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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8 | [문화시평]
망각된 80년대를 새로운 기억으로 곧추 세우는 작품 창작극회의 <시민 조갑출>
김정수&#8228;연극인(2004-01-29 14:49:39)
진한 어둠, 불길하게 깔리는 배경음, 갑자기 눈을 찌를 듯이 날아오는 비디오 화면이 무대 한중앙 위쪽에서 번득이고 낯익은 앵커가 주요 뉴스를 읽어나간다. 그 순간 화면에는 어떤 사내의 옆모습이 나타나고 정면을 바라본 사내는 이렇게 호소한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들어 있어요. 내 귀에 도청장치가 들어 있어요.” 우리는 순간 몇 해 전인가 방송국의 생방송 뉴스 시간에 스튜디오에 뛰어든 한 사내를 기억해 낸다. 방송사상 손가락에 꼽히는 사고였으리라. 다음날 단연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며칠 동안 우리의 입 위에서 맴돌던 이 사건은 이내 다른 일상에 파묻혀 잊혀져 갔다. 그런데 이 사내가 느닷없이 다시 나타났다. 그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의미망으로 무장하고 말이다. 『창작극회』는 지난 6월 25일부터 7월 17일까지 제 71회 정기공연으로 <시민 조갑출>을 『창작소극장』에서 오렸다. 한때 창작극회에서 활동했고 현재는 방송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 지역 출신 박구홍씨의 최초의 희곡 작품이라는 점에서 비록 서울에서 공연되었던 작품일지라도 창작극회의 공연은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도청 당했다’고 주장하는 한 사내의 의식흐름을 추적함으로써 우리 일상의 한 꺼풀만 벗기면 모두 도청을 당하고 있다는 현실로 주제를 확대시키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도청’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뒤로 하고 이야기할 때 작가는 ‘도청’의 일반성,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있고, 따라서 실제로 정신이상자로 판명된 그 사내는 제목이 주는 느낌 그대로 가장 일상적인 평범함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극중 ‘조갑출’이란 사내를 단순한 정신이상자로 바라보기엔 너무 생생하게 현실적 사고의 소유자라는 아이러니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도 실토했듯이 그의 미친 이유, 미치게 한 원인, 미칠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이 작품 안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조갑출’의 병에 관해 몇가지 진단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첫째로는 일상적인 억압과 불만족을 사회적, 정치적 원인으로 전가시키는 경우, 둘째로는 ‘광주’로 대표되는 80년대 정치적 상황이 끊임없이 정상적인 사고와 생활을 강박하는 경우, 셋째로는 주인공 ‘조갑출’안에서도 이 양자가 서로간에 교차 간섭하는 경우 등으로 나눠 생각해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주제의 모호함을 작품이 주는 인상을 중심으로 받아들여 해석한다면 앞의 경우와는 전혀 엉뚱하게도 문명의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유형 무형의 각종 폭력과 나약하게 무너지는 우리의 정신 정도로 이해 할 수도 있다. 특히 이번 공연은 다분히 이러한 해석이 따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그러기에 많은 부분, 심지어 주제에 관한 문제까지도 연출에게 위임해 두고 있다. 연출의 의도와 역량에 따라서 완성도의 폭이 크게 나타날 작품이다. 이번 연출을 담당한 홍석찬씨는 그동안 『창작 극회』와 『시립극단』에서 탄탄하고 폭넓은 연기로 주목을 받아온 연극인으로 연출로서는 첫 무대인 셈이어서 그 가능성에 거는 기대가 한층 컸다. 무대로 눈을 돌리면 단연 중앙에 위치한 T.V수상기가 시선을 압도한다. 이 수상기는 극의 시작과 끝을 주도하면서 무대에서 차지한 위치 만큼이나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텔레스코프’와 같은 당당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객석을 감시하듯 내려보고 잇다. 이 수상기는 그중에서의 소도구 역할과 함께, 환각을 시각화시켜 보여주기도 하고 극진행을 보조하는 자료화면을 제공하기도 하는 다목적용이다. 또 수상기를 받치고 잇는 사각 기둥은 중앙의 등퇴장로의 단순함에 변화를 주고 있다. 연출은 의욕적인 기법으로 ‘조갑출’의 내면 심리와 주변 상황을 성실하고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현실의 상세한 설명보다 상상에 의한 느낌에 더욱 비중을 두어 표현의 방법을 다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작품 곳곳에 잠복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품은 연출의 의도대로 표출되지 못했다. 이유는 작가가 유보시켜 놓은 원작내의 융통성의 부분이 선명히 응집되어 표현되지 못했고 제작 방향도 자연 구심점을 놓쳤다. 천장이 낮고 관객과의 거리가 짧은 소극장의 특성상 걸맞지 않은 다소 무리함도 보였다. 또 비디오를 통한 광고의 이미지 차용 등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큰 화면, 많은 수상기의 사용을 통해 본격적인 영상 작업을 시도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겼다. 연기 면에 있어서도 몇몇 배우가 전혀 엉뚱한 성격을 드러내 작품에 자연스럽게 몰입하는데 지장을 주었지만 주연급 배우들의 열연은 이를 상쇄하고 보는 재미까지 가져다 주었다. 최근 급속도로 조장되는 이념의 상실은 자아와 사회의 연결 고리조차 상실하는 기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창작 극회』의 <시민 조갑출>은 망각의 강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의 80년대를 새로운 기억으로 곧추세우는 작품이었다. ‘조갑출’을 통해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짐은 관극하는 입장에서는 소중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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