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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7 | 연재 [문화저널]
쓸쓸한 날의 여행
박남준 편집위원(2004-01-29 14:58:37)



쓸쓸한 날 나는 먼 여행을 떠나갔다. 다시는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아예 훌훌 털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 떠나간 것도 아니며 이 쓸쓸한 세상에 염증을, 또는 권태를 이기지 못하여 떠나간 것은 더욱 아니었다.
아뭏튼 나는 떠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제 도처에서 나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논리학에서 두 개의 개념이나 명제사이에 의미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관계, 등등. 이것은 모순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적 의미로 풀어 쓴 것이다. 이 말은 한자어 창 모자와 방패 순 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복합어인 셈이다. 세상의 그 무엇이든지 꿰뚫을 수 있다는 창과 그 어떠한 날카로움으로도 뚫리지 않는다는 방패를 만들려던 사람들에 의해서 모순이라는 말은 우리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셈이다.
창과 방패는 그것의 어떠한 효용성을 떠나서 평화로운 세상에 쓰이는 물건들이 아니다. 죽고 죽이는 세상, 개인의 집단의 지극한 이기심이 그들의 정신세계에 반영되어 허망한 지배욕과 그에 더불어 땀흘리지 않고 따라오는 물거품과도 같은 검은 부의 축적이 사람들의 정신을 좀벌레 처럼 좀 먹으며 끊임없이 부추기는 옛날이나 지금의 세상에 필요한 짧게 이야기하면 바로 전쟁물자인 것이다.
세상이 각박하여 약육강식의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같은 전쟁물자를 만드는 사람들에 있어서도 모와 순처럼 이를테면 어떤이는 그 무엇이든지 꿰뚫어서 공격하는 대상을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창을 만드는 사람들의 일군이 있는가 하면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온전히 보전시키고자 정성을 다하여 방패를 만드는 일군의 사람들이 시대에 공존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골프장을 건설한다고 하며 온 산천을 파헤치고 무수한 산림을 도륙하여 안전시설을 무시한 채 공사를 서두르던 중 장마철의 집중 폭우로 산사태를 불러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골프장 주변의 인근 마을을 산사태가 덮쳐내려 일가족 다섯 명이 생매장의 참사를 당했다는데 있다. 또한 땀흘려 지어놓은 논밭의 작물이며, 마을의 상하수도 시설 등이 밀려 내린 토사에 파묻히고 지반이 내려앉아 가옥들의 벽면에 금이가는 등 많은 민생고를 초래하게 되었다.
보상이 제대로 되었을리도 없다. 보상에 관한 문제도 그렇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 피해액을 골고루 혹 그 액수가 충분치 않더라고 보상이 되었다면 모르지만 차등 보상을 해 주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 서로에게서조차 냉랭한 위화감을 주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눈에 훤히 보이는 간특한 작태이다. 하나의 큰소리가 나오는 것을 사전에 막고 보자는 참으로 가진자들의 무서운 계략인 것이다. 그렇게해서 만든 골프장 또한 어떠한가? 한 해에도 몇 차례씩 강력 분무기와 헬기까지 동원하여 수십트럭 분량의 농약을 골프장의 잔디밭과 주변에 부려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캐디들이 농약에 중독되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신문지상에 오르 내린 적도 있었다.
자고로 옛날부터 배가 골아 죽었다는 사람들은 있었어도 골프 못 쳐서 그것이 한이 되어 죽었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질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건설중인 골프장이 경기도에만도 무려 50곳이 넘으며 강원도의 수려한 산악지대에도 몇 십 여 곳이 줄을 지어 앞을 다투며 만들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직 미처 허가가 나가지 못한 골프장 신규신청서가 아니라 각 관공서에 계류중이라고 한다. 도대체 그 많지도 않은 산림자원을 파괴하며 훼손, 오염시키면서까지 나래비를 서서 만들려는 골프장이 필요한 것인가?
아직도 한 칸 내 집 마련이 세상의 소원이라는 이 나라 민초들의 안타까운 삶이 있다. 세상은 왜 이리 삭막하게 변해만 가는가? 한 포기의 꽃,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름답게 피워내는 한 송이의 꽃, 울창하게 자라나 맑은 공기를 뿜어내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그 고마움을 보람으로 여기며 나와 이웃, 더 나아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랑을 배워 간다. 지리산이며 덕유산, 섬진이며 만경, 그리고 금강에 이르는 이 지역 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자행된 자연 생태계의 파괴와 쓰레기더미들이 온 산천을 덮고 있다.
아! 그간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살았다는 것이 저처럼 한낱 쓰레기더미를 더 가중시키는 그런 삶은 아니었던가 아니라면 바로 쓰레기더미인가 온갖 모순 투성이의 세상 그 세상의 한 점 티끌 같은 귀퉁이를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려는 모순 덩어리의 나. 쓸쓸한 날의 여행은 바로 이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놓을 수는 없었다. 향기로운 쓰레기는 없는 것인가 그래 거름이 되자 저 산천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살찌우는 거름일 수만 있다면.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이제 동천의 여명을 타고 떠나야겠다. 가지고 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부끄러움 없이 벗을 수 없던 옷 한 벌 꿰어찬 채. 지리산의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저만큼의 계류에 새벽안개가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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