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문학
-불행한 분단시대 반쪽 문학사의 온전한 회복을 위하여-
김은정 편집위원
한국 현대사를 가장 뚜렷하게 규정짓는 8․15는 우리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의 오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그 날 우리 민족은 벅찬 감격과 기쁨 속에서 해방의 환희를 맛보았지만 그 날은 또한 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황을 전개시킨 배반의 비통한 현실을 안겨준 날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주체적 의지와는 관계없이 외세에 의하여 분단고착화라는 치욕적 역사를 해방과 더불어 가져다 준 8․15는 따라서 오늘의 우리 삶을 있게 한 중요한 역사적 시발점으로서 그 현실적 의의를 갖고 있다.
사실 굴욕스러운 일제치하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에게 8․15는 구체적인 체험의 역사가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에 의해 정리되어진 상태에서 이해되어진 역사의 한 장일 뿐이다.
해방이라는 환희의 기쁨과 함께 한편으로는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과 질곡의 분단 상황을 배태시킨 8․15해방으로부터 단독정부 수립까지의 3년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기다. 이 해방 직후의 3년은 진정한 민족해방과 반제 반봉건의 민주주의 변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이 응집될 수 있는 전환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비롯한 제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국제질서 재편 속에서 우리 한반도는 분할 점령되어야 했으며 반세기에 가까워오는 민족분단을 고착시킨 공간으로 존재해야 했다. 다시 말하면 해방이후의 3년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 독립국사 수립하려는 노력이 외세에 의하여 좌절된, 오히려 이민족 비극을 불러온 비극적 시기가 되어 버렸던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시기의 총체적 역사성을, 46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나서도 제대로 확보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80년대에 들어 해방 후 역사에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하면서 보다 올바른 시각으로 이를 연구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고, 특히 우리 현대사를 조망해내는 시발점의 의미를 갖는 해방공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또 그러한 연구결과로 집권 정치세력에 의해 은폐되었거나 왜곡되었던 역사적 진실이 적잖은 부분이 바로잡혀 드러나게 되었고 또 그것들은 새로운 시각과 관점에 의해서 재조명되는 차원에 이르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당시의 많은 부분이 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작업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해방직후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단순히 지나간 한 시대를 규명한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의 모습을, 삶의 구체적 상황들을 올바로 인식하고 내일을 건강하게 열기 위한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보다 더 과학적이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상황은 여지없이 반영되고 있다. 반세기로 이어지고 있는 민족의 분단은 문화에 있어서도 심각한 불구상태를 가져왔고 특히 문학은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편파적인 역사로 조립된 채 반쪽문학사로 오늘을 이어왔다. 민족분단이후 반공이데올로기를 강변해왔던 상황에서 해방직후의 상당수 문학인과 작품들은 현대문학사에서 자리를 잃어야 했으며 해방당시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형상화시킴으로써 문학으로 당시의 역사를 감당하고자 했던 적잖은 문학인들은 좌익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연구대상에서조차 제외되어야 했었다. 더욱이 남북의 분단상황이 지속되어 오는 동안 해방직후 행해졌던 문인들의 월북은 우리 현대 문학사에 풀지 못할 가장 커다란 과제를 안겨주게 되었다. 월북문인들의 문학사적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월북 이전의 문학활동에 대한 논의마저도 정치, 사상적인 차원에서의 규제조치로 인해 철저하게 차단되었으며 따라서 우리 현대 문학사의 연구에서 식민지 시대와 해방, 민족분단에 이르는 시기의 문학은 객관적으로 조명되지 못함으로써 온전한 문학사를 이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감수해야 했다.
월북문인의 문제가 꾸준한 논의의 대상이 되면서 해방공간의 문학에 대한 연구도 그 동안의 개괄적인 소개나 정리의 차원에서 한 걸음 나아가 당시의 문학이 지니는 의미를 조명해내는 소중한 성과로 축적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아직도 이 시기의 문학연구는 일정한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8․15가 우리 민족사에서 갖는 의미 못지 않게 해방공간의 문학이 우리 현대 문학사에서 갖고 있는 의의는 참으로 크다. 1945년에서 1948년까지의 3년은 길지 않은 시기였지만 일제치하의 암흑기로 규정되었던 문학사적 공동화 현상을 극복하고 한국 문학의 발전적 계승 가능성과 함께 분단 문학으로 고착되기 이전의 진정한 민족 문학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시기였다. 다시 말하자면 식민지적 문학상황이 지속되던 비극적 분위기를 마감하고 근대 이후 유일한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던 시기가 이때였고 이 때의 문학은 근대식민지 문학에서 현대문학으로 변모하는 가장 적나라한 문학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문학 평론가 임헌영씨는 이 시기의 문학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근대문학이후 한국의 문학인들은 한번도 검열 없는 창작의 자유를 누린 적이 없었으나 근대 이후 유일하게 창작의 자유를 만끽한 시대가 바로 이 시기로 평가되며 따라서 이 시대의 문학은 그 방향과 가치기준, 개인적인 찬부에 관계없이 근대 식민지 문학에서 현대 민족해방운동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시대의 문학이 분단되기 이전의 우리 민족 문학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마지막 잔영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 시기의 문학적 쟁점은 언젠가 우리가 문학적인 장벽을 허물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려 할 때 예상되는 문제들을 유추하게 해 줄 것이며, 분단이 지속되는 상태라 할지라도 오늘날 한국 문학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며 앞으로 어디로 향하여 뻗을 것인가를 암시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해방후 한국문학의 양상’에서)
이러한 문학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극히 미비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수준 또한 대부분 당시 문인들의 문단활동, 무예조직 그리고 그들의 이념적 논쟁을 해석해내는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지난 88년 일부 월북작가들이 선별적으로 해금된 이후 이들에 대한 연구가 보다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이들이 활동했던 해방공간 문학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의 성과가 올바른 우리 문학사 정립으로 이어지기까지엔 아직도 커다란 장벽으로 존재하고 있는 정치 사상적 규제와 분단의 논리가 극복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나마 지금까지의 해방공간문학사 연구의 초점이 되고 있는 해방직후 한국문학 양상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 현대문학사의 온전한 모습을 인식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당시 문인들의 문예활동과 문단조직을 중심으로 한 해방공간의 문학이 어떠한 양상을 띠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온전한 문학사의 회복을 위하여 해결해야할 과제는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보기로 한다.
해방공간의 문학
해방직후 최초로 등장한 문학조직은 조선문학건설본부였다. 이 모임은 표면상으로는 범문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그 주축을 이루었던 문인은 이화, 김남천, 이기영, 한설야, 이태준 등 옛 카프계열의 문인들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오장환 등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했던 문인들과 순수파 소설가 이태준, 박태원 그리고 해외문학파인 김광섭, 이양하 김진섭 등이 참여해 해방직후의 최초 범문단 조직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이 조직이 문학활동의 이념적 노선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은 1945년 8월 31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서기국을 통해 <문화활동의 기본적 일반방책>이 발표되면서부터인데 여기에 설정된 노선은 식민지 문화잔재의 청산과 문화의 인민적 기초 확립에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민족문화 건설이라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목표의 실천을 위해 채택하고 있는 전술에 있는데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내세운 문화전선의 통일은 조직에 참여한 예술인들의 사상이나 이념성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 성향은 당시 문단을 통합하는 끈이 될 수 있기는 했지만 식민지 시대 카프에 대응했던 변영로, 오상순, 이하윤, 김광균, 김진섭 등의 민족문학파와 해외문학파에게는 좌경으로 비쳐졌고, 또 반면에 카프계의 정통을 잇는 강경파 문인인 한설야, 이기영, 윤기정, 한효 등에게는 노선의 선명성에 대한 커다란 반발을 불러 일으켜 결국은 민족, 해외 문학파가 주축이 된 <중앙문화협회>와 카프계열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강경하고 분명한 이념적 지향성을 취하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을 결성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따라 해방직후의 문단은 조선문학건설본부, 중앙문화협회,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등 세 단체로 분열되면서 이념적 노선의 갈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은 이데올로기 지향이라는 기본적인 바탕의 공통된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적 정통성과 노선의 차이로 심각한 대립을 보였는데 조선문화건설본부가 민족문화를 해방시키고 제국주의 영향에서 벗어난 새로운 민족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분열과 분파를 극복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통일되는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문화운동을 주장한 반면,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은 계급문학의 이념적 정예화를 주장하는 더 급진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같은 좌익문단조직이면서도 이념적 노선의 차이로 분열과 대립의 국면이 심각해지자 조선공산당은 이들의 통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 두 단체는 1945년 12월 31일 ‘조선문학동맹’이라는 통합된 단체로 발촉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의 최대조직으로 평가받는 조선문학가동맹은 친일문학인과 보수성을 띤 민족문학 계열의 몇몇 문인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문인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그 위상을 세워놓았고 따라서 영향력 또한 커지게 되었다. 기관지인 <문학>을 간행, 활발한 문학활동을 주도하면서 조선공산당의 산하조직으로써 이념적 색채를 분명히 드러냈던 조선문학동맹은 그러나 통합한 이후에도 여전히 이념적 정통성 측면에서 불만을 갖고 있었던 프롤레타리아동맹 문인들의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조직의 뚜렷한 결속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문학 동맹은 1946년 2월 8. 9일 제 1회 전국문학자대회를 개최, 문단 주도권 장악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나 한설야, 이기영, 송영을 비롯한 카프 정통계열의 문인과 민족진영의 중앙문화협회 소속 문인들의 불참함으로써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문학 평론가 김윤식씨는 해방공간의 문단에서 민족진영이 날카롭게 맞서게 도니 것이 바로 이 전국문학자대회였다고 제시하고 이런 점에서 이 대회는 우리 근대문학사에 하나의 선을 긋는 분수령이라고 밝힌 바 있다.(‘해방공간의 문학’에서)
한편 우익의 문단에서도 좌익계열에 맞서 각종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조선문학건설본부에서 탈퇴해 결성한 중앙문화협회가 중심이 된 우익측은 좌익측의 전국조선문학자대회에 맞서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고 대회를 개최한다. 이 때에 선출된 임원은 회장에 정인보, 부회장에 박종화, 채동선, 설의식이다. 이 대회 또한 당시의 정세를 반영하는 의미를 드러냈는데 전국문학자대회에 여운형이 참석한데 반해, 이 대회에는 김구가 참여했고 이승만이 축사를 했는가하면 임정요인들이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좌익측의 대회나 우익측의 대회 모두 할것없이 얼마나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익측 문단에선 이 대회가 끝난 뒤 또 하나의 문학단체가 결성되는데 서정주, 김동리, 조지훈, 조연현 등이 주축이 된 ‘조선청년문학가협회가’가 바로 그것이다. 청년문학인들이 중심이 된 이 단체는 더욱 적극적인 정치, 사회 문제에의 관여를 배제하고 문학에서의 순수성을 표방했다. 이들 중앙문화협회와 전조선문필가협회,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1947년 2월 12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라는 단일조직으로 통합되며 이후 문학인들만의 조직은 1949년 12월 9일에 ‘한국문학가협회’로 이루어져 분단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문학사는 이들의 관점에서 재편되는, 반쪽 문학사의 시대를 잇게 된 것이다.
해방공간 문학의 특징은 결국 문학 단체가 정치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데에 집약될 것 같다. 문학과 정치를 동일하게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각각 다른 범주로 봐야하느냐의 문제가 이때처럼 예민하고 날카롭게 제기된 적도 없었으며 현실 참여의 문제 또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도 이 시기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문학사에선 이 시기 동안의 문학이 어떠한 실체로 존재 했었느냐에 대한 본질적인 연구작업이 될 수 있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연구작업은 깊이 있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해방직후 좌익계열의 문단 진영에서 활동하다 월북한 수많은 문인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규제가 전면적으로 풀리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때문이다.
사실 해방공간의 문학이 그 실체를 찾고, 우리의 온전한 문학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월북문인들에 대한 규제가 우선 해결되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주장은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오히려 걸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통일을 향한 다양한 움직임이 각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통일에의 의지가 진정한 것이라면 월북문인에 대한 정치, 사상적인 단죄는 이 시점에서 마감하고 그들의 문학사적 위치를 찾아주고 우리 문학사의 전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노력의 실체가 보여져야 하며 오히려 그러한 작업은 그 동안 정부가 표방해온 갖가지 화려한 통일논의들에 비워 볼 때 때늦은 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분단시대의 비극적 상황에서 살고 있다. 이 비극적 삶을 청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의식으로 역사를 이어가야 하는가? 해방 46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 볼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80년대 말을 즈음해 해방공간의 문학이 보다 본격적으로 연구,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미 발표된 글도 적잖게 나와 있어 해방공간의 작가의 작품을 연구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지만 필자의 한계로 당시의 문단 상황만을 아주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차원에 그치고 말았다.
참고로 해방공간에 이루어졌던 각종 문학인단체를 경성시기순서와 정치적 성격을 구분 소개한다. (임헌영의 ‘해방후 한국문학의 양상’에서 발췌)
<1945>
조선문학건설본부(좌):8월 16일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좌):9월 17일
중앙문화협회(우):9월 18일
조선문학가동맹(좌):12월 13일
<1946>
제 1회 조선문학자대회(좌):2월 8, 9일
전조선 문필가협회(우):3월 13일
조선청년문학가협회(우):4월 4일
<1947>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우):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