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쯤 전 TV 주말 영화 시간에 「추억」(The Way We Were)이라는 영화가 방영되었다. 이십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드니 폴락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바브라 스트라이 샌드 주연의 애정물이었다. ‘변혁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각기 다른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사랑’이 그 주제로, 영화보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직접 부른 감미로운 주제곡이 더 널리 알려지기도 했었는데 그것들을 안방에서 만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 얼마 후, 폭락과 레드포드 콤비가 만든 최근 영화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벼르고 있다가 실로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하바나(아바나의 미국식 발음), 한창 혁명이 진행중이던 쿠바의 수도가 그 영화의 제목이자 무대였다. 전문 도박사 잭 웨일(로버트 레드포드 분)이 새로운 포카판을 찾아 쿠바로 향하는 배 위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한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그를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 여인은 귀족출신의 의사이면서 반 바티스타 혁명군의 정신적 지주인 아무로(라울 줄리아 분-「로메로」에서 신부역을 맡았던)의 아내로 뛰어난 미모와 지략을 이용하여 미국으로부터 무기(군용 무전기 한 대)를 숨겨 가지고 오는 길이었다. 삼엄한 경비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된 차에 우연히 만난 한 미국인(잭)의 도움으로 무사히 임무를 마친 그녀는 노골적으로 애정을 구하는 무례한 미국인에게 그의 단순한 호의가 혁명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를 깨우쳐주려고 하지만 헛일이다. 반정부세려고가 그들의 뒤를 쫓는 씸(SIM-비밀경찰)과의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한편에서 도박과 여자를 즐기고 있던 그가 도박과 관련되지 않은 의미의 혁명(그는 전쟁 중에 벌이는 도박판이 가장 몫이 크다고 믿고 아바나에 온 것이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다시 그 여인 로베르타(레나 올린 분)에 의해서다. 남편은 살해되고,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당해야 했던 고문으로 탈진한 그녀 앞에 생명의 은인이요, 따뜻한 보호자로 잭이 서 있다. 집요하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다가서는 그를 물리치기엔 그녀가 너무 지쳐 있었음인가. 이윽고 그녀는 자신자신의 세계를 버리고 그와 함께 새 삶을 찾아 떠날 것을 꿈꾸기에 이르는데…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감금된 채 아내의 부정을 미끼로 한 씸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버티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면서 상황은 빠르게 뒤집힌다. 결국 남편에게로 돌아간 로베르타와 미국으로 돌아가는 잭과의 애잔한 이별의 장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한 편의 잘 짜여진 사랑이야기일뿐, 거기에서 역사의식이나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는 이들의 가치관은 철저히 표백된 채 감미로운 사랑을 더욱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한 소품 혹은 무대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도박꾼의 시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면(또 그것이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완벽한 것이었다.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을 일상화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에 두고서도 그들의 뜻을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잭의 인생관이나 그에 대한 단 한 마디의 비판도 없이 이끌리고 마는 로베르타의 행적들을 단순히 그들 개인에 국한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그 납득할 수 없는 사실들을 있음직한 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영화 전편에 흐르고 있는 미국식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위력이다. 이제 그 화려한 포장을 한 번 들춰보자.
먼저 이 영화에는 혁명의 주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을 아무리 짜맞춰 보아도 레지스탕스 류의 낭만조차 맛보기 힘들다. 로베르타나 심지어 핵심적 배후인물로 선정된 아투로 조차도 혁명을 위해서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아투로의 석방과 바티스타의 항복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은 그저 주어진 상황으로 그려질 뿐이다. 환호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군중들을 헤치고 남편을 찾아가는 로베르타의 무심한 표정(그것이 남편에 대한 죄책감과 잭을 향한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이 뒤섞인 심정의 훌륭한 연기라고 하더라도)은 그들은 삶이 처음부터 혁명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이와 관련해서 장면의 배치를 다시 보자. 이 영화는 깔끔한 화면처리와 절제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돋보임을 위해서 잘려나간 부분들에는 선 듯 찬성할 수 없다. 혁명의 상황을 알리는 최소한의 장면들(씸에 의해 자행되는 추격․고문․살해 등)은 대사없이 처리되거나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장면(잭이 벌이는 퇴폐적 행태들)과 빠른 속도로 교차되어 나타나는 식으로 처리되면서 얼핏 박진감이 있어보이나 그 둘을 이어주는 본질적인 끈이 없음을 해서 냉소적 허무주의의 효과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잭과 로베르타의 사랑은 그만큼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또 하나의 혁명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입장을 들 수 있다. 그들에게 환락의 공간을 제공해주는 바티스타 저부의 본질은 그렇다치고 언제 어디서나 거칠데 없이 활약하고 환영까지 받는 그들의 행각을 보면 그 당시 쿠바 민중들이 ‘양키고 흠!’은 어디로 실종되었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로베르타와 그녀의 남편이 잭의 호의에 감사하며 그를 동지로 여기고 싶어 하는 단순함이나,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나를 먼저 바꿔 보라”며 로베르타를 유혹하는 잭의 자신감은 혁명의 피상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돈과 CIA면 안되는 일이 없는 미국적 위대함에는 혐오감마저 인다.
이것이 작게는 이 한편의 영화에, 크게는 제국주의 문화 전반에 숨어 있는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제 얼굴이다. 그것은 흔히 이기주의에 다름 아닌 개인주의와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교묘히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나와 상대방의 삶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그것을 침해하지 않는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폴락의 대답은 한결같다. ‘사랑하지만 헤어진다’「추억」에 반전․반핵운동가인 케이티와 부유층 자제이며 소설가인 허블과의 살아 역시 그랬다. 그 누구에게도 수렴되지 않는 개인의 자유의지, 이것만이 절대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양념처럼 등장하는 휴머니즘(로버트 레드포드는 얼마나 인간적이고 멋진 신사인가)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눈을 가리우는 현란한 장막일 뿐이다.
모든 예술 분야에 있어서 사실주의가 갖고있는 힘이 세부적 성실성에 뒷받침된 역사의 총체성 획득에 있음을 생각할 때 이 영와의 한계가 어디인가를 가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