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 대학에 있으면서 요즘처럼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아본 적도 없는 것 같소. 졸업정원제 덕분에 대학이 겁 없이 확장되던 80년대 초 석사학위만 가지고도 들어올 수 있었던 대학이지만 전도양양한 무역회사나 종합상사에 들어간 동창이나 ‘영감’ 소리 듣던 친구들이 별로 부럽지 않았소. 오히려 그들로부터 “그려, 우리는 속물이 되었지만 너는 세속에 물들지 말고 잘 해보거라”하는, 약간 빈정거림이 섞여있는, 격려를 받으며 우쭐대기조차 했었소. 학원자율화와 더불어 대학의 시위가 확산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호출되어 군사작전하듯 지휘통솔에 따라 이리 저리 몰리어 다니던 시절에도 “한없이 권력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바깥세상에 비하면 그래도 대학은 무풍지대여”하는 부러움의 탄식을 곧잘 듣곤 했었소.
그런데 요즘화서 듣느 소리는 염려와 격려와 질타가 뒤섞인 동정이오. “요즘 대학교수 해먹기 힘들지?” “점수안주면 어용으로 몰린다며?” “요즘도 밤에 연구실에 남아있을 수 있는가? 위험허지 않어?” “학생들에게 너무 곧이 곧대로 허지마소. 망신당헐라.”
이처럼 우리 교수들의 신변을 염려해주는 소리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대학 현실과 너무 엉뚱해 의아스럽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하오. 때로는 이러한 얼치기 동정의 속셈이 빤히 보이기도 하여 분노스럽기 조차하오. ‘교권이 땅에 떨어졋다.’ ‘학생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 '교수는 물론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 그런데, 좀더 본질적인 진단에 근거한 근원적인 처방ㅇ르 제시해주는 듯한 이런 점잖은 훈계 속에는 엉큼한 음모가 숨어 있어 차라리 절망스럽기 조차하오. 이들은 학생들의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폐륜으로 이미 단정하고 이 또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강조함으로써 문제를 엉뚱한 방향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오. 아비가 자식의 허물을 탓하기에 앞서 ‘내 탓이오!’ 하며 자기 종아리를 먼저 때린다는 얘기인데, 겸허한(?) 자기반성이야 문제 될 게 없지만 그 자식에게 진정 그럴만한 허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규명되어야 하지 않겠소?
대학생들이 과연 폐륜아요? (이는 ‘어느 누가 죄가 없어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소?’하는 질문과는 초점이 다른 것이오.) 대학교 정이 무슨 깡패들의 소굴이오? 아니며 어거지 폭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무법천지요? 막말로 그들이 못할 일 했소? 그래 그 봉변당한 ‘스승’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게요? 교권을 땅에 떨어뜰린 자가 과연 누구요? 학생이요? 스승(교수)이요? 아니면 교육부 관리요? 그 뒤의 권력이요? 그리고 누가 누구를 지도한단 밀이오?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사회가 온통 ‘돈독’이 올라 있는 판국에 대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나 대학만 하라지요. 아니 우리 대학생들만 하라지요. 대학이 썩은 구석이 없어 하는 얘기는 아니오. 오늘 신문 사회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 ‘건국이래 최대의’ 입시부정, 얼마전의 ‘가짜 올드악기 밀반입’ 사건. 논문 표절 및 연줄에 얽힌 편파적 교수인사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우리 동료 교수님들. 민주화 바람에 편승하여 스스로 민주화를 내세우며 총학장으로 선출되었다가 정치권의 풍향이 바뀌자 교육부를 부지런히 드나들며 눈치보기에 바쁜 우리의 ‘어르시넨들’ (더울 가증스러운 일은 자기를 총학장으로 선출해준 교수협의회의 권위를 스스로 부인하는 살모사의 배은망덕이겠는데…). 전교조 가입 교사들의 밥줄을 하루아침에 끊어버린 반교육적 해바라기성 ‘정치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를 매도해마지 않던 썩어 빠진 정치꾼들이나 약삭빠른 언론의 여론재판에 편승하여 자기 제자들에 대한 변명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아니 저간의 사정과 시시비비를 가려보려 하기도 전에, 급히 모여 ‘교권수호’와 ‘학칙엄증적용’등 지키지도 못할 것- 이것이 어디 이들의 의지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이오?-을 공동 결의하던 우리들의 ‘가장님들’ (더욱 절망스러운 일은 이들의 ‘평화적 시위’ 운운의 어정쩡한 양비론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여 결국 힘있는 자들을 이롭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인데…). 하나같이 대학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스런 일임에 틀림없소.
그러나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러한 비리의 대부분은 우리 학생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오. 물론 우리 학생들이라고 해서 아무런 흠이 없을 수야 없겠소? 벼락부자 아버지의 흉내를 내는 치들도 있고 야비한 정치모리배를 ‘사부’로 모시고 있는 부류들도 있소. 출세에 눈이 멀어 사회적 정의고 우정이고에 등을 돌린 자들도 적지 않소. 경험이 부족하여 공공의 돈을 임의로 집행하여 물의를 빚는 학생회 간부도 있고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희생하고 잇으니 장학금ㅇ르 주시오’ 하는 일치기 운동권도 있기는 하오. 그러나 갈 데 없는 우리 사회 돈벌레들만 하겠소? 공공연한 약속을 하루 아침에 파기하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정치꾼들과 비교하겠소? 체면도 자좀심도 촌지에 팔아버린 채 권력에, 재벌에 빌붙어 기생하고 있는 사이비 ‘무관의 제왕들’ 만 하겠소?
최형! 청년이 썩으면 나라가 망한다지요? 이를 몰라서 우리 대학의, 우리 대학생들의 잘못을 축소 조작하는(?) 것은 아니오. 자신들의 잘못을 대학의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의 추잡함을 감추려는 ‘저들의’ 음모에 너무도 화가 나서 하는 얘기요. ‘똥묻은 게 겨묻은 것 나무람’을 탓하자는 것만도 아니오. 입바른 소리 잘하는 사람을 인격적 파탄자로 몰아붙여 스스로의 허물을 덮으려는 술수를, 그들의 여론재판에서 아니면 잔뜩 점잔을 뺀 저들의 훈계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오. 회상하고도 싶지 않지만 돌아가신 교육학자 선생님을 강간파렴치범으로 몰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던 자들의 흉계를, 대학생들에 대한 정치권의 성토에서, 언론의 호들갑에서, 이에 편승한 우리 소시민들의 무비판적인 대응에서 다시 한번 보는 듯 하여 치가 떨리기 조차 하는 거요.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개 눈에는 개만 보이오. 개인의 출세에 몸이 달아있는 우리 황금충들이 저 대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을 이해할 수 있겠소? 남을 위해서는 생색나는 일, 이름이라도 매스컴에 날 수 있는 일, 그리하여 결국 자신의 돈벌이나 출세에 도움이 되는 일, 이런 일 말고는 생각해 보지조차 못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해방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치는 그들의 정열을 헌신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겠소? 욕망에 눈이 뒤집혀 선정적인 주간지 내용을 몸소 실천하고파 몸부림하는 육욕의 노예들이, 열악한 여건 속에서 학생회 사업을 꾸려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남녀학생들의 밤새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소? 어쩌면 이들에게는 이것이 선망스러운 ‘절호의 기회’일 것이요. 매일 저녁 텔레비전의 비정상적인 남녀애정놀이에 취하여 웃다 울다 하는 ‘보통사람들’이 남녀대학생들의 수련회나 농촌봉사활동을 어떻게 정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소? 갖가지 추잡한 일들을 상상하며 스스로 흥분하고 분노할 것이오.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은 이것을 ‘일을 빙자한 탈선’의 기회 아니면 좋게 봐주어 ‘젊은 혈기에 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위험스러운’ 상황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될 것이오. 모두 자기와 비슷하리라고 여기기 때문이오.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끈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가 딸의 늦은 귀가에 애가 타는 것도 다 세상 남자들이 자기와 같으리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겠소? 성고문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한다는 혐의를 품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최형! 얘기가 너무 극단을 치닫는 것 같아 안타깝소. 내 스스로가 어떤 편견에 들씌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두렵소. 자기 직장 자랑하는 놈, 처자식 자랑이나 일삼는 팔불출에 비견할 수 있을 텐데 하는 걱정도 앞서요. “현직에 있는 교수들이여,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이런 학생들을 마음놓고 꾸짖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그런 교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학생들의 눈에 교수가 눈치껏 처세하는 기회주의자로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는 어느 여류작가의 질타에, 아니면 “무리를 지어 반정부적 성명을 내는 데는 용감하면서 왜 대학생들의 폭력적 시위형태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꾸짖지 못하고 침묵했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이라는 등의 매도에 혹 자격지심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소. ‘똥뀐 놈이 씅 낸다’고…
그러나 나의 ‘씅’ 냄이, 이런 선정적인 매도를 ‘그러면 당신들은 무엇을 했소? 권력이 백주 대낮에 젊음을 살해하고 있을 때 그들에 대해 무엇이라 항의를 해보았소?’ ‘우리의 민주화 과정이 이처럼 파행을 거듭하고 있을 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소?’ 등의 물음으로 되받아치기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소. 이러한 왈가왈부는 이미 우리 대학생들을 패륜아로 전제하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오. 이들을 반인륜적 무리들로 단정을 하고서 그 원인과 그 처방을 모색하려 하는 것이오. 나는 이것이 불만이라는 얘기요.
최형! 대학이 제 위상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소. 그러나 그 원인이 어디에 있소. 최소한의 윤리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팽배해져가는 천한 황금만능주의, 출세제일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오. 이에 편승하여 엄청난 돈과 권력을 독점하려는 ‘한줌도 안되는 세력들’이 우리사회를 분탕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오? 사회가 이처럼 위기 일발의 비상 상황인데 대학이 냉정하게 ‘본연의 위치’-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를 지켜낼 수 있겠소?
최형은 지금 나의 얘기가 ‘대학 교수답지 않다’며 염려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너무 격하다고. 그러나 ‘뮛뮛답다’는 평가는 역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우리 학생들에게 항상 ‘지성인답게’를 요구하는데 이 의미도 우리가 처한 구체적 역사속에서 규정되어야 할 것이오. 동료가 테러를 당하고 있는데 이성적 대화로 대응을 하는 것만이 ‘지성인다운’ 것은 아닐 것이오. 인마살상용 최루탄 가스속에서도, 백공단의 쇠파이프 세례속에서도, 이를 부추기는 절망스러기조차 한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도, 지성인은 차분하게 논리로만 항의를 해야 하는 거요? 숱한 대화의 시도가 좌절되어 불가피하게 펼치는 항의 농성이나 시위가 과연 ‘반지성적인’ 것으로 매도도리 수 있는 거요? 우리 사회를 벼랑의 끝으로 몰고가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보고 분노하는 학생들에게 ‘그래도 지성인답게 담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만이 과연 ‘대학교수다운’ 처사인 거요?
그렇다면 나는 ‘대학교수답고’ 싶지 않소. 그렇다면 나는 ‘지성인’ 이기를 포기하겠소. 내가 만약 이들을 나무랜다면 이는 그들의 분노나 항의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닐게요. 그것은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가를 미리 예견치 못했다는 점에 대한 것일게요.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그만큼 순수한 것이었던 거요. 불의에 분노하고 항의하며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오. 지성인이라면 더욱 더 그 불의와 폭력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분노와 항거도 더 빨라야 하고 더 거세어야 할 것이오.
최형! 나는 대학에 몸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조차 하오. 우리들의 순결한 젊음과 함께 할수 있기 때문이오. 내가 속스러워지는 것은 그들의 정열이 막아주기 때문이오. 그들의 순수한 사랑이 나의 타락을 조금은 더디게 해주기 때문이오.
그러나 자만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오. 우리의 사회를 좀먹는 악의 기운이 우리 대학이라고 해서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 해서 하는 말이 아니오. 기득권을 확인하며 득세하려는 무리가 우리 대학이라고 없을 수 없기 때문만도 아니오. 대학이 비교적 덜 타락한 곳으로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그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 대학의 이상과 젊음이 우리 사회를 심연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게 해주는 마지막 버팀목이 되어야 하며 대학을 위한 우리 사회의 희생과 그에 대한 기대가 너무도 막중한 것이라는 절박한 자각 때문이기도 하오. 반동의 기운이 팽배해져 가는 요즘 우리의 고삐를 늦구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새삼 되새기오.
두세스런 객담이 너무 길어졌소. 요즘들어 다시 한번 언론의 위력을 점감하며 올바른 여론형성을 위해 헌신하는 형의 노력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