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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 | [문화저널]
구월이 오는 소리
박남준․편집위원․시인 (2004-01-29 15:07:21)
뜰앞을 가르는 골짜기의 작은 개울물소리, 잎새를 스치는 바람소리, 먼 산의 새소리 무성한 숲의 여름을 지나 구월이 오는 소리. 마당엔 풀벌레 소리 가득합니다. 아! 구월이 오는 소리. 산방에 밤이 오면 가만가만 밀려오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낮은 낮은 소리들로 물결쳐 오는 노래. 내 귀를 열고 파문져 오는 노래들 있습니다. 귀뚜라미 베짱이 풀여치 방울벌레 잠들지 않은 나무, 잠들지 않은 풀, 잠들지 않는 숲의 산, 저마다 다른 소리로 모나지 않게 이루어 내는 음률, 마치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그들은 때로 다른 모든 소리들이 조용히 잦아들며 귀뚜라미의 협주곡이 베짱이의 독주가 밤을 두고 이어집니다. 악장의 구분처럼 이루어집니다. 이들에게도 선율을 주재하는 지휘자가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구월을 부르는 늦여름 밤일 것입니다. 이들을 키워 거두는 저 산 대지의 어머니, 푸르도록 많은 별밭의 하늘일 것입니다. 잠들지 않은 내 가슴에도 흐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내가 알 수 없는 무엇으로도 기쁨에 차 오를 때 나를 감싼 섬모 하나하나 모든 소리들도 밤하늘의 푝죽처럼 터지며 즐거움으로 꽃피워 오릅니다. 아 내가 풀 길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슬픔으로 싸여 끝도 없이 쓰러져 누울 때 저 구월이 오는 소리 어느 것 하나 절망 아닌 것 없습니다. 눈물 아닌 것 같습니다. 장자의 내편 “제물론”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곽자기가 책상에 기대앉아 하늘을 우러러 길게 숨을 내쉬니 그 멍청한 모습이 마치 짝을 잃은 것 같다. 안성자유가 물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형체는 진실로 마른 나무같이 하시고 마음은 진실로 색은 재와 같이 하시니 말입니다. 지금 책상에 기대고 있는 분은 전에 책상에 기대고 있던 분이 아닙니다.” 남곽자기가 말했다. “언아 자네 또한 착하지 아니한가? 자네가 그렇게 물으니 지금 나는 내 자신을 잊고 있었는데 자네도 그것을 알았던가. 자네는 인뢰는 들었을 것이나 지뢰는 아직 못 들었을 것이고 자네가 지뢰를 들었더라도 천뢰는 아직 못 들었을 것이야.” 안성자유가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남곽자기가 대답했다. “대체로 대지가 내뿜는 숨을 바람이라 한다. 이것이 일지 않으면 몰라도 한 번 일기만 하면 지상의 모든 구멍들이 모두 성낸 듯이 울부짖는다. 너만이 그 소리의 우우함을 듣지 못했느냐? 산 속의 숲이 우거지고 백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에 패어 있는 구멍-코와도 같으며 입과도 같으며 뒤와도 같으며 쪼구미와도 같으며 고리와도 같으며 절구와도 같으며 연못과도 같으며 웅덩이와도 같은 것들-이 바람을 맞아 격류와도 같이 쾅쾅하는 소리, 화살이 날 듯이 쉬익 하는 소리, 꾸짖듯이 거센 소리, 숨을 들이쉬는 듯 하는 소리, 목청을 높여 부르짖는 소리, 탁 가라앉아 흐린 소리, 깊숙이 기어 들어가는 듯한 소리, 재재거리듯이 맑은 소리들을 내기도 한다. 그래서 앞에 것이 우우 하면 뒤에 것이 우우 한다. 작게 부는 바람에는 작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화답한다. 그러다가 바람이 한 번 자면 모든 구멍들은 텅 비게 되는 것이니 너만이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 흔들리다가 또 한들한들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안성자유가 물었다. “지뢰는 모든 구멍이 내는 것이고 인뢰는 퉁소 같은 것이 내는 것이군요 그러면 천뢰는 무엇입니까” 남곽자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체로 그 불어내는 것이 만가지로 같지 않지만 그것들을 제멋대로 불어내게 하는 것이 천뢰란다. 그래서 모두가 다 제멋대로 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성내게 하는 것은 누구일까?” 장자는 남곽자기와 그의 제자인 안성자우의 문답을 통하여 자연의 소리를 인뢰, 지뢰, 천뢰로 나누어 놓고 천뢰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인뢰를 인뢰로써 듣고 지뢰를 지뢰로써 듣는 설을 천뢰라고 했다. 곧 만뢰의 울림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원리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소리로서 그 배후에서 울리게 하는 어떤 존재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뢰란 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 울리는 만뢰를 만뢰 그 자체대로 듣는 것이라 하였다. 달리 말해서 하늘이란 사람이나 땅과 대립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고 사람은 사람이고 땅은 땅 그 자체인 것을 말한다. 곧 하늘이란 있는 그대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분별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때문에 일체의 존재와 한가지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망아지경이다. 이런 경지에 들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곽자기는 책상에 기대어 깊은숨을 쉬었다. 깊은숨을 쉰 그는 자신과 일체의 만물을 천뢰로서 들을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 모든 분별을 넘어서 일체의 존재와 한가지가 될 수 있을까. 만류귀종이라 했던가. 이 밤 산방을 감고 도는 저 모드의 소리들이 구월이 오는 소리들로 어우러져 새어가는 데 어쩌자고 나는 쓸쓸해져만 가나. 쩔거덕 쩔거덕 저 베짱이 소리마저 올올이 가슴의 실을 뽑아 오지 않는 님의 한 필 옷감을 짜는 것 같으니. 날은 흐리고 부슬부슬 밤비 오는 소리 피워놓은 모깃불이 비를 맞고 사위어 가듯 풀벌레 소리 비에 젖어 고요에 잠기고 바람이 부네. 승무 같은, 쓰러져 보일 듯 말 듯 움찔거리는 살풀이춤의 어깨 짓 같은 것, 들풀들의 떨리듯 가냘픈 바람의 춤결, 붉게 노을진 감잎 하나 둘 바람에 실려 떨어지는데. 이제 내일은 일어나야겠다. 일어나 저 바람 부는 들녘 걸어가야겠다. 새떼들이 날아오르고 작은 작은 풀꽃들이 웃음 짓는 길 숲 긴 한숨이며 큰 슬픔, 큰 기쁨마저 다 벗어두고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가야겠다. 비가 오면 비다 되어 가야겠다. 풀벌레가 되어 가야겠다. 논 뚝외풀이 으아리꽃이 붉은 이삭여뀌 꽃이 되어 가야겠다. 하얀 수염가래꽃이 되어 가야겠다. 구월이 오는 소리가 되어 가야겠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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