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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한 사회주의권의 변화는 우리를 혼란에 빠뜨렸고 여러 가지 숙제를 안겨주었다. 학계에서 보여준 초기의 반응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나 대체로 기대어린 시선으로 주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강화론’, ‘사회주의 위기론’등으로
전개되었고 뒤이어 ‘STR'(과학기술혁명)론이 등장하여 우리의 관심을 한껏 끌어 모았다. 그 흐름을 타고 요즈음에는 ’사회민주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대안일 수 있는가를 놓고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은 사실상 맑스주의에 대한 현대적 검토라는 중요한 의제를 기저에 깔고 있었다. 맑스주의를 한국사회분석에 적용했거나 또는 그 대안으로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식인들, 혹은 적어도 현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유력한 이론이 맑스주의임을 인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맑스주의에 대한 성실한 재검토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맑스와 맑스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맑스 이후의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배태의 수정주의자들이 지나온 길을 더듬는 작업 자체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최근의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맑스주의가 변용되고 분칠되어 그 혼란을 더욱 가증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맑스주의를 이해하는 작업은 끈질긴 인내를 필요로 한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간행물, 연구서들이 존재하지만 마땅한 양서를 선택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이번에 소개하는 <맑스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대화>는 이러한 맑스주의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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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사우스웨일즈 노동자교육협회 의장인 W.H.C 에디가 노동자 교육의 경험과 자료를 토대로 하여 엮어낸 <Understanding Marxism>을 각색한 것이다. 이 책은 우선 그 특이한 구성이 눈길을 끈다. 기존의 맑스주의 개설서가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따랐던 것과는 달리 이 책은 문제의 핵심을 쫓아나가면서 비판과 반비판을 독자에게 동시에 제공하는 토론형식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등장인물이 존재한다. 모두 네 명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인물은 사회자이고 두 번째 인물은 박만식 씨로서 전형적 자유주의자(본인의 표현대로라면 다원주의)의 배역을 담당한다. 네 번째 인물은 대학생이 이수현 씨가 맑스주의에 접하는 초심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 네 인물이 벌이는 토론의 방식은 각 주제마다 먼저 박만식 씨가 맑스주의의 입장에 대해 설명하고 이에 대해 김교수는 자유주의적 비판을 가한다. 이수현 씨는 언제든 질문하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같은 방식의 토론으로 전개되는 이 책은 맑스주의의 핵심주제에 따라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맑스주의 철학에 관해 논쟁이 벌어진다. 세계의 본질이 물질인가 아니면 정신을 비롯한 여러 복합적 요인들인가로 대립된다. 2장에서는 사적유물론에 대한 옹호와 비판이 대립한다. 맑스의 토대-상부구조론을 중심으로 역사의 동력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란을 벌이는데, 물질적 생산이 역사를 움직여 왔음을 주장하는 입장과 경제적 요인뿐만이 아닌 여러 다양한 요인들의 상호작용이 역사의 동력임을 주장하는 입장이 맞선다. 3장에서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인가, 아니면 계급이 아닌 여러 다양한 세력들이 역사를 이끌고 있는가가 거론된다. 4장에서는 국가의 계급성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다. 지배계급의 도구임을 주장하는 맑스주의와 여러 다양한 세력의 균형자라는 논지를 펴는 다원주의가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5장에서는 맑스주의의 이데올로기론에 양자의 입장이 엇갈린다.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즉 자본-노동의 투쟁의 시기에 정당성을 갖는 과학적이며 궁극적 진리에 가장 근접해 있는 이론이라는 입장과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관료들의 이데올로기임을 주장하는 입장이 대립되고 있다. 6장에서는 종교에 관한 토론이 진행된다. 이 부분에서는 대체로 양자의 의견이 일치점을 갖는다. 7장에서는 맑스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 인가, 아니면 공상적이며 종교적인가를 놓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8장에서는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혁명적 역할, 즉 이전의 낡은 모든 것과 계급지배를 종식시키는 혁명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혁명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자질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으며 또 지금까지 계속 노동운동이 쇠퇴해 왔음을 들어 노동자들의 혁명적 역할을 부정하는 입장이 날카롭게 대비된다. 9장에서는 피티독재에 대한 해석이 양분된다. 피티독재는 부르조아지에 대한 독재임을 역설하며 맑스주의를 옹호하는 입장과 피티독재는 결국 노동자에 대한 독재로 나아간다고 보는 입장이 논쟁을 벌인다. 마지막 10장에서는 당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놓고 당의 주인이 노동계급임을 주장하는 맑스주의 옹호자와 맑스주의 당이론이 유토피아적임을 주장하는 맑스주의 비판자가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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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 맑스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대립된 논점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의 맑스주의에 관한 해석에는 서로 이견없이 일치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볼세비키의 공산주의, 즉 레닌주의가 맑스의 맑스주의로부터 심각하게 이탈해 있다는 점도 둘 다 인정하고 있다. 특히 8장, 9장, 10장에서 레닌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연속선상에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바라보던 일반적 시각과는 달라 주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이 책은 전체에 걸쳐 논지의 전개가 비교적 명쾌하다. 그러나 그것이 천박한 자기주장의 반복으로 나타나지 않고 무거운 주제에 대한 진지한 자세, 그리고 깊이있는 노지의 전개는 뚜렷이 돋보인다. 더욱이 이 책에서 인용하는 맑스주의의 핵심과 논쟁의 갈피에서 발견되는 탐구거리는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