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8 | [저널초점]
천심이 모여든 그곳, 농투산이의 백산
윤덕향․발행인
(2004-01-29 15:01:48)
드넓은 만경평야를 따라 흐르는 동진강의 좌우 들녘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 땅 민초들의 먹거리, 벼가 자라는 열기가 가득하다. 저수지가 말라 바닥을 드러내는 그 오랜 가뭄에도 하루가 새롭게 푸르름을 더하던 벼포기 마다에는 이 땅 농투산이들의 정성이 자리한다. 그것은 벼포기들이 추곡수매가를 둘러싼 이런저런 논의에도 목소리 한번 제대로 못낸 농투산이의 갈라터진 손바닥 깊숙히 뿌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벼포기는 자식과 다름아니다. 아니 고향을 떠나버린 자식과 다름아니다. 아니 고향을 떠나버린 자식과 달리 항상 옆에 두어야만 속이 시원한 또다른 자식이다. 농산물 가격의 비교우위론 따위는 머리에 먹물 가득한 사람들의 소관일 뿐 물이 없어 빨래를 못하더라도 힘자라는 한 부족할새라 벼포기마다에 물을 대느라 밤을 하얗게 밝히는 것이 이 땅의 농투산이다.
가문 것도 숙명이고 물난리도 운명이거니 그저 땅에 코박고 부옇게 뜬 얼굴로 자식을 만지듯 벼포기마다를 들추며 살다간 것이 이 땅에 먼저 살았던 농투산이들이다. 멀건 죽 한 그릇으로 주리다 못해 아픈 창자를 달래며 한방울의 물이라도 더보태려나대던 그들에게 조상님 제사상에 올릴 쌀알 몇톨조차 앗아가는 물세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여 사발통문 끝에 모여든 곳이 동진강가 백산이 아니던가.
백산에 모여든 이후 이들의 행동을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불러야할지 이름조차 어느 하나로 부르지 못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갑오농민전쟁이니, 갑오 동학농민전쟁이니, 갑오 동학혁명이니 어지러울 뿐이다. 아니 전쟁인지 혁명인지 아니면 단순한 민란인지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내건 기치의 글자조차 保國이니 輔國이니 설왕설래할 뿌이다. 백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도, 이름이야 어떠하든 1884년 고창, 정읍, 부안 지역의 농투산이들은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모여들었다. 백산으로. 전하는 말로는 ‘서면 백산이오 앉으면 죽산’이었다니 녹록하지 않은 무리였으며 그들이 바로 민심이오 천심이었다. 천심이 처음 모여든 곳, 그곳이 바로 백산이다.
지금 동학백ㅈ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되고 김개남의 동상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판에 주제넘게 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동학’으로 칭해지는 일의 전개과정이나 성격,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는 작업에서 꾸려질 것이고 그것의 구체적인 형상화라든가 오늘에서 얻을 바에 대해서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처음 농투산이들이 어색하게 죽창을 들고 꾸역꾸역 모여들었을 백산을 말하려는 것이다.
백산은 해발 50M밖에 되지 않는 낮은 언덕과 같은 야산이다. 주변이 드넓은 들판이다 보니 얼마간 높다는 인식이 들 수도 있으나 그렇다해도 그저 수수한 동산일 뿐이다. 이런 곳에 왜 처음 집결을 하였을까 생각될 정도로 산세도 크지않고 크게 험하지도 않은 곳이다. 하필이면 왜 이곳에 모였을까? 간단하다. 그곳에 옛부터의 토성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주변지역의 농투산이들이 모이기에 좋은 지역에 있었으니까 선택되었을 것이다.
백산에는 마한시대의 토성이 있다. 드넓은 부안 지역 곳곳에는 낮은 야산마다에 토성이 있는 곳이 적지않으며 백산에도 그같은 토성중의 하나가 있다. 이 토성들은 이 땅에서 농사를 본격적으로 경영하고 후일 삼국을 이루는 모태가 되는 철기문화를 지닌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들의 문화는 따라서 삼국시대 문화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으며 국가 발생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전영래님에 의하면 백제를 침공하는 당나라 군대를 맞아 싸우도록 성충이 말한 백강이 다름아닌 동진강이며 백강이란 명칭도 백산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백제 멸망후 주류성에 근거를 둔 부흥운동군이 일본에서 온 원군과 더불어 마지막 전투를 치룬 백촌강도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부뚜막에 X을 눈 강아지새끼 같은 처지로 내몰린 지금 고고학적 가치로 이곳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백산은 마한시대의 유적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보존되고 그 역사적 의미가 밝혀져야 되는 곳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에 더하여 우리 역사에 있어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올린 동학의 처음 움직임이 이루어진 곳이라는 점에서 그 보존은 더 이상의 췌언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멀리 가지말고 바로 이웃 전남만 하더라도 이런 유적이면 가꾸고 다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며 길가에 안내표지판도 들어설 법하다. 그런데 지금 백산은 잘 있는가? 아니다. 그 흔한 안내판 하나 변변하지 않다. 그 산자락을 이 핑계 저 이유로 야금야금 헐어들고 파고 들고 골재채취에다 무어다 틈만 나면 부수고 있다. 부옇게 개기름이 흐르는 황토현전적지 기념관안의 양반 초상화처럼 산위에 비석하나 세워놓고 아래로는 허물고 있다. 우리지역 문화재라는 것들이 겪는 공통된 고초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기념비만 덩그렇게 남지않을까 걱정된다. 그리고 지금처럼이라면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다. 아니 힘좋은 불도자나 포크레인 하나면 지금일 수도 있다.
문화재나 역사적 기념물중에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백산과 같은 지역이나 백산이 포함되는 성과 같은 경우는 그 주변 지역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구조물이나 인공이 가해진 흔적 자체보다 그같은 인공이 가해진 자연과 자연을 이용한 슬기가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문화는 자연을 압도하거나 자연을 파괴와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고 최소한의 파괴로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유적, 유물은 대부분이 그것들과 어우러진 주변의 자연속에서 비로소 그 진면목이 파악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백제기행에서 그 장대비를 맞으로 연곡사를 다녀온 것이며 쌍계사를 극성스럽게도 올라간 것이다. 그깟 부도탑이야 스라이드로, 아니면 천연색 사진으로 편안하게 집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장을 굳이 찾아나서는 것은 그 현장과 주변의 자연에서 그 의미를 참으로 알 수가, 아닌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백산에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아니 그곳에 누군가의 멋진 휘호를 남길 수 있는 웅장한 기념관을 세우는 것으로 백산이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산자락을 이런저런 명분과 핑계로 뜯어내고 헐어내어 기념비가 있는 정상 주변만 마지못하듯 덩그렇게 흘립하는 토단으로 남겨진다면, 산정상에 기념관, 기념비, 또다른 온갖 것들이 들어선다 하여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많은 사람이 찾아가기 쉽게 도심 한복판으로 기념비와 기념관을 옮겨놓는 것이 낫다. 그 따위 물건으로 의미가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산자락을 빼앗긴 백산은 아무런 감동도 역사적 의미도 우리에게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벼포기를 가꿀 수 없는 늙은 농투산이와 같다. 농사를 뺏긴 농투산이나 자연을 파괴당한 백산이나 닮은 꼴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동학’과 관련된 의미있는 유적 중 제모습을 그런대로 가진 것이 많지않다. 황토현 전적지는 되지도 않은 초상화나 걸려있는 돈냄새로 공원처럼 까발겨져 그 의미가 얼룩져있다. 백산도 황토현처럼 산자락이 깎일대로 깎여나가서 손바닥만큼 남은 언덕에 마지못한 듯 기념물 따위를 세우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농투산이들의 손바닥에 뿌리내린 벼포기처럼 역사의 온갖 풍상을 겪은 얼굴로 우리에게 뿌리를 내릴 것인가? 선택해야만 한다. 그것도 하루라도 빨리. 이제 우리의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