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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7 | 연재 [문화가 정보]
남원 두락리 가야고분군
곽장근‧전북대 박물관,조교(2004-01-29 14:37:06)



이번에 소개하는 두락리 가야계 고분은 지금까지 소개한 건지리,월산리 가야계 고분군과 함께 남원 지방의 토착세력집단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주목을 받는 유적중의 하나이다. 이 유적은 행정구역상 남원군 아영면 두락리와 동면 유곡리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발굴조사를 실시한 고분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고분이 아영면 두락리 지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유적면을 편의상 두락리 고분군이라 명명하였다.
유적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전북과 경남의 도계를 이루는 지리산 줄기가 남북방향으로 뻗어내린 곳에 위치한 해발 573m높이의 연비산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구릉의 한줄기로 해발 440m내외의 고원지대이다. 그러나 주변지역의 해발고도가 보통 400m내외의 고원지대이므로 그다지 높지 않은 야산으로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내렸다. 이 야산의 능선을 따라서 북쪽지역은 아영면 지역으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지역은 동면 유곡리로 가파르게 흘러내려 급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능선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경사면을 따라서 성내부락의 뒤편 야산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대부분 지역이 이미 밭으로 개간되거나 일부지역에는 소를 키우는 축사가 들어선 상태이다.
이 유적에 산재되어 있는 고분들은 대부분 능선의 북쪽지역, 다시 말해서 행정구역상으로 두락리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남쪽지역에서는 급한 경사면으로 인하여 일부 고분이 비교적 완만하게 흘러 내린 능선상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 고분들은 봉분의 직경이 20m 내외되는 대형고분에 속하는 것으로 30여기 정도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 유적에 산재된 대형고분들 중에는 봉분의 직경이 20m이상되는 초대형 고분들도 몇기 있는데, 이들 고분들은 대체로 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초대형 고분들은 육안으로 고분이라 단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하여 멀리서 보면 고분이 아니라 야산에 솟아있는 작은 봉우리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더구나 이 초대형 고분들은 개간되지 않은 능선상에 자리하고 있어 봉분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기 때문에 더욱 커보인다. 반면에 이보다 규모가 작은 고분들은 밭을 개간하면서 봉분의 규모를 알 수 없는 상태인데, 본래는 초대형 고분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은 1970년대에 원광대 전영래교수에 의해 조사 보고되어 처음으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으면, 현재는 전북지방기념물 1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 결과 각각의 고분들 앞에는 기념물이라는 내용을 새겨 놓은 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이들 고분은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고분이 소재하고 있는 지역의 토지 소유자가 개인인 경우가 대부분인 탓으로 보다 더 적절한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래도 전북지방기념물로 지정된 이후에는 적어도 대형고분에 대한 봉분의 파괴행위가 상당부분 억제되었으며, 경작에 의한 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적의 주변지역에는 서쪽르오 월산리 가야고분군, 남쪽에는 건지리 가야고분군이 “아영뜰”이라 불리우는 들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아영뜰”을 감싸고 있는 능선의 곳곳에는 돌로 쌍은 석성이 있으며, 석성이 있는 주변지역에는 가야계 고분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다수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현재 국립전주박물관 1층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두락리유적에서 출토된 유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이 유적의 보존 실태와 함께 발굴조사의 내용 그리고 유적의 성격에 대하여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유적의 보존실태
이 유적의 보존상태는 한마디로 어떻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유적에서 자행된 유적에 대한 파괴행위는 우리나라의 다른 유적에서 보이는 현상과 상당부분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도굴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미 몇차례에 걸쳐 말한 바 있어 다시 언급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의미하다는 생각마저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구태여 유적의 보존 실태를 설명할 가치조차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다시 또 이를 살펴보려는 것은, 두락리 유적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뿐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유적을 보존하는데 있어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많은 고분관련 유적들 중에 외관상으로 그 규모가 가장 방대하며, 역사적인 의미 역시 막중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언제, 어떤 집단이 이 유적을 만들었는가? 라는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문헌기록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다시말해서는 이 유적과 관련된 문헌기록은 전무한 상태이며, 이 유적과 관련된 문헌기록에 의존하기에는 분명히 한계성이 있으며,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규명된 사실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유적에 대한 실체 규명작업이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이 유적에서 자행된 유적의 파괴 과정을 소개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이 유적에서 자행된 도굴의 전모를 파악하는데에도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검토작업이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도굴에 대한 정보는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면, 다만 인근부락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내부락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들려준 증언들은 비교적 상세하였으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유적에서 처음으로 의도적인 도굴행위가 시작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두락리 고분군은 두굴의 주된 대상으로 전락되면서 유적으로서 본래 의미를 상당부분 상실하는 수난기를 맞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도굴범들이 주로 한밤중에 나타나 고분의 봉분을 파고들어가 그속에 부장된 유물을 꺼내갔다고 한다. 이런 도굴행위는 일부 고분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고분을 대상으로 자행되어, 이 당시에 거의 모든 고분이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고분안에 부장된 유물중에서 귀중한 청동제내지 금동제 유물을 중점적으로 꺼내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금이나 동으로 만든 주전자, 그릇 등 다양한 금동제 유물만을 꺼내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다는 성내부락 주민들의 증언이 대체로 일치되는 점에서 사실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증언들이 어느 정도가지 근거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일본 사람들이 금동제 유물을 꺼내갔다고 하는 증언들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되었고, 그 유물이 과연 어떤 경로를 거쳐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적의 파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해방이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도굴됨으로써 남아 있던 일부 유물마저도 대부분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는 부장된 모든 유물을 대상으로 도굴행위가 자행되고, 그 도굴행위는 대단히 극심하여 거의 모든 고분을 유물이 없는 단순한 흙더미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어떤 사람은 이 유적에서 빠져나간 유물을 8톤 트럭으로 환산한다면, 그 수량은 거의 3대분 이상은 될것이라고 증언해 주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양의 유물이나, 그 유물들 중 현재까지 정확한 소재가 확인된 유물은 단 한점도 없다.

발굴조사의 개요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9년 여름 두 달 동안에 전북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실시되었다. 그 발굴조사에서는 30여기의 대형고분 중에서 4기와, 그 주변조사를 하면서 건지리 유적에서 조사된 소형고분과 유사한 형태의 고분 1기 등 모두 5기가 조사되었다. 본래 이 고분군은 발굴조사를 실시하기 이전에는 백제의 돌방무덤(石室 ) 유적으로 학계에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를 통해 조사전의 예상과는 달리 가야계 돌덧널무덤(石 ) 유적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다른 유적의 발굴조사와는 달리 발굴조사단이 현장에 도착해서 진땀을 흘리며 가장 고심했던 것은 30여기의 고분 중에서 과연 어떤 고분을 발굴할 것인가? 라는 발굴대상과 고분의 선정문제였다. 그 이유인 즉, 이 유적에 있는 모든 고분들의 구조를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상세하였고, 또 그 증언들이 거의 일치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거의 대부분의 고분이 이미 철저히 파악되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발굴조사단에서는 주민들이 들려준 증언 내용을 종합하여 비교적 파괴정도가 심하지 않은 고분을 선정한 다음 곧바로 발굴조사에 착수하였다.
1호분
이 유적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봉분의 상당부분은 이미 유실된 상태였으나 다른 고분에 비해 파괴 정도가 심하지 않다고 하여 발굴대상 고분으로 선정하였다. 이 고분은 전형적인 가야계 고분으로 봉분조사 과정에서 이미 두 번에 걸쳐 아주 대규모적으로 진행된 도굴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마련된 덧널은 생토 암반층을 파내고 나서 그 안에 냇돌과 깬돌을 이용하여 수직으로 쌓았다. 이 덧널의 규모는 길이 860m, 넓이 130m 천정면에서 바닥면까지의 깊이는 180m내외이며, 동서로 장축방향을 두고 있다. 시신과 함께 덧널내에 부장된 유물은 머리와 발쪽 등 양쪽에 두었던 것으로 보이며, 머리쪽에 있던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일부의 토기편만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다만 발치쪽에서는 등자, 말재갈, 기곶이 등 마구류와 함께 다량의 토기류가 비교적 제 위치에 남아있었다.
2호분
이 고분은 유곡리 지역에서 유일하게 조사된 것으로 1호분과는 달리 시신을 안치하기 위하여 막돌을 이용하여 네모난 방과 그 방에 들어가는 통로는 갖추고 있는 돌방무덤이다. 이미 돌방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부분과 천정을 통해 여러차례에 걸쳐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며, 최근까지도 마을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더위를 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돌방벽에는 회를 두겁게 바른 탓으로 안에 모셔져 있던 인골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발굴조사에 의하여 3인 이상을 모신 것으로 밝혀졌다. 여러차례에 걸쳐 진행된 도굴과 외부인의 출입으로 인해 깨진 토기편과 몇점의 청동제 유물이 출토되었을 뿐이고 인골도 제자리에 남아있지 못한 상태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이 유적내에 밀집 분포되어 있는 30여기의 대형고분들은 발굴조사된 바에 의하면 가야계 수혈식 돌덧널무덤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들 대형고분들은 기본적으로 고분은 기본적으로 고분의 구조와 출토 유물 등 여러 가지 속성에서 지금까지 대가야 영역에서 조사된 대형고분들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1호분은 월산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제 Ⅲ형식 고분과 상통되는 것으로, 대가야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령 지산동 대형고분과 고분의 구조와 규모 그리고 출토된 유물에서 상당부분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한편 2호분은 고분의 형식이 기본적으로 백제 돌방무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몇가지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백제보다 오히려 가야와 관련성이 많은 고분으로 생각된다. 즉 기본적으로 통로를 지닌 돌방이라는 짜임새는 공통적인 요소이니 그 통로가 서쪽에 치우쳐 있는 것은 백제 돌방무덤과의 뚜렷한 차이점이며, 이 지역의 독자적인 특성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의 대형고분들은 함양지역을 제외한 경상도지역에서 발굴조사된 대형고분들과 비교해 볼 때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즉 유물을 부장하는 위치나 그 내용, 덧널의 천정, 바닥부분의 처리방법 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이것은 이 지역 고분 축조 집단의 지역적 특성으로 파악된다. 이와같은 지역성을 고려하지 않고, 이 고분을 축조한 집단을 단순히 거령 지산동 대형고분을 축조한 대가야에 종속된 집단으로 파악하려는 종전의 견해는 타당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우적에서 보이는 대가야 고분과의 공통성은 이들 지역이 모두 동인한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문화들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유적이 대가야 지역과 구분되는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점은 당시에 대가야 지역과 구분되는 정치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3회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가야계 고분으로 확인된 남원 건지리‧월산리‧두락리 유적을 중심으로 이 지역 토착세력집단의 문화로 인식되는 가야문화의 일단을 파악하려는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이 지역에 존재했던 토착세력집단의 성격 규명을 하는데 있어 지극히 미흡한 것이며, 이제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앞으로 이들 유적과 함께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가야계 유적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조사와 그 결과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된다면, 그 성격이 보다 더 명확하게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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