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2.9 | [문화저널]
그대는, 멋있는 진짜 노동자 후레어 훼숀 김성자 노조위원장
윤희숙․문화저널 기자 (2004-01-29 15:27:33)
뒤로 가는 고향 하늘 보며 두근거려 서울 온지 5년 그까짓 돈 몇푼 쥐고 싶어서 이리저리 공장을 떠나녔지 그러나 수지 않고 벌어야 할 순이는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것이 곧 졸업이지요 열다섯 교복을 벗어던지고 병든 부모 어린 동생 떠나며 학비 벌어 공부하고 싶어서 학교 가고 싶어 울기도 했지 (<귀레이야기>노랫말) 이리 후레어 훼숀 노조위원장 김성자씨(30). 공장 노동자로 잔뼈가 굵은 그도 위 노랫말에 나오는 순이나 대부분 노동자들의 경우처럼 몹시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가슴 서레는 교복과 가방을 뒤로한 채 미싱을 밟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살의절반을 공장에서 보냈다 “살아온 얘기 좀 해주세요”라는 물음에 “제 살아온 이야기요? 글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한참동안 허공에 눈을 두고, 지난 세월로 기억을 더듬어 달려가던 김성자씨는 다부진 표정으로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익산군 낭산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철이 들기도 전인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품팔러 나가는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 일을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교를 빼먹는 날이 많아지고 그 흔한 개근상이 그에게는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따기 힘든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공부조차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틈틈이 공부를 하여 시험에서는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열의를 바쳐 공부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 아버지의 진학 권유에도 불구하고 13,900원의 월사금과 꽤 많이 든다는 실습비가 그의 학업 포기를 결정하게 만들었다. 15년 전의 월사금을 지금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일이 얼마나 그에게 큰 상처를 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취업을 결정한 김성자씨는, 서울에서 공장생활을 하는 동네 언니를 통해 서울 미아리에 있는 봉제 공장에서 노동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아무런 기술도 없는 열네살 노동자의 손에 쥐어진 한 달 월급은 31,000원이었다. 그 무렵 그는 미싱기술을 배우고, 동생들의 학업을 뒷바라지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지 공장 생활 일년 반만에 첫 번째 꿈을 이루었다. 평화시장에서 일년동안 시다 생활을 한 끝에 드디어 인정받는 기술자가 되었고 좋은 조건으로 일을 하여 적금도 붓고 집에 돈을 부쳐줄 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그때부터 이삼년은 정신 없이 일에만 매달렸고, 그런 그에게 ‘억순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는 정말 일하는 것에 신명을 느꼈어요. 노동이 소중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깨달은 때도 그때였어요.” 김성자씨가 노동자로서 당당하고 자신있는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힘은 그때의 소중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평화시장에서의 생활을 통해 당시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나어린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면서 안타까움을 갖고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삶보다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이웃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때도 그 무렵이다. 22살이 되던 해 김성자씨는 서울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고향으로 돌아와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고 일자리를 찾던 중, 이리공단 내에 있는 후레어 훼숀의 푯말이 예뻐서 그냥 그 날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독일인 사장의 투자고 설립된 후레어 훼숀은 고급 의류를 생산하여 수출하는 기업으로 김성자씨가 그동안 서울에서 다녔던 하꼬방 같은 봉제 공장들과는 달랐다. 기계시설이나 작업환경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았다.(지금도 여름철 무더위를 빼고는 어느 공장보다 작업환경이 좋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 당시 아무나 쉽게 입사할 수 없었던(적어성검사, 아이큐검사 등 까다로웠음) 후레어 훼숀에 다니는 일이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입사한지 2년이 지난 후인84년 후레어 훼숀에 외자기업으로써는 드물게 관리자와 생산직 사원이 모두 가입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조 집행부는 87년 4월 임금협상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이의를 제기한 12명의 동료들을 노조위원장이 참여한 상벌위원회에서 해고시켜 버렸다. 이로써 당시 집행부는 동료들의 원성을 사게 되고 어용노조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했고, 노조활동에 소극적이던 김성자씨에게 노동자의 해고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김성자씨를 노동운동가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가슴 속 깊이 새겨져, 노조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히는 해고 노동자 복직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700여명의 사원 중에서 12명의 해고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여 투쟁에 동참한 수는 50여 명에 불과했다. 거대한 공권력과 강경한 사업주의 태도로 볼 때 해고자를 복직시키는 이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농성자들에게 투철한 의식이나, 결과를 점쳐보는 전망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노동자의 밥줄을 끊는 일에 승복할 수 없었고,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출발하였기에 싸움만은 악착같이 해냈다. 회사 내외의 건장한 남자들로 구성된 구사대와 기업의 든든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경찰들과 맞서 싸우는 일은 정말 바위에 계란 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수적으로 열세인 그들은 마침내 사용자 쪽의 감시가 느슨했던 점심시간을 틈타 모든 생산과정과 공정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4층 공정개발부를 단숨에 점거했다. 공장의 모든 작업이 멈췄다. 사용자 쪽에서는 전기와 물의 공급을 끊어 버렸고, 농성자들은 먹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마저 갈 수 없어 그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신나통을 안고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노동자들의 굳센 의지는 예상대로 값비싼 기계들의 보존을 위해서도 독일 사용자 쪽(에프, 아들러)에서 협상을 제의해 왔다. 많은 어려움 속의 일주일간 목숨을 건 싸움으로 해고자 복직 싸움에서도 승리를 하게 되었다. 이 일루 후레어 훼숀 노동조합은 지역 내에서 탄탄히 자리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노조들에게 해고자 복직이라는 모범적인 선례를 남겨 꽤 유명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조활동에 전념하게 된 김성자씨는 3대 집행부에서 사무장을 하고 90년 10월 제4대 노조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난 내가 비참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난 다만 조건이 여의치 않아 문화적 혜택을 못 받았을 뿐이고 나도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잘 할 자신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은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올해로 나이가 삼십.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절반을 공장생활을 해 온 그녀는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도 않고, 자시니 노동자라는 사실을 남에게 감추고 싶은 맘도 전혀 없다. “공장생활은 결코 나쁜 것도 천대받을 일도 아닙니다. 누구든 어떤 조건이든 자기 삶에 대해서는 당당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힘으로 무든 일이든 해낼 수가 있어요” 공장을 자꾸 회사라고 바꾸어 말하는 어린 후배 노동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들이 주인의식을 갖지 않는 한 민주화된 세상에서의 노동해방도 요원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장이 구조적인 문제를 많이 안고 있기는 하지만 공장은 일을 할 수 있는 즐거운 곳이고, 그 안에서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며 지겨워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조합원들을 만나 얘기하는 시간이 따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작업장을 돌며 일하고 있는 조합원들과 만난다. 그들을 만나면 노조활동에 관한 얘기에 앞서 그들의 건강이나 개인적인 문제를 묻곤 한다.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식당에서 김성자씨와 그들의 동료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한 끼당 식비가 550원이라는 그들의 밥은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선진조국의 식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정부미로 지은 까칠한 밥과 거의 김치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푸성귀 반찬을 먹으면서, 노조에서 파는 양말이 싸고 좋다느니, 지난번에 산 멸치가 별로 시원찮았다느니 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짭쪼름한 삶을 반찬 삼아 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워냈다. 식사 후에는 김성자씨와 작업현장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생산해내는 제품과 기계에 대한 설명을 해가면서도 중간 중간 노동자들과 대화하는 그의 모습에서 언니의 모습과 동생의 모습, 선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노조 위원장이 된 이후로 개인생활을 묻어 버릴 만큼 동료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쉬는 명절 같이 여러 날 쉬는 때면 어김없이 그들이 보고 싶어진다고 한다. 온갖 특혜를 누리며 부를 축적해 온 외국자본 기업들이 무책임하게 철수해버리는 일들이 빈번해지면서 남아 있는 외자기업들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때문에 공장에서 낡은 기계가 하나 빠져나가는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김성자씨가 입사할 당시 1700여명이던 사원이 지금은 500여명으로 줄은 후레어 훼숀도 이러한 외자기업들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외자기업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보았다. “외자기업은 근본적으로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철수해야 된다는 얘기를 아닙니다. 독자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만 존재하게 해야 합니다.” 외자기업들이 지금가지 값싸고 풍부한 한국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값비싼 이익을 챙겨 갔으니 우리도 힘을 갖출 때까지는 우리 역시 그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노사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정부가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이 어떤 식으로 정부나 정책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정치의식이 높아진다고 한다. 여기 사업장의 경우 조합활동에 있어 남녀구성을 보면 여성이 압도적으로 강세를 보인다. 후레어 훼숀도 예외는 아니어서 320명의 조합원들 가운데 나자는 모두 28명이었다. 노조활동에서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부 남성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김성자씨의 시각은 특이했다. “남성 노동자의 대부분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입니다. 예전에 아저씨들의 행동이 야속하고 미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저씨들의 처지를 이해합니다. 아저씨들의 생활 조건 등의 처지를 인정하고, 아저씨들의 현실과 맞는 일을 함께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저씨들 역시 딸린 가족이 없고 거칠게 없다면 누구 못지 않게 앞장섰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조건이 허락되지 않아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 환경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여자라고 해서 반드시 강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혼기를 약간 넘긴 노처녀(?)인 그녀에게 독신주의 선언이 나오리라고 짐작하면서 조심스레 결혼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기대했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동안 너무 바빴기 때문에 결혼을 생각할 틈이 없었을 뿐이고, 여성은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결혼 전이나 결혼 후의 활동이 한결같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있고 자신은 결혼 후에도 남편과 함께 할 거라고 말했다. 여물고 강해 보이는 김성자씨도 몇 번이고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무엇보다 힘이 드는 건 일에 대한 견해차이에서 오는 조합원들 사이의 불신감이었다. 억센 구사대나 정부의 공권력은 오히려 김성자씨를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동료들한테서 받는 상처는 실망과 커다란 패배의식만을 안겨 준다. 이런 일을 극복해내는데 종교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기지 않은 예수를 존경한다는 그녀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 어려움을 통해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함을 키워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87년도 해고자 현장동료들과 함께 치열하게 싸웠고 지금은 노조위원장이기도 한 김성자씨가 올해 들어서야 굳센 의지로써 본격적으로 노조일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고백(?)은 투사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나에게는 의외의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곱씹어 생각해보니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올해 9월로 2년의 임기가 끝나는 그녀에게 아쉬움은 많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임 기간 동안 임금협상에 매달리느라 일상활동도 못했고 많은 조합원과 함께 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한다. 일보다 중요한게 사람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요즘 침체되어 있는 노동운동계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각은 다분히 희망적이었다. “파업을 하지 않고 화염병을 들지 않았다고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이 침체된 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지금의 시기를 힘을 기르고 조직을 정비하는 시간으로 봅니다. 사실 지금 수준의 단결력으로는 막강한 정부와 맞서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패배의식이 주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경험한 김성자씨는 겉으로 드러나는 싸움은 없지만 총액임금제에 관한 논의들을 통해 노동자들의 의식이 얼마나 커나가는지를 직접 느낄 수가 있었다는 예를 들어가며 자신의 전망을 확신시켜 주었다. “예전엔 노동자들은 정치 얘기를 하면 색안경을 쓰고 보았는데, 92년의 노동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자와 정치를 따로 보지 않고 근본적으로 나라의 정치가 잘 돼야 노동자들의 살림도 살찔 수 있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 직접 느끼고 있어요. 이것이 발전 아닌가요?” 일반 노동자들의 시각변화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의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거의 한나절 동안 취재를 하면서 나는 투철하고 당당한 노동자 김성자씨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그리고 끝에 가서 나는 목젓을 적시며 그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고백했다. 끝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묻자, 「문화저널」에 후레어 훼숀 사원모집 광고를 낼 수 없느냐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사원의 숫자가 이들을 불안하게 한다. 공장이 잘돼야 노동자가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그들은 임금은 적지만 현장분위기만큼은 최고라고 말하며, 후레어 훼숀에 대한 자료를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후레어 훼숀 노동조합사무실 연락처는 (0653)50-2299, 총무부는 50-2301~3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