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2.9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재미있는 영화와 감동적인 영화 「연인」과 「인도차이나」
조명원․편집위원 (2004-01-29 15:28:25)
재미있는 영화가 있고, 감동적인 영화가 있다. 둘 다면 더 바랄게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둘 다 아닌 경우도 있다. 재미는 무엇이고, 감동은 무엇인가? 이 둘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인가? 방학을 맞아 모처럼 누린 호사(평상시에는 영화관에 갈 엄두를 좀처럼 낼 수 없는 처지이므로)의 뒷맛은 의외로 착잡했다. 「연인」 한 편만 보았을 때보다 한 주일 후에 「인도차이나」를 마저 보았을 때 그 뒷맛은 좀더 강해졌고, 그 것의 실체가 비로소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똑같이 불란서 영화(그 이름만으로도 벌써 웬만큼은 예술성을 인정하는 통설에 입각해서)이면서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의문에서 시작하여 그 둘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가 고심하다가 답은 오히려 가까운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연인」이 재미는 있으되 감동 없는 영화인데 비해 「인도차이나」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다. 우리는 그런 것을 ‘좋은’영화라고 부른다. 흔히 종합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영화에 대한 전문지식이 거의 없는 탓에 예술성 운운하는 일은 처음부터 버거운 일이고, 다만 눈과 귀로 읽는 내용과 그 내용을 담아내는 최소한의 형식에 주목하는 관람객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굳이 내용 형식을 들먹이며 무겁게 이끌어 가지 않을 수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앞서 이미 판정을 내려 한 편의 손을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패자의 항변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후환(?)이 두려워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연인」이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영화’라고 한마디로 몰아붙이기엔 만만치 않은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랑스 누보로망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마르그리뜨 뒤라스 원작이라는 짱짱한 배경을 갖고 있다. 알려진 대로 발자크류의 19세기 전통 사실주의를 배격하면서 등장한 누보로망은 실험적 형식을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지닌다. 그것의 극단은 곧 내용 없음이다. 남녀 주인공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이미 고전이 되다시피 한 누보로망의 특징적 형식이거니와, 여주인공의 일탈행동(중국인 대부호와 벌이는 사랑 없는 애정행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열쇠가 될 배경으로서의 가족사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생략되어 제시되는 것 등이 영화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 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만드는 주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는 비교적 깔끔하게 만들어진 느낌인데, 아마 자칫 포르노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의 영상처리 기술 때문이 아닌가 싶다(여기에는 친절하게도 가위질을 해주신 높은 분들의 공로도 있겠지만). 아무튼 내용 없는 이야기에 군더더기 없는 처리가 최대한의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도 있다. 「인도차이나」는 말 그대로 사실주의 영화다. 1930년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전신 인도차이나를 배경으로 역사 속에 살아있는 주인공의 사랑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시대배경이 같다는 이유에서 두 영화는 쉽게 비교의 대상이 된다. 그 때 이 둘을 가르는 가장 뚜렷한 빗금은 역사성의 있고 없음이다. 앞의 「연인」이 베트남에서 태어나 자란 프랑스 소녀와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중국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함으로써(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침략자이거나 기껏해야 이방인일 뿐이다) 식민지 베트남의 현실에 철저히 눈감고 있는데 반해, 「인도차이나」는 역시 베트남에서 태어나 거대한 고무공장의 주인이 되어있는 프랑스 여자와 프랑스에서 파견된 젊은 해군 장교, 그리고 베트남의 마지막 황녀를 내세움으로써 제국주의와 식민지 사이의 처절한 싸움으로부터 회피할 수 없는 장치를 해놓고 있다. 이들이 겪어야 하는 사랑의 드라마는 곧 베트남 독립의 역사인 것이다. 이 사랑은 「연인」에서의 연인들이 누리는 극히 개인적이고 쾌락적인 사랑의 파행성과 비교할 때 더욱 절절한 여운을 남기는데, 단지 비극적 결말 탓만은 아니다. 「연인」의 사랑이야말로 비극적인 것일 수 있으나-특히 남자 주인공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그 사랑의 상처가 두 사람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인도차이나」의 사랑은 그 감동의 무게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감동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모태를 망각하지 않고 끝내 베트남의 딸로 남는 까미유의 눈뜸에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무작정 떠난 길에서 만나게 되는 박해받는 민중의 모습은 프랑스인 양어머니의 보호를 받아온 그녀에게 조국을 일깨워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택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거기에 프랑스 군인을 살해한 까미유의 편에 서면서 범법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는 쟝 밥띠스트의 진실한 사랑의 발견-엘리안느와의 사랑이 단순한 애욕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반증하면서-은 제국주의 군인의 입장에서 식민지 독립의 정당성을 인식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그러나 결국 그가 프랑스 정부와 베트남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처리한 것은 이 영화의 한계로 남는다. 주인의 시각으로 본 노예의 해방은 쟁취가 아니고 시혜로 그려지기 쉬운 것이다. 자기비판과 철저한 반성 없는 역사의식은 반쪽으로 남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 우려는 까미유와 쟝 밥띠스트 사에에서 태어나 엘리안느에 의해 길러진 아이가 베트남 독리의 공식적인 절차를 위해 프랑스에 온 어머니를 만나려고 기다리다 포기하고 돌아서며 “할머니가 나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그것은 역사의 승리에 도취해 있다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듯 화들짝 놀라며 ‘아, 이것은 프랑스 영화지!’하고 깨어나게 만드는 씁쓸한 사족이다. 여기서 「연인」이 만만치 않은 이유를 좀더 들어보자. 앞에서 ‘재미있는 영화’라고 한 바 있지만, 여기에서의 재미는 흔히 말하는 오락성과는 거리가 멀다. 재미있기로 치면야 향수의 「007」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고, 또 80년대 이후 스필버그가 만들어내는 어린이용 오락물들은 얼마나 탁월한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연인」을 재미있는 영화로 평가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설픈 스토리를 억지로 짜맞추면서 농도 짙은 정사 장면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키는 상업주의 영화와는 분명히 다른 데가 있다. 우선 지극히 사소한 내용을 다루는 진지한 접근방식이 돋보인다. 그건 인물의 심리를 직접 묘사하지 않고 주변의 사물이나 상황으로 대신 나타내는 (누보로망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뒤라스의 뛰어난 글쓰기에 힘입은 듯 하다. 빈민가의 어둑한 골목에 자리한 밀실에서 행해지는 사랑의 행위는 외설스럽다거나 퇴폐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왠지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암울한 가정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사춘기 소녀의 실존 찾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더욱이 전형적 인물의 형상화를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시공을 흐트려 놓는 이야기 전개로 독자에게 그것이 허구의 세계임을 끊임없이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 누보로망이 표방하는 새로운 소설관 임을 감안하면 영화는 오히려 그런 반사실주의의 문제점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 원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영화일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러한 반사실주의적 세계관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냐 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술의 탈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유리된 실존의 탐구는 진정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인간을 억압하는 데 기여해 왔다는 이유를 들어 모든 이데올로기를 벗어 던지는 일은 이미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묵인하고 나아가서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제국주의의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는데 제3세계의 힘없는 민중들이 탈 이데올로기를, 또는 더 나아가서 탈 중심, 탈 이성을 선언하기만 하면 인간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전혀 다른 세계관을 지닌 두 편의 프랑스 영화가 우리에게 남겨주는 물음은 재미냐 감동이냐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되, 재미도 재미 나름이고 감동 또한 진짜와 가짜가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