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9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신세대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낸
튼실한 기획의 ‘신세대 영화’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1-29 15:31:36)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객석을 꽉 메우고도 넘친 입석 관객들과 함께 우리 영화를 본 것이. 여름방학이 시작된 첫 일요일. 비록 340석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극장이었지만 정예관객 아닌 ‘인파’와 우리 영화를 본 것은 작년 이맘때 「장군의 아들2」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서두부터 애써 흥분을 감추려 하지 않은 것은, 이를테면 기쁘고 대견해서이다 .무더운 여름날 대낮(3회)이라 다소 소란스럽고 짜증났지만 매스컴이 전한 서울극장가 소식에 이어 지방에서도 「결혼이야기」는 장사진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여름 극장가에 상영되고 있는 우리 영화 「하얀 전쟁」, 「장군의 아들3」들도 매우 호조를 보인다는 것이다. 작품성은 우선 접어두고 우리 영화가 침체의 긴 터널에서 마침내 벗어나는가 싶어 반갑고 대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서울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하얀 전쟁」, 「장군의 아들3」이 아직도 상영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직배외화에 밀려 개봉관을 잡지 못한 것이다. 노상 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우리 영화의 상영이 외화보다 어려운 현실은 문화사대주의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다.
「결혼이야기」는 영화아카데미 1기 출신인 김의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줄거리랄 것도 없지만 굳이 간추려 보면 김태규(최민수)와 최지혜(심혜진)가 결혼하여 벌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도식해보면 결혼→갈등→별거(이혼)→재결합의 서사구조이다. 그것만으로 얼핏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충분히 현실적인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혹 젊은 세대 일각에서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다하더라도 보편성은 얻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갓 결혼한 맞벌이부부의 섦의 방식부터가 그렇다. 필자 역시 기성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신세대라고 할 수도 없는 아내로부터 집안 일 4가지 중 택일할 것을 강요받지만, 단연코 어림없는 소리이다. 봉건적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물각유주(物各有主)를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주는 음양의 조화로 인해 비교적 질서 있게 존재하고 지구 역시 그걸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돌아가고 있다. 요컨대 남자와 여자의 할 일이 각각 정해져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남자더러 설거지를 하라면 여자가 아파트 벽에 망치질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과거에 비해 여자의 할 일이 조금 다양하고 많아졌을 뿐이다. 영화의 핀트가 잘못되어 있는 그런 풍조를 곱게 ‘모시려는데’ 있어 보이기 때문, 이를테면 흥분한 것에 불과하다.
남녀평등 이상의 여권을 주장하는 관객이라면 「결혼이야기」의 서사구조는 느긋한 대리만족과 함께 우월감을 전이시켜주는 효과마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러나 상대적으로 ‘희망사항’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혼이야기」는 이를테면 현실욕구의 상승을 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할만한 요소를 갖춘 영화인 셈이다.
「결혼이야기」가 충분히 현실적이지 못한 것은 많은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섹스묘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섹스가 사랑의 주요한 원천일 수 있음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처럼 일상현실의 신혼부부들-특히 여자쪽의 반응은 그렇지 않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여자의 말초신경은 일정한 성적 속도를 지니고 있다고 듣는다. 쉽게 말하면 25~6세 정도의 갓 결혼한 여자가 섹스의 신비하고 오묘한(영화에서처럼) 경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혹 화류계 종사자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충분한 경력(?)을 쌓았으면 모를까 결혼이후 아이를 낳고 그러고도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운우지락(雲雨之樂)에 눈떠간다는 것이 전문가들 주장이다.
그런데도 태규와 지혜의 주된 관심과 대화는 그것에 쏠려 있다. 오히려 섹스야말로 가장 근본적이 결혼이유였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남자의 밝힘증은 설득력에 꽤 접근했으나 여자의 상황과 그 묘사가 공감되기에는 결혼 전 이야기가 너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결혼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때 재미는 뒤끝에 남는 여운 없이 그저 영화를 보는 동안 웃을 수 있을 정도를 말한다. 이것이 「결혼이야기」를 굳이 오락영화의 차원에 머물게 하지만 대사도 그중 하나이다.
대단히 기발하거나 참신한 대사로 여겨지는 “털 두 개난 젖꼭지”, “그저 대주기만 하는 빨래판” 외에도 “하고 싶어”의 뉘앙스가 그 상황과 어우러져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것이 즉시 재미로 이어짐은 물론이다.
극 전체를 궁극적 본령에서 벗어난 코미디로 이끌어가는 진행도 심각하고 복잡한 것들을 잊고 살려는 신세대 취향과 맞아떨어진다. 가령 심혜진의 면도하는 모습은 지극히 작위적이지만 둘이 화합하는 결말장면까지 이어지는 코미디의 진지한 위력을 비장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러나 그 재미는 자리를 꽉 메운,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 관객들이 느끼는 정서이다. 우리 영화의 주된 수요층이 누구인지 입증된 셈이다. 그만큼 「결혼이야기」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낸 튼실한 기획의 ‘신세대 영화’인 것이다.
재미와 감동이 어우러진 영화다운 영화는 아닐지라도 어쨌거나 개봉 10일(서울기준)만에 8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결혼이야기」는 이 더위를 식히게 하고도 남는 ‘명화’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침체의 늪을 빠져 나오게 하려는 단순한 생각에서라면 「결혼이야기」 같은 영화일지언정 많이 만들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