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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문화현장 [문화가 정보]
「동학농민전쟁」취재기/ 반란이 아닌 정의의 역사
김병헌(2004-01-29 15:29:27)

「동학농민전쟁」취재기/ 반란이 아닌 정의의 역사
김병헌

관점의 변화
1894년 2월 저라도 고부 땅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기점으로 전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던 동학농민전쟁은 이제 동학난이라고 하는 반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민중의 깨어있는 역사 의식의 당연한 귀결로써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역사의 주체가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자, 다시 말해서 민중이 라고 보는 시각이 전문가들 사이에 팽배해져 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학농민전쟁을 이제 더 이상난리나 폭동으로 매도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동학농민전쟁은 19세기말 한국 근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첫째는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는 시점에서 가장 큰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탐관오리의 뿌리깊은 부패와 탐학은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말기적 현상으로서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갈망하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고 당시 민중이었던 농민층이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새로운 사회로 문을 열어 가고자 했던 것이 바로 동학 농민 전쟁이다.
둘째, 한국 최초의 근대 민족운동이라고 하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격동하는 19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 정세 속에서 조용한 은둔의 나라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위기의식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1876년 강화도 조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지만 이것은 불평등 조약으로써 훗날 일본에게 침략이 발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고 만다. 결국 고부농민봉기가 3월 봉기로 확산되면서 전주성이 함락되고 관군이 농민군에 의해 격파되자 일본군은 청․일 전쟁을 통해 조선에서 청나라를 축출하고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섬으로써 봉건사회를 타파하려고 했던 농민군은 일본의 내정간섭에 분개, 그 기치를 반외세로 돌리게 된다. 그러나 우수한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살육전으로 농민군은 무참히 쓰러뜨렸고 동학농민전쟁의 막을 내리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만다. 동학의 신통력을 신봉하면서 끝까지 항전했던 농민군의 정신은 그 후 8․15해방 전까지 민족정신을 형성하는 원류가 됐음을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의의 등으로 인해서 동학농민전쟁은 당연히 정의의 역사로서 재평가되야만 하고 1세기를 맞는 특별한 시점에서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농민군이 발자취를 따라
전북지역이 동학농민전쟁의 발원지요, 주요무대였기 때문에 오늘날 전북 인들은 자랑스런 역사의 후예들로서 긍지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없고 극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총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치열한 역사의식을 갖고 살아갔던 조상들의 구체적인 형상을 보여줘야 할 지역언론에서 조차 황토현 전적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취재의 한계성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실태에서는 우리 고장의 역사를 남에게 알리기가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3년 앞두고 본고장인 전북지역부터 역사의 실체를 올바로 인식함으로써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고, 당시의 주도세력이었던 전북인의 깨어있는 역사의식을 통해서 보수성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전북 인이 의식구조에 일대 전환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목적 아래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
지난해 말 기획단계를 거쳐 올해 초 두 달간에 걸친 자료조사와 3월부터 5월 말까지의 전국취재를 통해서 2부작으로 방송된 「동학농민전쟁」은 그 날의 농민함성을 생생하게 전달하기에는 미흡할 수밖에 없었음을 먼저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치열했던 전적지를 따라 여수, 광양, 하동, 진주, 장성, 공주, 홍성, 철원, 강릉, 홍천 등지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그 날의 상황을 기록한 비석 몇 개와 전래해 오는 불확실한 소문뿐이었다. 동학농민전쟁이 반제국주의 기치를 든데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한반도 장악이 가속화됨으로써 일본이 동학당 말살정책을 폈고 그 결과 관련 유품이나 농민군의 후예를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프로그램의 사실성을 크게 부각시키지 못한 원인이다. TV프로그램의 기본인 영상자료를 확보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의 장애가 됐던 것이 황토현 기념관이다. 관군과의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황토현 기념관은 동학농민전쟁의 성지로서 수많은 방문객이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고증도 거치지 않은 유품들이 나열식으로 전시되고 있고 자연경관도 미흡해서 성지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세워진 황토현 기념관이 이 모양이라면 전적지에 안내판 하나 없는 타지역의 실태는 탓할 바도 못된다. 동학농민전쟁의 구심적인 황토현 기념관부터 성지답게 가꿔놓고 자긍심을 일깨워 나갈 때 산 교육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인식도 아직은 뿌리깊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젊은 세대에서는 유적지의 답사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거나 인식의 변화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노년층의 경우에는 일본의 동학당 말살정책의 후유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농민군은 여전히 폭도나 반란군으로 인식되고 있고 당시 희생당한 관군의 후손은 농민군을 가해자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많다. 또한 무심결에 동학난이라고 표현하는 현상도 식자층에서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희생당한 농민군의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농민군 측의 기록이 전무하고 있고 다만 관변측 자료로 추측해 본다면 대략 30만에서 50만 정도라고 한다. 원평, 천원, 공주, 홍천, 등의 전적지에서는 한꺼번에 수백명이 희생당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은 조상이 묘도 없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아직까지 자기의 조상이 동학군이었다고 내세우는 것은 꺼려하고 있어서 동학농민전쟁이 뿌린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하겠다. 봉건사회와 유교문화의 풍토 위에서 왜곡된 역사관을 민주사회로 진전해야 한다는 당위성 하에서 이제 바로 잡아야 한다.
동학농민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군에 의해 섬진강에 수장된 오천여 농민군이 비참한 최후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희생을 강요했던 일본은 지금도 우리에게 경계의 대상으로 남아있고 그들의 후손에게 이러한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적인 배타성을 극복하고-연구성과를 종합정리 할때.
역사가들 사이에서 동학농민전쟁이 근대 최초의 민족민중운동이었다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가 그 골을 따라 언제나 의연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가 그 시대에 올바로 정립되지 못하고 한 시대가 지나간 위에 오류가 시정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학난이라는 것도 결국 일시적인 단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동학농민전쟁의 재평가 작업도 역사의 한 과정이라고 볼 때 100주년을 맞으면서 완벽하게 체계화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은 목표에 상당수준 미달해 있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취재하면서 만난 전문가들의 경우 그들 나름대로 자료를 찾거나 기존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분야와는 달리 1960년대 이후에야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이 연구의 지체를 가져왔기 때문에 아직은 미개척분야인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100년 동안 방치해 놓은 전적지가 어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산하에 불과하고 고증을 제대로 해주는 농민군의 2세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래서 미흡하나마 자료로 선택하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기에 기술된 서적이거나 관변측 기록이다. 불확실한 자료를 기초로 그 일의 상황을 추측해보는 식의 연구는 현실적으로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만 일으키는 문제점도 야기하고 있어서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또한 일부 학자들이 연구결과를 놓고 볼 때 이미 발표됐거나 학계의 추세에 순응함으로써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진실이 다양한 각도에서 검증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전문가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라고 본다. 예를 든다면 축소됐거나 과장된 고증이 많고 사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 상태에서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채 어느 한쪽에만 유리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 등이 파급됨으로써 선입견을 낳고 다양한 논리의 전개를 가로막는 것이다. 무조건 수백명이 죽었다라고 한다든지 관군은 지하하고 농민군은 잘했다고만 하는 이분화된 역사기술은 결코 과학적인 접근방식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을 보는 시각이 전국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개선돼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역적인 우월감이나 배타성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한계성을 노출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전국적인 현상 속에서 지역적인 특성을 검토하고 지역 간에 상호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1894년의 농민항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도 통일성을 지향하는 측면에서 숙고돼야 한다.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혁명 등의 10여가지 이상이 혼용되고 있는 실정에서 용어통일에 대한 전망은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근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차이에서 용어의 통일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일단 다른 학자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아집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용어통일을 위한 노력도 엿보이긴 하지만 결론 없이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하고 마는 것을 보면 용어통일이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마저 드는 것이다.

이 시대에 대입해보는 동학농민전쟁

전북의 경제는 전국의 2%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전북은 어느 지역보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현물세를 가장 많이 내는 지역이었다. 오늘날 경제의 낙후가 심화된 것은 지역차별의 뿌리깊은 폐단이 큰 원인이고 이를 스스로 극복해내지 못한 전북인에게도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 오늘날 전북인의 의식구조에 내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보수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낙후의 원인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역사를 통해서 전북인이 어떤 의식구조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전북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풍류가 발달한 반면 예로부터 차별과 소외를 받아왔기 때문에 때로는 끈질기게 저항하는 기질이 발휘되기도 했다. 그 저항의 기질이 1894년 분출한 것이다. 이제 자연과 역사의 토양 위에서 생성, 소멸한 보수와 저항의 기질이 조화를 이뤄서 새로운 사회로 문을 열어 가야할 것이다.
제1부 “가보세 가보세” 제2부 “역사는 살아있다”로 방영된 다큐멘타리 동학농민전쟁은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을 위한 시작의 몸짓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송을 보고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느꼈던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동학농민전쟁의 본고장답게 역사를 재조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오늘의 현실을 개선해 나가고 이 나라의 역사도 진보할 수 있는 전환점이 1세기를 맞는 1994년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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