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8 | [문화저널]
봉림사지의 석등과 삼존불상
한수영․전북대 박물관
(2004-01-29 14:57:24)
옥구군 대야면 발산국민학교 뒷교정에는 절터에서나 볼 수 있는 석등과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제 위치를 벗어난 이 유물들은 본래 완주군 봉림사지의 것이며 일제 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봉림사 절터는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의 인봉산 남쪽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말기까지 이 절터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과 석탑, 석등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논으로 개간되어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단지 부근의 축대와 석재를 통해 이 곳이 절터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현재 발산국교에 있는 설등과 석탑은 일제시대에 일본인 도곡에 의하여 옮겨진 것이로 발산국교는 그 당시에 도곡의 농장이었다. 도곡은 봉림사지의 석등과 석탑을 일본으로 가져갈 계획으로 이곳으로 옮겨 놓았으나 이후 해방이 되어 석등과 석탑이 지금의 자리에 남아 있게 되었다. 또한 머리 부분이 없는 불상은 봉림사지 근처의 삼기국민학교에 옮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절터에서 수습된 편들에 의하여 복원된 이 불상은 삼존불상으로 모두 목과 머리부분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석탑은 석등과 삼존불상에 비하여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고 있다. 봉림사지의 이 유물들은 상당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로서 여기서는 석등과 삼존불상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석등
보물 234호로 지정된 이 석등은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나머지는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4각형의 지대석과 원형의 하대석은 한 매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하대석에는 여덟 개의 연꽃문양이 이중으로 조각되어 있다. 꽃잎은 바닥을 향하고 있으며 연꽃의 윗부분에는 원형의 낮은 단이 양각되어 잇다. 하대석의 윗부분에는 모를 깍아낸 4각형의 간주석이 있는데 간주석 표면에는 한 마리의 용과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구름속을 헤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표현된 간주석은 이 석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 간주석 위에 있는 상대석은 8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 상대석 아래면에 하대석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형태의 원형단이 양각되어 있다. 상대석에는 단엽으로 된 8잎의 연꽃이 위를 향하여 양각되어 잇어 하대석의 연꽃무늬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상대석 위에는 8각형의 화사석(火舍石)이 놓여 있다. 화사석의 각면에는 양각된 사천왕상과 세로로 긴 장타원형형태의 화창이 한 면씩 돌아가고 있다. 화사석의 위에는 8각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덮혀 있다. 이 옥개석의 꼭대기에는 8엽의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어 상륜부를 받치게 되어 있으나 석등의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2.5미터로 이 석등은 강한 장식성을 보이고 있으며 석등에 새겨진 조각의 수법이나 무늬의 모양 등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이고 있다. 아울러 봉림사도 이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2. 석조 삼존불상
봉림사지 터와 삼기국민학교 교정에 흩어져 있던 불상편들은 수습, 복원되어 현재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으며 3기의 불상 모두가 머리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가운데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왼편에 관세음보살입상과 오른편에 대세지보살입상이 세워져 있으며 이를 일컬어 삼존불상이라 말한다.
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은 대좌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있다. 왼손은 옷자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손등이 앞을 향하여 가슴부분에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향하고 있으나 풍화에 의하여 많은 부분이 마멸되었다. 옷자락은 가슴에서 한 번 묶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 부분에서 잘라졌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여래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분되어 있고 여래상 뒤에는 광배(光背)가 있다. 4각의 지대석 위에 역시 4각의 하대석이 같은 방향으로 놓여있으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하대석 위에는 여덟 개의 겹입으로 된 연꽃을 조각하였는데 이 꽃들은 땅을 향하고 있으며 각 연꽃의 끝부분이 약간 치솟아 있다. 1매로 된 4각형의 하대석에 조각된 꽃들은 각이 지는 곳에 있는 꽃들의 길이가 약간 길게 표현되고 있다. 이 위에 8면으로 도니 중대석이 놓여 있다. 중대석의 각 면은 하대석의 연꽃들과 맞닿아 있으며 팔면 모두에는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양으로 조각하였다. 중대석의 바로 위 상대석에는 일곱잎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연꽃잎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서 하대석에 조각된 연꽃무늬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상대석은 하대석을 반대로 올려 놓은 형태로 크기도 하대석과 비슷하다. 여래상 뒤의 광배는 원래는 한 매의 돌이었으나 지금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고 윗부분이 일부 파손된 상태이다. 여래상의 얼굴이 놓이는 위치의 좌우와 머리 위쪽으로 앉아 있는 형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광배의 앞면에는 아래부분부터 맨 위의 불상에 이르기까지 불꽃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이 무늬 안쪽으로 당초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여래상을 받치고 있는 부분에는 원형으로 연꽃임을 펼쳐 놓은 형태가 양각되어 있고 광배의 뒷면에는 보살상으로 보이는 부처상이 조각되어 있다.
좌우 협시보살상은 모두 서있는 상으로 수법과 크기가 비슷하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는 것이다. 아미타 본존불의 좌측에 있는 보살상은 머리부분이 없어졌으며 어깨는 좁으며 곡선을 이루고 팔과 이어지는 부분에는 얇은 겉옷이 걸쳐져 있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머리부분이 없어진 탓으로 가슴과의 부분에 2줄이 남았다. 목걸이는 반원형으로 부조되었으며 왼손을 굽혀 목걸이의 중간부분을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구부려 잡고 있다. 오른손은 늘어 뜨려 겉옷자락을 쥐고 있으며 두손의 어깨부분과 팔목부분에는 두꺼운 장식이 있으며 왼손의 굽혀진 부분에는 옷자락이 흘러내린다. 옷은 상반신으로 치우친 몸의 중간 부분에서 한번 매듭이 지어지고 그 아래로 나비매듭이 있다. 나비 매듭의 위와 아래로는 옷자락이 곡선을 이루는 X자형을 이루며 매듭 아래부분으로 겉옷 아래의 옷자락은 연꽃모양으로 좌우 발쪽으로 갈라져 있다. 발은 맨발이며 대좌는 방형 대석위에 7잎의 연꽃을 새긴 하대와 3잎의 연꽃이 새겨진 상대로 이루어졌는데 상대와 하대는 원형을 이룬다. 대좌의 뒷면과 불상의 뒷면은 거칠게 표현되고 대좌에 있는 연꽃도 생략되었다.
본존상의 우측에 있는 불상도 목이 없어졌으며 좌측에 있는 불상과 기본적으로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손의 처리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좌측보살이 왼손을 굽혀 목걸이를 잡고 있는 것과 달리 우측 보살상은 오른손을 굽혀 좌측어깨에서 흘러내린 겉옷자락을 잡고 있다. 이외에는 대체로 같은 형태이며 대좌의 처리수법도 같으며 두불상이 모두 높이 105㎝이고 대좌의 대석은 77×66㎝ 크기이다.
3. 봉림사지 불상과 석등
봉림사지에 있었던 이들 유물들은 이미 말한 바와같이 전북대학교 박물관과 옥구 발산리로 옮겨져 있다. 이중 발산리 석등은 일본의 한반도 강제 점령시기에 이 지역에 있었던 일본인 농장지주의 정원 장식을 위하여 옮겨진 것이다. 그리고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것은 본존을 위하여 옮겨진 것으로 사찰이 망하고 그 안에 남아있던 유물들의 수난과 고난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유물중 석등은 하대석에서 상대석으로 이어지는 간주와 불을 밝히는 화창 부분의 처리가 주목된다. 간주석은 본디 8각 기둥을 이루는 것이 전형적인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고복형(또는 북모양) 간주가 등장하며 이것은 지역적인 특징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몇차례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발산리에 있는 석등은 간주석에 용무늬가 장식되고 불상이 첨가되어 있어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또 화창은 등을 밝혔을 때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가도록 8각의 화사석에 4곳 또는 실상사 석등처럼 8곳에 장방형의 구멍을 뚫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발산리 석등에는 장방형 화창 대신에 각을 죽인 장방형, 또는 타원형의 화창이 있어 특이한 요소로 꼽을 수 있다.
삼존불상은 그 구도가 삼존불상의 기본적인 구도, 즉 앉아있는 본존상의 자우에 서있는 협시불이 있는 구도를 따르고 있다. 또 좌우협시불의 형태가 거의 유사한 점이나 이들의 손모양이 대칭을 이루는 것도 기본틀을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불상의 뒷면에는 손질을 소략하게 한 점이나 장식을 하지 않은 점은 이 불상이 자리한 뒷부분이 외부에서 감춰진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예배의 공간이 전면에 있고 그 뒤로는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이 불상들의 뒤로 벽이나 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같은 생략은 불상조성의 시기가 빠르지 않음을 의미하며 대체로 고려초, 신라말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불상의 연대와 부합된다.
끝으로 이 불상, 석등, 석탑들이 한 곳에 있지 못하고 서로 다른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에서 세월의 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이들 유물이 자리하고 있었던 봉림사지가 조사되고 이들이 본디의 자리에 정당하게 자리매김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