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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8 | 연재 [문화와사람]
명창 송만갑(宋萬甲)
최동현 군산수산대 교수(2004-01-29 15:13:15)

명창 송만갑(宋萬甲)
최동현 군산수산대 교수

우리나라 판소리 가문 주에서 최고의 가문은 누가 뭐래도 남원 운봉의 송씨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송씨 가문 만큼 뛰어난 명창을 배출한 가문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새로운 활력을 소생시킨 공로에 있어 어느 가문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송씨 가문의 시조인 송흥록은 가왕으로 일컬어진다. 따라서 송씨 가문은 그야말로, 우리 판소리의 왕가(王家)라 할 것이다.
송씨 가문이 남원 운봉에서 구례로 이사를 한 것은 송광록의 아들인 송우룡 때였다. 운봉에서 지리산을 넘어간 것이지만,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구례가 운봉보다 소리꾼이 활동하기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곧, 충분한 재력을 갖춘 판소리 후원자들이 많았었을 가능성을 들 수 있다.
송만갑은 1865년 구례읍 봉북리에서 후기 8명창중 한 사람인 송우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타가 공인하는 판소리 왕가의 혈통을 이었으니, 어려서부터 판소리 수업에 임하여, 이미 13세 경엔 소년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그러나 송만갑이 진정한 명창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아버지 송우룡으로부터 자기 가문의 전통적인 소리를 익힌 송만갑은 아무래도 전통적인 가문의 소리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사실 시대가 변하여 역사적 조건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인간의 감성도 달라지므로, 음악 또한 마땅히 변화해야만 한다. 민속음악인 판소리가 수백 번에 걸쳐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판소리의 이러한 변모 자기 갱신의 능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송만갑의 예술가로서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발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통만을 고수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야겠다는 반역아적 기질이야말로, 송만갑의 예술가로서의 천재성을 단적인 표현인 것이다.
송만갑은 마침내 각고 끝에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현재, 송우룡의 소리는 들어볼 수 없기 때문에, 송만갑이 새로이 개척한 소리가 이전의 소리와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송만갑이 가문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송유룡이 죽여버리려고까지 했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송만갑의 소리는 송우룡의 소리와는 매우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있는 유성기판을 통해서 보면, 송만갑의 소리는 칠성(목이 쉰 소리이면서도 아주 고음을 낼 수 있는 소리)으로, 고음에서 저음으로 뚝 떨어진다거나, 저음에서 고음으로 갑자기 솟구치면서 음색의 변화를 주는 창법을 구사하고 있다. 철저하게 배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통성을 사용하며, 대마디 대장단으로 엇부침을 거의 쓰지 않는다. 또 슬픈 대목에서도 슬픔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지 않고, 강한 감정의 절제를 보여준다.
이러한 송만갑의 소리는 20세기초에 활동했던 5명창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했다. 지금도 구례․하동 부근의 판소리 애호가들은 주저하지 않고 송만갑의 소리를 최고로 친다. 아닌게 아니라 통성으로 힘차게 뽑아올려 전력을 다해 내지르는 치열한 송만갑의 소리는 장대한 폭포수와 같은 위엄이 서려 있어, 다른 소리가 감히 범접할 틈이 없다.
송만갑은 예술에는 무섭도록 치열한 의식의 소유자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여리고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송만갑이 일찍이 상처를 하고서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견딜 수 없어, 결국 <심청가>는 부를 수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는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송만갑의 <심청가>는 후세에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유성기판에 한 대목이 취입된 것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송만갑은 인정 많고 마음씨가 좋아 수많은 제자를 두었다고 한다. 박동진씨는 젊었을 적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을 보았는데, 아침마다 일찍 나와 열심히 소리 공부에만 전념하는 자기를 특히 귀여워해서, 틈나는 대로 소리를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 판소리 외에는 다른 욕심이 없었으므로, 누구든지 배우려는 사람만 있으면 가르쳐 주었던 모양이다.
송만갑은 소리를 가르치면서 배우는 사람의 특성을 고려하여 각기 다르게 가르쳤다고 한다. 송만갑처럼 천성의 좋은 성대를 타고난 사람이라면 송만갑의 소리를 그대로 배워도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는 배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팽개칠 수도 없다. 타고난 성대에 맞게 가르친다면 자신의 조건에 맞는 소리를 하게 되어 누구라도 명창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명창은 각기 자기만의 특색으로 명창인 것이다. 이러한 송만갑의 태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송만갑이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현장에 동년배의 어느 소리꾼이 들르게 되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송만갑이 가르치는 소리는 자신이 부르는 소리와는 판연히 달랐다. 한참 동안의 교습이 끝난 뒤에, 그 사람이 송만갑에게 ‘왜, 자네가 부르는 것처럼 가르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송만갑은, ‘자들이 내가 하는 대로 가르친다고 따라부를 성싶어?’라는 말로 대답했다고 한다. 가르친다고 해도 그대로 할 수도 없으려니와, 또 시대가 달라지면 당연히 소리도 달라져야 하니, 가르친 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 바로 끊임없이 새로운 소리를 추구해 마지 않았던 송만갑의 판소리관이었던 것이다.
송만갑은 또 소리를 할 때도 듣는 사람에 따라 소리를 다르게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극창가(劇唱家)는 주단 포목상과 같아서, 비단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사실 가르칠 때도 배우는 사람에 맞게 가르치고, 부를 때도 듣는 사람에 맞게 부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판소리의 모든 것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송만갑이나 되었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송만갑은 1939년 1월 1일 아무도 없는 하숙방에서 홀로 세상을 떴다. 대명창의 마지막으로는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다. 또 송만갑은 자손이 없었는지, 송만갑의 자손 중에 소리를 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1939년 1월 1일 우리나라 판소리 왕가는 혈통이 끊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송씨 가문의 소리 전통이 끊어졌다는 것은 곧 우리 판소리의 전통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송만갑 이후 한국의 판소리는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송만갑은 장판개&#8228;박봉래&#8228;김정문&#8228;김소희 등 뛰어난 제자들을 두었다. 장판개는 후진을 양성하지 못하고, 박봉래는 일찍 죽었으나 다행히 동생인 박봉숙을 통해 대부분의 소리가 전해졌다. 김정문 또한 선생보다 일찍 죽었으나, 박녹주&#8228;박초월&#8228;강도근 같은 뛰어난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현재 판소리의 튼튼한 기둥이 되게 하였다.
1982년 4월 20일, 구례읍 냉촌리, 화엄사 가는 큰 길가에 <국창 송만갑선생 추모비>가 섰다. 국창이라는 칭호가 예술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됨됨이에서도 한 나라에서 제일 가는 사람에게 붙여지는 것이라고 할 때, 송만갑은 참으로 국창에 손색이 없는 그런 소리꾼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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