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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 | 칼럼·시평 [문화칼럼]
다시 꽃피워야 할 모정(茅亭)문화
소재호 · 시인(2004-01-29 15:01:30)


우리는 직장에서나 사회생활 어디에서든지 젊은이들의 ‘무례’에 대하여 화제삼는 것을 자주 듣는다. 또한 노장층과 젊은이들과의 사이에서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도 가끔 듣는 말 중의 하나다. 세대간의 교류나 교통이 단절되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예절’이란 사실상 시대가 아무리 달라져도 면연히 이어지는 풍속중의 하나이거니와, 젊은이들이 무례하다는 공박은 결국 기성세대가 후속세대에게 바르게 교육시키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돌려져야 마땅할 것이다. 문화란 전통적 계승에 새로움에의 창의가 가미되어 조화롭게 전승됨을 그 속성으로 하지만, 계승의 책임이 기성세대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면에서든 단절이란 전세대의 책임일시 분명하다. 단절이 전제된 사회에서는 모든 인식의 문제나 모랄이나 사관까지도 한 동아리로 묶어질 수 없다. 소용돌이치게 시대가 변해서, 반역이었던 행위가 애민으로 평가받고, 애국의 일이 반민주의 작태로 환치된다든지, 국시였던 반공이 비판의 도마위에서 혀를 어지럽게 하는 등의 작금의 현실은, 세대별마다의 공론이 달라졌고 지향하는 가치가 달라졌으니, 갈등이 심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들의 삶은 민복(民福)을 지상주의로 하느냐, 민족통일을 지상주의로 하느냐에 따라 기존의 가치와 지향점은 송두리채 뒤집히는 결과에 이르며, 배경과 관이 달라져버린 세대간의 대화간격은 참으로 좁히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병리적 갈등이 만연하여, 혼돈 그 자체인 것 같기도 하다. 모두의 기례와 같이 세대간 갈등뿐만 아니라,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도 이루 헤아려 말하기 어렵다. 이러저러한 계층은 크게 보이는 국가 사회적 파적이겠으나, 그 외에도 더 작게 지역을 쪼개고, 더 작게 혈연이나 학연을 찾고, 도농간의 격차와 직종간의 차별이 제기되고, 무슨무슨 소규모의 모임에서 계에 이르기까지, 소속된 자기 동아리의 이기주의만을 주창하는 현금의 사회는 현란(?)하여 어지러울 지경이다. 자기들끼리만 패를 지어 한 우물 속에 들어 앉아 밖을 내다보려 하지 않는다. 다른 집단도 각기 자기 우물들을 가지고 있어서 예외 없이 자기 우물 속에 안주한다. 저쪽 우물속 에서 나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아예 듣기가 싫다. 처음은 동족의 개구리였는데, 본관이 같은 한 조상의 후예들이었는데 우연한 운명으로 분파를 달리하여 집단 이기주의를 신념처럼 깃발세우고 집단 배타주의를 함성지른다.
거청하게 남북간, 동서간의 불화를 따지기 전에 우리들 삶의 현장이면 어디에서나 대질리는 집단적 대립은 그냥 무시도어도 좋은 것인가? 도대체 우리는 분파적 이기주의로, 동질성지향에서 벗어나 오히려 차등성을 모색 · 모의하면서 다른 계파에게 싸늘한 눈초리로 감상적 감각적 배타주의에로, 당당하게(?) 전진해가고 있지 않은가? 신문지상의 기사들 가운데 대체로 모든 정치적 협상이나 노사협상은, 아예 협상하지 않기 위하여 협상의 테이블에 앉는 것처럼 느껴지기 일쑤다. 나의 주장과 상대편 주장 사이는 그 폭이 있겠는데 내 요구의 전부를 강요하면서 상대의 요구를 묵살하는 그래서 협상은 결렬되고 양자는 전무의 손실을 어리석게도 자초하고 만다. 필자의 건방진 생각이지만, 우리민족은 협상의 기예가 너무 모자란다는 것과, 공동의 선을 창출하고 합일의 정신을 숭상하게 성격적 소양이 매우 부족하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남의 주장에 빨리 동조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지루하게나마 남을 꾸준히 설득하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아예 감정을 극단으로 솟구치게 하고는 고함지르고 각기 다른 문으로 떠나면 영영 다시 마주 앉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크고 놀라운 범죄는 잘도 기억에서 빨리 지우면서 「용서하면서」, 하찮은 작은 감정의 올은, 토라지면 몇 십년이 흘러도 풀려고 하지 않는 우리네의 괴퍅성은 저주시럽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엔 봉사활동을 위한 모임「조직」들이 서양식이건 동양식이건, 자타의 주문에 의해서 많이 생성되고 있지만, 이들 모임도 얼마지 않아서 의례히 집단 이기주의나 집단 배타주의에 빠지고, 그 조직안세 소규모 분파를 만들어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기에 급급하다. 자기 발성에만 몰두하고 전체「국가민족사회」에 속하는 가치 창출에는 등한하다. 소위 사랑방 토론을 실현하려는 몇몇 시도도 결국 자기 계열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만 충실하려고 하니 우리는 논쟁과 설투의 극악한 상황을 자주 만나고 만다.
옛날 모정에서의 토론은 최소한 지금 같지는 않았다. 모정을 동네 여론이 걸러지는 곳이었으며 본초적으로 ‘만남’그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 설사, 토론이나 협의가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격론으로 치닫다가 결렬되고 말지라도 다음날 정회된 감정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 이런 반복은 숙명적인 것이었다. 패를 지어 집단이기주의를 배양하지도 않았다. 남의 어려운 일을 돕자는데서 모정문화는 발원한다. 품을 지고 갚는 것「품앗이」은 일의 양과 질로 따졌다. 예절이나 이웃과의 정리 나눔은 그 지역에서 최고의 가치였다. 모정에서 운위되는 주제가 옳고 그름의 어느 쪽에 치우치던 우리 삶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별개의 것이며, 당시의 정치가 어떻게 평가받던 우리의 나아가는 바는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의 삶이 정체되지 않는 ‘인간다운 삶’에의 정진에만 오로지 하였다. 독재정권의 그 사악성이 엄존한 때에도 그 시비 때문에 우리 모정이 추구하는 ‘인간다운 삶의 공동 인식’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전체가 협동으로 정진하는 ‘일’을 위하여 모정은 존재했다. 일을 기피하는 자, 사행성「놀음」따위, 반 윤리적인 것, 특출한 투쟁 성향, 비타협성, 이런 모든 것이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었다.
고루한 것이, 너무 보수적인 것이, 또는 전근대적인 사고가 모정의 정론으로 더러는 군림하기도 했지만 갈등이 심각하여 서로 영영 등을 돌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공동의 선을 향하여 모정의 문화가 단위별로 지역사회에 기여했을 것이라는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모정에서는 남을 이해하려는 분위기에 참여자는 충실했고 무슨 계층이나 세대간의 이견은 이내 한 주류속에 통합되었다.
배타나 사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도 기다려주면 결국 중론에 거리낌없이 합류된 곳이 바로 모정 문화의 진수였다.
물론 모정이 지니는 부정적인 면도 약간 있었겠으나 지금 우리들처럼 협상의 포기로 생산을 위한 일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오늘날 일은 기피하고 놀면서, 남을 헐뜯는 데에 하루하루를 허비하는 무수한 평론가(?)들의 양산은 우리 시대의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일하는 광장으로 내모는 정론이 서야할 때가 와야 한다. 말로서 말 많은 세상, 그 말들을 교통 정리하는 기능이나 역할을 수행을 지금에 알맞는 모정문화가 필요하다. 가치 있는 문화의 생산, 인간다운 삶의 공동 터전을 가꾸기 위하여 꼭 보다 발전적인 모정이 이룩되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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