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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연재 [문화저널]
독자기고/「여름문화마당」에 다녀와서
김장근(2004-01-29 15:28:27)



회문산의 늠름한 이마를 온몸으로 끌어 안으며 흘러가는 섬진강이 아직도 귓가를 적시며 물결쳐 온다. 섬진강변에서 보낸 3박4일은 나에게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한 고민을 하게 했다. 벌써 3년째 황토현문화 연구회에서 여는 여름문화마당을 쫓아다니고 있는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제 대학의 햇병아리가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황토현에서 가졌던 4회 여름문화마당과 작년 지리산 달궁에서 있었던 5회 여름 문화마당을 거치면서 나는 참 많은 것들을 세삼스레 느끼고 생각했었다. 이번에는 특히 대학초년생으로서의 여러 상황들과 얽혀져 섬진강은 더욱 뜻깊은 것들을 내 가슴에 심어놓은 것 같다.
8월 1일 오전, 우리는 낯익은 얼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처음 보는 얼굴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섬진강과 만난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었다.
약 100명 가량이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섬진강으로 떠났다. 아무도 별말이 없이 창밖의 쓰러지는 풍경을 보고 있거나 이번 행사의 제목인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느라 눈빛을 반짝였다.
회문산이 굽어보는 섬진강 중류 임실군 천담분교에 도착하자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의연한 섬진강의 물줄기는 끊임없이 바다를 향해 줄달음질치고 드디어 김용택시인의 열림 강연을 시작으로 제6회 여름문화마당‘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의 막은 올랐다.
김용택시인은 실제로 섬진강 연작을 써서 많은 호평을 받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퍽이나 의미 있는 것이었다.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들이 흥얼거리는 노래, 혹은 쉼없는 이야기들이 바로 이 땅의 참문학이 아니겠느냐고 김용택시인은 말했다. 이 땅의 민중 정서를 올바로 담아낼 수 있는 문학이 참 문학이라는 말은 참문화가 참 세상을 만든다는 황문연의 기치와 상통하는 것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들은 열림 강연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후에 어느새 익숙해진 조원들과 함께 모여 열림고사를 지냈다. 전북대 문화패 들불의 길놀이로 시작된 열림고사는 그리 성대하지는 않았지만 삼박사일 참가자 모두 무사히 보내게 해달라는 진심의 기원이 깃들어 있었다.
열림고사가 끝나고 전북 강진을 전남강진으로 잘못 알아 밤늦게 도착한 ‘완전한 만남’의 작가 김하기씨와의 대화시간을 가졌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시대 새로운 삶의 모습을 발견하고 또한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자리였다.
다음은 온다라미술관장의 설명으로 ‘우리시대 새로운 미술’이라는 제목의 슬라이드 상영이 있었다. 약150여장의 슬라이드에서 우리는 민족민중미술의 탄생과 발전을 볼 수 있었고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바로 세운 미술의 사회적 역할과 미술의 대중화 운동, 그리고 리어리즘미술과 민족적형식의 제기 등을 살핌으로써 우리 시대 새로운 문화운동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밤이 무척 깊었는데도 모두들 잠도 잊은 채 또렷또렷한 눈빛으로 자리를 뜰 줄 몰랐다.
둘째날은 임실군농민회 강완묵씨의 ‘농촌, 농업, 농민문제’라는 주제의 강연을 들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찻길로 통하는 낮은 다리가 물에 잠겼는데도 그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가에서 농촌 현실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저녁때 쯤 민미련 공동의잔 송만규시의 지도로 자주미술 ‘그림으로 그리는 현대사’라는 제목으로 공동그림을 그렸다. 참가자들은 각 시대별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고 물감과 크레파스로 종이를 붙인 커다란 베니어판을 꼼꼼히 채워갔다. 모두들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진지한 표정으로 땀을 흘렸다.
이 날밤, 박태순씨의 강연도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 내용을 다 기억해 여기 적을 수는 없지만 번뜩 떠오르는 말이 있다. 역사가 아무리 뒷걸음질친다 해도 문화마저 퇴조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번 행사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잘 치뤄지고 있는 걸 보면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날은 또 밤늦게까지 문학, 역사, 농민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주제토론이 이루어졌다. 모두들 지칠 줄 몰랐다.
여름문화마당 사흘째 되는 날에는 대전대 장원교수의 환경에 관한 강연이 있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핵심의 이야기였는데 모든 환경문제가 인간이 욕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세제 대신 밀가루로 설거지를 하는 것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쓰고 싶은 글쓰기 시간이었다 우리는 주변의 경치를 둘러보기도 하면서 각자 맘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원고지에 풀어내고 있었다.
다음에 우리는 행사 이튿날 듣기로 했던 순창군 유등면 들노래를 듣게 되었다. 20여명의 노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것이 이땅을 사는 민중들의 건강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심심한데 노래 한자리 불러보세’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농민들의 노동의 과정고 그들의 의식들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김용택시인이 말한 참문학이란 이런 것인 듯 싶었다.
들노래가 끝나가 무당 정강우씨가 이끄는 당산제에 모두 참여했다. 우리 모두의 안녕과 이 나라의 축복을 비는 자리였다.
저녁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노래패 ‘하나된 노래’와 가수 안치환씨의 공연이 있었다.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는 흥분되어 있었고 안치환씨의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라는 노래를 마치자 이 행사는 마침내 절정을 이루었다. 이제 모두 함께 어울려 대동놀이를 하고 밤이 다 가는 줄도 모르고 그 동안 정들었던 사람들과 끝없는 얘기를 나누었다.
마지막날 우리는 부시시한 눈으로 아침을 먹고 백일장 시상과 김형수 시인의 문학강연을 들었다. 조금은 지친 모습이었지만 흡족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날씨 때문에 회문산등반을 못하게 되었지만 정성 들여 싼 김밥을 들고 아쉬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섬진강가 노란 달맞이 꽃들이 물기를 머금은 채 그리운 작별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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