이 그 부피와 내용이 튼실해지고 있는 듯하여 더욱 든든하게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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