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않으세요?'
최병훈․전 고창삼원중 교사
치열한 삶을 아직 나는 살고 있지 못하다. 편안한 일상으로부터 조금 비켜서 있을 뿐, 과거로부터 현재로까지 이어온 생에 획을 그을만한 단절과 비약도 없고 지고의 순수를 향한 미움도 부족하다. 가끔은 남들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즐거움'을 탐닉하고 싶고, 나무그늘에 누워 할 일없이 서 책을 가까이 하고 싶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밖으로 보여지는 것과 스스로 보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느끼는 괴로움도 있다. 언제고 내가 꿈꾸는 사회현실과 자아로의 비약적인 진보와 변화가 있기를 고대해 왔다. 번번이 좌절이다. 어차피 영웅시대가 아닌바에야 내가 도달할 수 잇는 총체적 세계관조차도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작년 그러께 해직된 이후, 세월은 속절없이 벌써 2년이 흘렀다. 어리석게도 쫓겨나야 했던 절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만나는 사람들이 정색을 하고, ‘어찌 그 길을 선택했느냐’고 물어오면 궁색한 대답밖에 할 도리가 없다. 내색을 안해서 그렇지 몇을 제외한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좀 아둔했던 한 녀석은 제 선생이 멀리, 그리고 오래 출장간 것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하긴 다시 돌아올 때가 한달 후가 될지, 일년 후가 될지 어찌됐던 곧 돌아오는 것만은 확실한 것이라고 떠벌리며 학교를 떠나왔었다.
교단에 몸담은 날을 셈하면 꼬박 2년이다. 그리고 떠나와 바깥 생활 한지도 2년이 다 된다. 한 중심에 서 있을 때보다 벗어나면 보이는게 훨씬 많다. 다행인 것은 앞선 2년보다 뒤의 두해 동안 더 많은 것을 보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안됐다는 표정의 동정심의 눈길을 받을 때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오히려 은혜로 생각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데, 금치산자가 다된 정도의 경제적 궁핍은 심한 편이다. 궁하면 궁한대로라고 했던가.
근래 두 번 제자들을 만났다. 공교롭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후회하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이 질문에 담긴 뜻을 적어도 나는 안다. 과거에 나도 똑같은 질문을 선배들에게 던진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다. 결코 편한 것은 아니라고 꼭 대답했다. 후회한다는 말은 전후를 비교하여 상실한 때나 가능할 터인데, 물론 있긴 하다. 경제적인 면이 그렇고 선생 노릇을 마치 큰 벼슬이나 하는 것처럼 자랑스러워 하셨던 어머니의 가슴앓이, 그리고 이별을 생각하면 확실히 잃고 손해본 것은 분명 있다. 그러나 내가 재는 행복이나 상실감등은 가시적인 것에 있지 않다. 어머니의 아픔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전민족사적인 차원에 해당한다. 모든 것을 다 앗긴 일제, 한국전쟁, 분단, 4․19, 유신독재, 광주항쟁, 5공화국, 당신이 인식하는 역사인식은 권력에 대한 공포이며 그리하여 나서면 당한다는 것이다. 해직된 것으로 좋은 날 다 보내버렸다는 어머니의 탄식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체념하시도록 하는 방법이 훨씬 수월했다. 역사의 질곡을 몸으로 체득하신 분이다. 할수만 있다면 역사속으로 투신하는 것을 대자적 삶이라 했고 자아실현이라고 늘상 읽었다. 한번은 부끄러웠지만 어머니께 불쑥 물었다. ‘일제치하라고 가정하고 자식이 간도땅으로 독립운동하려 떠나면 뒷박에다 쌀을 퍼줄 수 있으시겠느냐고!’ 웃으시면서 답하셨다. ‘지금이 일제시대냐고’
교육청 장학사들보다 더 바쁘게 학교를 나다닌다. 반기는 교육관료들은 드물다. 선생님들은 다르다. 내가 존경하고 신뢰하는 선생님들은 참 많다. 좋아하고 배울만한 것들이 하도 많아서 만나기 시작했고 만남속에서 굳센 철학도 신념도 없이 해직의 길에 들어섰다. 초추의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던 89년 9월 1일, 푸짐한 짐싸들고 찾아갔던 첫 부임지에서 다시 싸들고 읍내로 나왔다. 그때처럼 고독했던 적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삶 자체가 무척 낯설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준비도 없이 너무 빠른 시간에 아이들과 동료교사, 학부모들과 헤어졌지만 그네들이 지금도 아련히 어른거리고 있으며 여전히 인간사랑 넘치는 따스한 품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익숙해졌다. 싸우는 일도 잦아졌고 어쩔땐 정신까지 사나워진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설득할 여유도 생겼고 욕심내지 않고서도 살아갈 지혜도 터득했다.
여느 해와는 판이하게 오월을 보냈다. 죽음을 그처럼 가까이서 느끼도록 처절하게 강요했던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모두 우리 제자들이다. 철수 장례식 땐 광주를 갔다. 어느 시인이 하느님을 보았다고 했던 꼭 같은 현장에서 부활을 보았다.
아이들이 더 커서 우리만한 나이엔 무얼 물을까 생각한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고 인간 역시 그럴진대, 살아가는 일이 왠지 벅차진다.
조만간에 근․현대사를 기록한 역사책을 다시 읽을 작정이다. 낱낱의 삶들이 도대체 무얼 꿈꾸며 살고 다양한 삶의 응집이 구체적 현실로 역사는 어떻게 펼쳐지는가 다시 확인하고 싶다. 당대에는 초라하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그들은 어떻게 감내하고 내일을 준비했는가를 꼭 되새길 터이다. 본질적으로 똑같은 운행이라 보여지는 자주적인 인간실현, 지금 그 치열한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은혜라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