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8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현실적 진실과는 관계없는 영화의 허망함
「걸어서 하늘까지」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1-29 15:00:09)
신문광고를 보니 줄 선 많은 사람들을 배경으로 한 우리 영화가 있었다. 곽지균 감독 밑에서 수업하 장현수의 데뷔작 「걸어서 하늘까지」였다. 지난 4월에 있었던 제30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각색상, 편집상 등 3개 부문 수상작이라 무심한 관객들도 그걸 알아보는구나 싶었다.
또 어떤 스프츠신문에서 “첫 작품 흥행성공 가슴 벅차다”는 타이틀로 장현수감독의 기사를 싣고 있었다. 「걸어서 하늘까지」가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아내는 등 열광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었다.
올해 들어 최초로 10만관객을 동원한 「아래층 여자와 위층 남자」에 이어 침체된 우리 영화의 숨통이 비로소 활짝 트이나 보다고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그 기쁨은, 그러나 필자가 영화를 보러간 극장에서 무참해지고 말았다. 흔히 그래왔듯 20명도 안되는 ‘정예관객’들과 함께 봐야했던 것이다.
그때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호젓함이다. 정예관객들은 비닐봉지를 뽀시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교양없이 낄낄거리지도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지만 극장에 온 사람들이 뭐하러 왔는지 왈칵 의심날 때가 많다. 스크린과 상관없이 잡담하고 군것질을 할 양이면 집에서 TV나 볼 것이지 어려운 발걸음은 왜 했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런 푸념은 정성들여 영화를 감상하자는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다소 소런스러워도 좋으니 제발 덕분에 관객이 많기를 기대하는 심정때문이라해도 무방하다. 사설이 길어진 것은, 요컨대 「걸어서 하늘까지」가 신문기사에서처럼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듯해서이다.
「걸어서 하늘까지」는 문순태의 소설을 곽지균감독이 시나리오로 다시 써서 만든 영화다. 말하자면 감독이 각색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만큼 시나리오가 좋았음을 인정한 셈인데, 편집상 수상과 더불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편집이 그렇다.
수서가 뒤바뀐 듯하지만 우선 그것부터 얘기해보자. 마구잡이(스탭진에게 미안한 표현이지만)로 여러 장면을 다 찍고난 다음 시나리오에 의해 화면을 구성하는 것이 편집이다. 편집은 생략과 연결 등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하나의 작품을 무리없이 엮어내는 중요한 기술인 것이다.
유기적 통일성과 장면마다의 당위성이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다. 그것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지 못할 경우 영화의 완성도에 치명적 손상을 입힌다. 소위 가위질이 주는 폐해도 그 지점에서 거론될 수 있거니와 배우들의 비교적 리얼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걸어서 하늘까지」가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다.
몇 장면만 예를 들어보자 “고마워요”라며 날치(배종옥)가 말하자 방에서 나가려던 정만(강석우)이 되돌아서더니 느닷없이 키스하고 이어 정사씬이 펼쳐진다. 심리적 배경이나 주변정황이 설득력있게 그려지지 못한 정사씬은 말할 나위없이 외설의 혐의만 안겨줄 뿐이다.
물새(정보석)의 징역과 출소 등을 짧은 머리와 감방장면만으로 처리한 것도 생략기법이 지나치게 쓰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카메라 앵글을 날치의 화려한 변신에 들이댔기 때무이라고 보이지만 물새에 의해서 비로소 그녀는 주동인물로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부하들에게 의해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조직의 두목(김용건)을 살해한 직후의 화면 생략도 긴장감을 까닭없이 해체시켰다는 점에서 불만이다. 물새가 죽는 마지막 장면과 경찰출동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있는 것도 긴박감을 뺏어 싱겁게 하고 말았다.
궁극적으로 우리 영화의 침체 원인을 관객들의 외화중독증에 두고 있는 필자지만 바로 이런 경우 그것이 독단임을 어쩔 수없이 깨닫게 된다. 시나리오 부재로 완성도가 뒤진 영화를 무조건 안본다고 힘주어 말함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완성도 부족이 시나리오 부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 주범은 통속성이다. 는 소매치기라는 의외의 인물이 영화를 이끌어가지만, 그리하여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만 결국 사랑을 관류시킴으로써 지극히 통속적이다.
물론 사랑은 유사이래 인류의 지대한 관심거리였다. 흔해 빠지다 못해 통속적이지만 또 그만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한다. 문제는 흔한 사랑을 독창적인 방정식으로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있다.
감방을 제집 드나들듯하고 ‘학바리’에 대한 기본적 저주를 갖고 사는 물새가 어쩌다 사랑을 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해피엔딩의 결말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물새의 죽음은, 따라서 지극히 상투적인―소매치기 주제에 무슨 얼어죽을 사랑이냐는 조소만 관객들에게 안겨줄 뿐이다.
또 다른 소매치기 날치의 정말과의 사랑과 그 파국도 마치 「눈물의 웨딩드레스」같은 짜임으로 그런 인상을 풍긴다. 사회정의를 주제로 내세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소매치기 전과자가 새출발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않을 뿐더러 애당초 꿈도 꾸지말라는 쐐기인 셈이다.
어차피 현실적 진실과 상관없는 영화속(가 그렇다는 말이다)이라면 굳이 비극으로 끝낼 건 무언가. 죽음 자체가 그 한계를 스스로 드러낸 꼴이지만 관객들이 보다 현시로가 근사(近似)하게 느끼는 영화속 이야기일 때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날치가 소매치기한 지갑들을 집에 보관해놓은 다소 현실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편 정보석과 배종옥의 연기가 좋아보였다. 「제5의 사나이」에서 보여준 냉혈한 킬러이미지와 또 다르게 정보석은 특유의 가냘프고 섬세한, 그리하여 일제침략기때 무력한 지식인같이 보이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난 변신에 성공했다. 배종옥도 「젊은 날의 초상」에서 보여준 천의무봉한 작부역보다 못하지만 실제 경험이 없는 점을 감안하면 소매치기역을 거뜬하게 소화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