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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 | 특집 [특집]
동학의 발생과 교조신원 운동 전개
우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2004-01-29 15:10:42)

19세기로 오자 그 전부터 성장해 오던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각 분야별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체제를 지탱해주는 중심적 고리들의 이완․붕괴과정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이는 동시에 봉건체제에 문제를 느끼고 도전하는 이런저런 세력들과 형성과 맞물려 일어났다.

1. 민중세력의 형성과 저항

19세기로 오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대규모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19세기 중엽을 지나자 차츰차츰 각 지역과 각 계층별 저항의 움직임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났다.
거기에다 조선은 18세기 말부터 전략적 위치로 인해 서구자본주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대상이었다. 19세기 중엽에는 그들의 관심이 더욱 노골화되어 군사적 침략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자 조선의 민심은 한층 흉흉해졌다.
1862년 이른바 임술민농항쟁이 일어나 진주, 단성, 함양, 성주 등을 선두로 인근 전라도 지방의 익산, 함평, 정읍, 고창 등지로 번졌고 곧이어 충청도, 제주도, 함경도, 황해도에까지 이르는 전국적 규모의 항쟁으로 불붙었다.
1876년 강요된 개항이 맞이하자 농민에게 밀어닥친 질곡은 더욱 심했다. 여기에 자극받아 농민저항의 움직임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갔다. 1894년 고부에서 전봉준이 반제반봉건의 횃불을 높이 쳐들어 올리기 전해인, 그리고 동학교단의 교조신원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해인 1893년 한해만해도 평안도의 함종, 중화, 경기도의 인천, 황해도의 재념, 개성, 황주, 충청도의 청풍, 황간, 강원도의 금성 등지에서 연이어 농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2. 전리되는 민중사상

조선 후기부터 ‘정감록’적 도참사상이 사회 저변에서 상당한 힘을 가지고 널리 퍼지고 있었다. 또 일반 기층민들 대부분 일반농민들은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는 미륵신앙에서 예언하는 미륵출현을 한 가닥 희망으로 바라고 있었다. 또 일반 기층민 사이에는 후천(後天)개벽설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곧 주역(周易)에서 끌어온 것으로 지금의 운수는 악이 지배하여 신분이 높고 부패한 자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신천이지만 곧 힘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잘 사는 후천이 온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추천개벽에 초점을 두게된 것은 19세기 사회적 이행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변혁세력에 의해서였다. 그들에 의하여 주역은 그 속에 담긴 변화에 담긴 논리가 강조되어 조선의 현실을 꿰뚫어 볼 이론서로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주역에 대한 이러한 해석 변화는 정감록, 미륵신앙과 같은 미중사상 등과 함께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취시켰다.
19세기 확실히 조선의 여기 저기서 그리고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믿음과 신앙을 주던 사상들이 서서히 내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하나로 묶여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창출한 시대였고, 동시에 그런 사사들이 반봉건운동에 강력한 이념적 구심점으로 등장하여 기층민중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던, 그리하여 새로운 사회로의 빛을 보여준 여명기였다.

3. 동학의 등장과 그 의미

이러한 19세기의 변혁적 분위기 아래 동학이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도되었다.
1) 최제우의 구도와 동학의 탄생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던 당시의 농촌경제는 봉건정부의 폭압적 수탈과 지주들의 강압적 착취로 인해 19세기 중엽의 4대 병폐적 집중현상(권력집중, 사회적 권위집중, 토지집중, 화폐집중)이 중첩되어 파탄일로에 있었고, 이에 따라 농촌 사회는 근본부터 뒤흔들리고 있었다. 농민들은 이러한 중첩된 질곡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삶의 밑바닥에서 헤매게 되었다.
최제우의 눈에도 이런 농촌현실이 비켜갈 수는 없었다. 또 그 자신도 급속히 몰락해가는 양반집의 서자로서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뒷켠으로 밀려가는데 예외일 수 없었다. 그래서 최제우의 고민이 시작되었고, 그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20대에는 온통조선 천지를 기웃거려 보았으나 사회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암울한 분위기만 다시 확인했을 뿐이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제법 안다는 무리는 그들대로 세월만 흘러보내고 있었고, 또 사회 일각에서는 서학이 기층민중의 구미에 맞게 설교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유학적 지식인으로서 서학을 하나의 사상적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고뇌에 찬사색과 구도에 들어갔다.
위와같은 최제우의 정신적 편력이 끝나는 시점에서 동학이 완성되었고, 이때 동학이라는 이름은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은 동학이다… 운은 하나이고 도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논학문)고 최제우가 논파한대로 서학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2) 동학의 의미
최제우는 여러 민중사상을 편력하여 자기 것으로 흡수하면서 서학이 던진 커다란 사상적 충격을 주체적으로 대응하면서 종합적으로 정리된 종교체계로서 동학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이때 서학은 최제우에게 사상적 충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침략한 서구 자본주의와도 똑같은 현실적 위협이었다. 최제우는 또 다른 불안이 시작되었고 그 대응방안이 모색 되었다.
드디어 내적 고통과 함께 외적 위협까지도 떠맡아야 하는 개개인의 삶과 역사적 객관성, 또는 인간과 하늘의 법칙 사이에 조서오디는 긴장을 최제우는 일원적으로 파악하는 인간중심의 기 개념과 예정 조화적인 천도순환을 통해 통일적으로 풀어버렸다.
이는 또한 자연법칙 질서로서 당시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그것과는 대척점에서 인간생활 중심의 질서를 내세움으로써 지배구조의 전도를 가능케 하는 눈을 열어주었다. ⇒ 인식상의 전환.
그러나 최제우의 한계를 지적한다면 그가 기층민중의 염원을 반영하고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면서도 이러한 종교적 입장에 안주하여 현실의 가파른 모순에 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최제우는 현실적 개혁론 보다는 종교적 구원의 방법을 선택했다. 이런 방법은 결국 급박한 현실에 대한 우회적 대응론 밖에 될 수 없었으나 최제우 자신의 관점에서는 어쩌면 보다 합리적인 방안이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는 당시 조선에 밀어닥친 안팎의 현실모순에 대한 투철한 투쟁은 자신의 방법론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우회적인 방법론을 가지는 동학까지도 당시 조선봉건체제 속에서는 불온한 것이었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최제우는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1864년 3월 10일 ?道?正이라는 죄목으로 대구에서 처형당했다.

4. 교조신원운동

1890년대로 오자 호서․호남지역에서는 동학이 그 신도수를 늘려가고 있었고, 이를 기화로 지방수령들은 ‘동학은 사술이다’는 이름 아래 교도들의 돈을 빼앗거나 관아에 잡아가 곤욕을 치루게 하였다.

1) 공주와 삼례에서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그래도 ‘하지만 동학이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하고 동학의 문을 두드리는 자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남접계의 서인주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된다.
1892년 7월 서인주는 서병학과 함께 최시형을 만나 “지금 우리들의 급무는 수운 선생의 억울함을 푸는데 있으니, 선생은 솟장(㕾狀)을 지어 한양 궁궐 앞에서 수운 선생의 억울함을 호소하소서”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은 이를 두려워 하여 거절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우선 10월에 휘하의 교도를 공주에 모이게 하고 충천 감사 조병식에게 글을 올려 최제우 신원(伸冤:억울함을 푸는것)을 요구하니 이것이 이른바 공주집회였다.
상황이 이렇게 벌어지자 최시형의 북접계는 미온적인 관의 태도를 보고 뒤늦게나마 교조신원운동에 뛰어들었다.
일반 기층민의 요구와 교도들의 요청을 확인한 최시형은 10월 27일에 교도들의 삼례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1월 3일 삼례에 수 천의 교도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전라감영에 글을 띄워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호소하였다. 이 때도 역시 전라감사는 해산을 종용하는 회유적인 글만을 남발하였다. 이러자 최시형은 모인 교도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교도 아닌 수천명의 군중은 곧장 전주로 몰려가 감사에게 관리와 토호들의 불법탐학을 호소하였고 들어줄 때까지 감영문 밖에서 버티었다.
이것을 보면 동학교단 안에서 두 세력 즉, 온건노선을 펴는 쪽과 강경노선을 펴는 쪽이 존재하였고, 이들은 현실대처방에서 각각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위의 두 지보히를 대하는 태도도 달리 나타났는데, 온건노선 쪽인 북접계는 교조신원과 포교의 인정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면, 강경노선 쪽인 남접계는 관리와 토호들의 탐학과 수탈제거 등에 더 관심을 보였다.
서인주 ․서병학 등은 계속해서 휘하의 교도와 함께 일반 농민들을 불러 모으는 대규모 집단시위를 계획하였다.

2) 한양의 척왜양 운동
이제는 강도를 높여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봉건정부의 심장부에서 무언가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 차례였다.
서인주․서병학 등은 1893년 1월 최시형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같이 상소운동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접계가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가로 놓여 있었다.
그럼녀 북접계를 고민에 빠뜨린 진퇴양난의 상황은 무엇이었던가. 1892년 12월 초,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연일 수 많은 사람이 몰려 들었다. 이 곳은 이제 동학교도 뿐만 아니라 공주집회와 삼례집회로 고무된 군중들의 열기로 끓어올랐다. 이런 군중의 외침에 당황한 북접계 지도부는 신중한 입장ㅇ르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서인주 등의 남접계와 장내리에 모인 수많은 군중의 복합상소 강행압력을 끝까지 거부했다간 어떤 돌발사태에 직면할지 몰랐다. 바로 이런 급박한 상황이 북접계를 고민에 빠트리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타협안으로 제시 된 것이 교단이 진행의 절차와 행사를 주관하는 복합상소이었다.
먼저 항양에 와 있던 서병학 등은 사실 복합상소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오히려 교인들에게 군복을 입혀 대형(隊兵)과 협동하여 민씨 집단을 타도하고 정부간당을 청소하는데 더 뜻을 두고 있었다. 이러자 2월 8일 한양에 도착한 손병희․김연국․손천민․박인호 등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둘러 11일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다. 상소는 밤낮 3일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곧 이어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 그 하는 일에 힘쓰고 있으면 소원에 따라 시행하리라”는 전교가 내렸다. 이에 북접계 쪽에서는 복합상소를 중단하고 각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복합상소가 진행되고 있을 때, 전라도 삼례에서는 수천 명이 모여 전라감사에게 글을 띄우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가 하면, 한양에서는 서인주․서병학 등의 남접계는 “척왜양”(斥倭洋)의 괘서를 한양 거리에 내어 걸고 노골적인 반외세(반봉건)을 부르짖고 있었다.
2월 14일 밤 미국인 학당에 서양학문을 배척하는 벽보를 붙인 것을 선두로 하여 미국인 교회당에 더욱 강경한 어조로 구체화된 내용의 괘서가 나붙었다. 다음은 프랑스 공사관, 일본 영사관에도 각각 괘서가 붙었는데 그 내용은 어서 짐을 싸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3월 7일 총공격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한양주재 다른 외교관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본국에 알리면서 비상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선에 와서 느낀 위기의 순간이었다.
비록 3월 7일 총공격이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척왜양”운동은 지방에서도 계속 이어져 운동의 지속성을 보여주었다.
이러면 이쯤에서 위의 “척왜양”운동을 어떤 세력이 주도했는지 짚고 가자.
복합상소가 한양에서 일어나고 있을 무렵, 전라도 삼례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 전라감사에게 3개조의 요구를 들이밀고 총대 20여 명을 뽑아 서울로 보냈다. 선발된 20여명은 2월 14일 입경하였고, 그 뒤를 따라 수천 명이 서울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은 이 보다 앞서 서인주와 상희하고 서인주로 하여금 한양의 복합상소를 “척왜양”운동을 유도하도록 하였고 자신은 삼례에서 사람들을 모아 한양의 운동을 지원하면서 상황에 따라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3) 보은과 원평에서
그러나 전봉준은 3월 7일의 총공격이 뜻대로 되지 않자 보다 더 대규모의 반외세(반봉건)운동을 위한 전국적 분위기 조성으로서 각 지방에 방문을 게시토록하고 재차 서울 공격을 유도함녀서 새로운 계획에 들어갔다. 서인주의 남접계는 북접계를 다시 끌어내고, 전봉준은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다른 지역에 사람들을 모아 교단쪽의 운동을 반외세(반봉건)의 정치운동으로 유도하면서 서울 공격을 관철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랗여 충청도는 보은에서, 전라도는 원평에서 각각의 집회가 동시에 벌어지게 되었다.
한양에서의 집회 이후 정부는 각 지방 관아에 “동학금지와 소두 수배령”을 내렸다. 그 때까지 만해도 정부는 남북접의 구분을 물론이거니와 복합상소의 소두와 “척왜양”운동의 주모자를 분간하지 못하고 ‘동학’하나로만 취급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 세력은 죄다 ‘동학’이라는 이름아래 뭉뚱그려져 정부로부터 쫓기는 처지였다.
이러한 정부의 금령과 수배령이 내리자 동학교도에 대한 지방관리의 탐학은 더욱 심해져 교도의 생명과 재산을 하루라도 보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북접지도부에서 동학교도들이 관리들의 좋은 표적이 되는 현실을 무시하고 수수방관하기에는 교단 존폐의 위기가 걸려 있었다. 또한 서인주 등의 남접계로부터 오는 압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북접의 최시현은 다시 어쩔수 없이 3월 11일 교도들을 보은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전봉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남접계는 발빠르게 척왜양의 격문을 보은 삼문 밖에 내걸었다. 군중들은 격문의 척왜양 노선에 공감했다. 계획한대로 서인주․서병학 등의 남접계가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성채를 쌓고 그 중앙에 “척왜양창의”라는 큰 기를 내세우고 사면에는 각각 방위를 나타내는 깃발을 꼽아 전투대형을 갖추기도 했다. 개항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자기들의 요구를 집단적으로 표명한 거은 처음이었다. 이 때 모인 사람의 수가 약 7~8만에 이르렀다 한다.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어 갔다.
양호선무사 어윤증은 그동안 장내리의 상황을 정탐한 후 북접 교단 쪽의 지도인사들과 타협안을 모색하였다. 북접 교단인사들은 감복하고 왕의 명지(明旨)가 있으면 해산하겠다고 말하였다. 어윤증은 4월 1일 청주 영장․보은군수 등을 대동하고 장내리로 가서 전보로 내려 온 왕의 윤음(淪音)을 엄숙하게 읽었다. 북접 교단 지도부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3일 안에 해산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투항적 태도에 분개한 집회자들이 서병학 및 최시형 등 북접 지도부를 타도하려 하자 서병학은 최시형․손병희 등과 함께 수많은 교도를 뒤에 하고 그날 밤을 틈 타 도망하였다.
보은집회에 모인 사람이 더 많았지만 운동의 강력한 구심점은 오히려 원평집회에 있었다. 전봉준은 보은집회의 성격이 점차 자신들의 계획한대로 정치운동으로 기울자 원평집회의 성격을 보다 뚜렸이 하였다.
전봉준은 보은집회가 이쪽에서 원하는대로 움직이자 21일에는 손화중휘하의 만여 명을 보은집회에 참여케했다. 그러나 북접계의 강력한 반발로 이 계획은 유보되었다. 하지만 보은집회에 참가한 남접계는 반외세의 글을 지어 게시하면서 보은집회를 보다 더 정치적 집단을 유도하고 그들의 행동을 부추겼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북접 지도부는 26일 어윤증과 만난 자리에서 해산시키겠다는 뜻을 밝히고 해산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 사이 전봉준은 북접계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1천여 명의 선발대를 보은으로 보냈다. 북접 지도부는 이들의 출발소식을 듣고 당황해 있던 중 기다리던 왕의 윤음이 4월 1일에 도착하자 서병학은 원평집회의 의도를 폭로하고 북접 지도부는 그 날 밤을 기다려 허겁지겁 도주했던 것이다.
보은집회가 해산되자 원평집회만이 독자적으로 행동을 일으켜 폭발적 힘을 보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원평집회도 그 내부에서 서서히 이탈하는 집단이 나타남에 따라 전봉준은 일단 해산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동학교단에서는 전봉준을 위험인물로 주목하고 교단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법소와 도소를 설치하여 교도들이 임의대로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5. 사발통문과 고부 봉기

1) 사발통문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만나 척왜양운동과 보은․원평집회가 그 나름대로의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는 있지만 이제는 온건노선으로서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나 바라는 북접계와의 연계에서 오는 실패의 경험을 다시 반복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직접적인 행동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전봉준은 1893년에 일어난 전국의 움직임을 그냥 놓쳐서는 안된다고 보고, 11월로 오자 본격적인 계획을 진행시켰다.
당시 천혜의 자연적 조건을 가지고 있던 고부에 조병갑이 부임해와 부임초부터 온갖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고부농민들은 조병갑의 불법탐학 뿐만 아니라 균전사로 보내진 김창석에게도 수탈당하였다. 그 밖에도 전운사 조필영이 여기에 가세해서 고부 농민들의 고혈을 빨고 있었다. 그는 조세를 호남의 각 항구로부터 나르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불법조항을 만들어 과외세금을 강징하면서 농민들을 괴롭혔다. 또 줄포 항구에는 일본 상인들이 몰려들어 농민이 지은 쌀을 헐값으로 사들여 마구 이본으로 실어 날랐다.
전봉준은 이 시기를 결정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전봉준은 조병갑의 부정 사례를 적은 민장(民狀)을 작성해 주었고, 이에 고부군민 40여명이 1, 2차로 고부관아로 몰려가 조병갑에게 등소(等訴)하였으나 오히려 쫓겨나고 말았다. 여기서 당시 합법적인 방법인 등소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고 도리어 붙잡히고 곤욕을 치루고 만다는 현실을 고부군민들은 똑똑히 체험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으로서는 이런 합법적 방법은 처음부터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전봉준은 믿을 수 있는 동지들을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현재의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에 있는 송두호의 집으로 모이게 했다. 이들은 봉기의 시대적 요청과 거기에 따른 채책을 토론하고 당면과제를 결정했다. 드디어 행동목표가 4개 사항으로 압축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아래의 4개사항을 포함하는 격문을 만들어 고부군내 “각리 이장 및 집장”들 앞으로 띄워 보냈다.
①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②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③ 군수에게 빌붙어 인민을 침략한 탐리를 징치할 것.
④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향할 것.
이들은 이 4개 결의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고부군수 조병갑은 11월 30일에 익산군수로 전임발령이 났다. 봉기의 1차 목표가 사라져 맥빠진 상황이 되었으므로 당장 고부군민을 움직이기 힘들게 되었다. 그후 고부군수로 6명의 새인물이 발령났으나 아무도 부임해 오지 않았다.
한편 11월 30일에 익산군수로 발령 난 조병갑은 계속 고부관아에 남아 있으면서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 고부군수 재취임의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1894년 1월 9일에 조병갑이 군수로 재부임하였다.
2) 고부봉기
전봉준은 최경선에게 봉기날짜를 알리고 태인 쪽의 준비를 부탁했다. 1월 10일로 잡았다. 사전에 연락된 사람들은 말목장터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이 어둠속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었다. 배들평야는 밝힌 불기둥으로 새 세상을 맞은 듯 했다.
전봉준은 군중을 두 패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달려갔다. 이들은 고부관아로 진격하면서 평소 악덕지주와 조병갑에게 기생해 살던 자들의 집을 습격, 소각하고 주변의 대나무 밭에서 죽장을 만들어 쥐었다. 드디어 새벽 공기를 가르는 함성은 고부관아를 향해 돌진했다. 1월 11일 이른아침에 고부관아는 힘 안들이고 점령되었다.

6. 맺는말

동학은 당시 사회경제적, 사상적 배경 속에서 최제우에 의해 창도, 이는 당시 봉건질서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대응을 제공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격 때문에 현실투쟁보다는 종교적 구원을 선택했다. 이것은 그후 교조신원운동시기(사실상 척왜양운동기)에 최시형의 선택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반면 19세기의 변혁운동을 계승하고 있는 정봉준을 위시한 남접계는 최시형의 북접계와는 달리 현실투쟁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이를 위해 동학 북접계를 끌어내어 이와 연계된 커다란 대중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전봉준 및 남접계의 주도 아래 북접계는 수동적으로 참여하였고, 1893년에 절정에 달하여 사발통문에 나타난 결의사항으로 수렴되었고, 결국 고부봉기로 이어져 1984년 농민전쟁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위와 같은 흐름을 염두해 둘 때 동학과 1894년 농민전쟁과의 상호관계는 더욱 명확해지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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