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2.9 | [문화저널]
편지
정수인․외항선원 (2004-01-29 15:22:05)
노란색 옷차림의 아가씨는 끝내 눈에 띄지 않았다. 공항 대합실에 남아있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이층 출국장에 까지 가볼 수는 없는 일, 화장실에 가서 애꿎은 손만 씻고 왔다. 더 이상 빠져 나오는 사람도 없고,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이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요?」함께 귀국한 동요 선원들과 작별인사를 끝낸 후에도 머뭇거리기만 하는 그에게 아내가 물었다. 「아, 아냐. 어머님은 어디 편찮으신가?」「어머님요? 이제야 생각나셨어요? 어머님이 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여기까지 오셔요?」아내는 눈을 세모로 모았다.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세차게 몰려왔다. 공항 밖으로 빠져나가는 차들의 불빛만 간간히 보일 뿐 들어오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비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오는 차안에서 아내는 이것저것 물었으나 그의 대답은 자연 건성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싱가폴에 입항했을 때 승선 교대하는 선원들이 가져온 편지 중에는 그네에게서 온 편지도 있었다. 「회사에 비행기 도착시간을 알아보고 공항에 가가겠어요. 아직 공항에는 가본 적이 없거든요. 노란 외투에 노란 모자, 온통 노란 색으로만 차려 입을 거니까 쉽게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진성씨가 오셔서 안아주세요.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멋있게. 아주머니께서 보신다해도 이해하시겠지요. 우리는 순수한 사이니까요.」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네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했다. 그네가 다니는 봉제 공장으로 공항에 나오지 말라고 전보를 친다해도 몇 마디의 말로 그네를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터이었다. 그렇다고 그네를 모르는 체 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 비행기 안에서까지 고심하던 그는 마침내 그네의 출현을 환영하기로 했다. 스스럼없이 멋진 포옹을 하자. 먼 친척 여동생이라면 어머니께서도 잘 모르실 테니까. 사실 단군 할아버지 자손들로서 친척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배짱을 굳히니 되려 그네와의 만남이 기다려졌다. 「심 아름」이란 아가씨는 열 달 전, 신문에 실린 그의 짤막한 글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편지를 보내온 아가씨였다. 그이 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조그마한 메리야스 공장에 다닌다고 했는데, 그네의 글에서는 생활의 어떤 어려움 같은 것은 읽을 수 없었다. 항상 밝은 햇살로 가득 차 있었고 봄비 그친 후의 그것처럼 맑은 감동으로만 와 닿았다. 아침 이슬을 먹고사는 요정인가 싶기만 한 그네의 생활 감각은 쉽게 그마저 사춘기 소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입항해서 외출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기간을 빼고는 선상 생활의 단조로움이란 정신이상이라도 일으킬만한 것이었다. 하루에 네시간씩 두 번의 당직 시간을 제외하면 오로지 먹고 잠자는 일로서 소일할 수밖에 없었다. 맨날 같은 비디오 필름만 볼 수도 없고, 도서실에 수백 권의 책이 있다 해도 두어 달 지나면서는 읽을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잠도 잊고 화투나 트럼프, 마작 등에 열중하기도 하지만, 그런 잡기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는 그로서는 남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욱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승선한지 두 달만에 날아든 「심 아름」이란 아가씨의 편지는 오랜 가뭄 끝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일기의 베껴낸 듯한 그네의 편지는 소녀 티를 막 벗는 여인의 일상과 그 풋풋한 감동이 선연하게 들여다보이고, 그 찬란한 울렁임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지난 열 달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일곱 통에 지나지 않았지만 무척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네에게 보내는 편지는 달포에 한번 꼴이었지만 어쩌면 날마다 편지를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소 잊고 살았던 밤하늘의 별들이 어린 날의 그것처럼 반짝이고, 소근대던 그들의 밀어를 그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여름날의 쓰레기장처럼 후덥지근하고 짜증만 나던 열대의 풍광들이 십 년 전 처음 상륙했을 때처럼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졌다. 사진기를 통해서 보이는 피사체인양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신선한 충동으로 다가왔다. 그네의 사진을 본 적도 없었지만 「아름」이란 여인은 조금씩 구체적인 모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오십 도에 이르는 기관실의 살인적인 열기와, 귀를 찢고 가슴뼈까지 진동시키는 소음 속에서도 그는 그네의 미소를 만들어 가질 수 있었다. 「아름」이라는 이름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내에게서 아기를 가졌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가 딸일 경우 이름을 「아름」이라 지으려 생각했다. 「한 아름!」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가끔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아내생각을 할 때마다 자기에게 넘칠 만큼 좋은 인연을 맺어준 하늘이 고마웠다. 지리산에 등산을 갔다가 피아골 약수터에서 만난 아내는, 그가 선원으로서 일년씩이나 떨어져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평은커녕 출국할 때마다 그를 격려할 만큼 심지가 깊었으며, 홀로 되신 그의 어머니도 언제나 「우리 며느리가 최고」라 여기셨다. 결혼 전 아내는 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했었다. 한 친구가 찻집에서 만난 멀끔한 사내에 한 눈에 반해서 시집을 갔는데, 그 사내가 형편없는 건달이라는 것이었다. 마누라 등에 얹혀 살면서도 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자 후리는 재주만 갈고 닦으러 다니니 앞날이라는 것도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애까지 딸린 이제 와서 갈라선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한 번은 장문의 편지를 써서 우체국에 가서 부치고 왔더니, 그 남편이라는 사람이 「말로 해도 될 것을 한 집에 살면서 무슨 놈의 편지를 다 하고 지랄이냐, 니가 시방 사람을 멀로 보느냐?」며 손찌검까지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내는 그렇게 감각이 무딘 사람하고 일생을 함께 해야하는 친구가 불쌍하기 짝이 없노라고 주석을 달았다. 아름이라는 아가씨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득 아내의 친구 이야기가 생각났을 때 그는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다. 여지껏 아내와는 편지를 주고받은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그 건달 친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은 곧 어쩔 수 없는 일로 되었다. 아내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던 것은 입항할 때마다 쉽게 할 수 있는 전화 탓만도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이 러브 유.」따위를 지껄여야 하는 메마른 인종들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보고픈 당신」 어쩌고 하는 것은 자칫 애정마저 가식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인사를 받으신 뒤, 손주딸이 제 어미를 닮아서 이쁘고 너무 순해서 좀체 보채지도 않는다며 아이를 보라 하셨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조그마한 손을 꼭 쥔 채. 그는 갑자기 가슴 한 쪽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 순간 아이는 아내가 낳은 것이 아니라 도려낸 그의 가슴살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통통한 볼, 조그마한 코, 조갑지 같은 손, 그리고 그 맑은 손톱까지……! 어머니께서는 아직 아기의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아기의 이름을 생각해 두지 않았느냐고 하셨지만 그는 「아름」이란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자신이 일년 가깝게 편지를 쓰며 생각해 오던 이름이 문득 더럽혀졌음인가? 아기에겐 아직 아무도 지어 부르지 않은 맑고 더 좋은 이름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저녁상을 내가던 아내가 당신에게 온 편지가 있다며 「심 아름」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네한테서 편지가? 문갑 위에 놓인 편지를 뜯었다. 「공항에 꼭 나가고 싶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 집에 있어야한대요. 다른 아기들처럼 아빠와 함께 살고 싶어요.」 주방으로 따라 들어간 그가 설거지하는 아내를 뒤에서 껴안았을 때, 아내는 동화책이라도 읽는 듯 말했다. 「오랜만에 집에 오셨으면 먹고사는 이야기나 하세요.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요, 채소도 너무 비싸서 김장할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