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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칼럼·시평 [문화시평]
문학사적 위치의 새로운 조명 요구되는 석정시인
문화저널 편집부(2004-01-29 15:33:37)

/문학사적 위치의 새로운 조명 요구되는 석정시인
편집부

한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정립시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짧지 않은 세월동안 이데올로기의 갈림속에서 반쪽으로 이어져온 한국문학사에 있어 한자가의 문학세계를 포괄적이고 통시적으로 조명해 그 문학사적 위치를 제대로 잡아놓는데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한국현대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夕汀시인의 문학적 위치가 바로 놓여야 한다는 주장은 일찍부터 제기돼왔었지만 아직도 그는 민족시인으로 보다는 전원시인이나 목가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석정이 작고한지 17주년. 거의 문학세계가 제대로 조명되고 평가받기를 갈망하던 많은 문인․후배․제자들이 뜻을 모아 석정의 교향인 부안에 시비를 세웠다.
신석정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김민성)가 금년 초부터 추진, 4개월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제막한 석정시비는 그가 즐겨 찾으며 시심을 담아냈던 변산반도 입구 해창 해변 공원에 우뚝서 주민들과 문학인, 그리고 이곳을 찾는 후 세대들이 석정이 문학정신을 기리게 하는 자리로서 의미를 남길 수 있게 됐다.
한국 시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석정은 1907년 부안에서 태어나 열 일곱살 되던 해 조선일보에<기우는 해>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 시문학 후기동인으로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발표활동을 시작한 석정은 31년 「문장」지에 <차라리 한그루 푸른대로>를 발표했으나 검열과정에서 삭제 당했으며 39년 첫 시집「촛불」을 펴낸 이후 「슬픈목가」「빙하」「산의서곡」「대바람소리」등 다섯권의 시집을 펴냈다.
석정은 초기의 서정적 세계부터 후기의 극명한 역사의식을 담아낸 세계까지 큰 폭의 변모를 보였으나 초기의 시가 노장사상에서 연유한 자연과의 조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까닭에 줄곧 전원시인이나 목가 시인으로 치우쳐진 평가를 받아왔다. 더욱이 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대부분의 논의는 그의 작품을 친 자연의 목가적 세계에 귀속시키려는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석정 시인의 실체적 문화세계를 조명해내기까지엔 적잖은 문제점을 남겨온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몇몇 연구자들은 문학사의 공시적&#8228;통시적 상황이 고려되지 않은 바탕에서 한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정립시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을 제기해 왔으며 석정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내면성이나 역사성 등 특수한 상황과 배경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꾸준히 일어왔다.
특히 석정에 관한 연구들이 석정시의 역사적 변모과정이나 그 사상성 규명에 미흡했던 이유에 대해 석정의 제자이자 문학적 영향을 깊게 받았던 허소라시인은 「석정의 시의 성립배경을 해명하는 작업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으며「개개의 작품 분석에만 열중한데서 비롯된 석정시 규명의 편협을 바로 잡기 위해서 시기적으로 확연한 변모가 드러나 보이는 그의 시가 어떠한 배경 위에서 창작되어 졌고 그 사상성은 무엇인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고 제기한바 있다.
석정의 시 세계는 그가 참여했던 시문학동인들이 한결같이 서정시 운동을 이끌었다는 종래의 문학사 기술에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내게 하고 있다. 석정의 시가 1940년대 친 자연의 청록파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반면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이른바 참여파시의 진원이 되었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이 자연을 통해 보편적으로 소유하려는 미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낙원지향이 자아와 일제식민치하에서부터 끊임없이 시대 양심의 구현체로 다져온 사명적 자아와의 갈등과 통합의 문법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평가받는 그의 시 세계는 이제 보다 총체적인 재평가작업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작업은 이 지역에서조차 미흡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번 석정 시비 건립을 계기로 그의 문학세계가 제대로 조명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람은 참으로 크다. 지난 70년대에 석정이 작고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극적으로 추진됐던 석정시비건립 계획이 행정기관의 예산까지 짜여진 상태에서 하룻밤 사이에 원점으로 돌아갔었던 이유가 그의 시 세계에 정치적 색채가 짙다는데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가 여전히 목가시인이나 전원시인으로 지칭되고 있는 이중적 모순과 괴리감은 어떻게 설명돼야 하는지 안타까운 노릇이다.
석정이 작고한지 17년. 그의 문학세계를 흠모해온 많은 문인과 후세대들에 의해 석정시비는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의 고향에 세워졌다. 석정이 생전에 이곳을 찾아 저 아득하게 넓은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어떤 시심을 풀어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후세대들에게 석정이 우리 문학사 속에서 어떤 몫으로 서있는가를 정당하게 이어주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이 시비는 높이 4m, 기단너비 3m의 자연석과 화강석으로 제작되었으며 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모금한 자체성금 1천7백만원, 지방비 보조 1철5백만원 등 3천2백만원 으로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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