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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 | [특집]
한가위를 맞는 인간선언
이종철․국립민속박물관 연구관 (2004-01-29 15:34:54)
“조상님들이 중히 여겼던 자연 사랑의 조그만 하나로서 뒤에 산이 있고, 암에 내가 흐르는 천연의 깨끗한 환경을 조금만 가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급격한 사회변동의 위기 돌변하는 문화변동 속에서 자의건 타의건 우리는 고향과 농촌, 정서적인 삶과 전통을 잃어 버리며 살고 있다. 혈맥의 뿌리인 고향, 삶의 터전이었던 농촌, 생활의 축적된 지혜인 전통과 사람간의 끈끈한 정감의 상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는 나 자신이 우리되게 하였던 모든 것을 서서히 잊어버리는 것,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뿌리 얕은 나무가 바람에 잘 뽑히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이 부랑아가 되듯 지혜 있는 전통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나 국가는 문화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잘 갖추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미래가 약속된 집단이라고는 더구나 믿을 수 없다. 풍차는 봉건사회를 가져왔으나, 증기기관은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었다고 막스(MARX)는 이야기했는데, 베브린(VEBLEN)은 인간의 신념과 행동의 방식이 새로운 변동을 가져온다고 하였다. 어차피 사회는 변동되고 인간 또한 변화한다. 문제는 변화하는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동되어야 하는 것일까. 가장 이상적인 것은 관념론과 물질주의, 이상과 현실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사회구조가 가치지향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세계문화에 대하여 한국문화, 서양에 동양, 이성에 감성물질에 대한 정신쪽을 비하거나 한 수 아래로 보는 것을 예사로 여기어 왔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196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무조건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바뀌고 마을이 시멘트로 넓혀 포장되고 제초제와 농약을 무한대로 뿌려 농가생산이 오르면 잘사는 사회라 생각해 왔다. 소도시가 공장으로 바뀌어 농부가 산업노동자가 외고 소비가 미덕이 되면서 수단이야 어떻든 돈만 벌면 풍요한 삶, 출세한 생활이라고 치켜져 왔다. 날로 감소되는 농촌인구의 고령화와 이농현상으로 초가집을 이을 울력이 불가능하고 농촌의 공터화와 농업의 기계화는 피할 수 없는 오늘의 한국 현실이라 하겠다. 넓고 확 트인 포장된 마을길에는 경운기와 타이탄 트럭이 농민의 결실을 나르고, 새롭게 세워진 소도시 공장은 인근의 농가 소득을 올려 주었다. 자가용, 냉장고, 텔레비전, 전화와 일회용 비닐, 플라스틱 제품은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있다. 갑자기 불어닥친 떼돈 경기는 시골두메까지 다방과 카페를 질펀하게 만들어 우리가 그렇게 원하던 잘사는 사회, 부강한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현상을 우리는 어처구니 없게도 근대화니 현대화, 도시화, 잘사는 사회라 불러왔다. 그러나 그 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우리는 우리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수술은 성공했는데 사람이 죽어버린 삐뚤어진 성숙사회를 보게 된다. 조상님들이 중히 여겼던 자연 사랑의 조그만 하나로서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내가 흐르는 천연의 깨끗한 환경을 조금만 가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을의 공회당이나 산신당의 초가지붕이라도 남겼으면 그 바쁜 틈을 내어 대동이 모여 울녁으로 지붕을 잇는 공유하는 삶과 시간을 가질 것이고, 부엌 옆 브록크 담 가운데 구멍이라도 하나 뚫었으면 이웃이 음식을 나누면서 한 우물 정감을 나누었던 미덕을 되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알량한 공업화로 이제는 마실 공기도, 먹을 물도, 청정한 채소를 심을 토양도 잃어버리고 있다. 툭트인 길에 떼부자 된 취부가 길을 막아 오가는 차가 서로 싸우게 되는 진풍경이 날마다 일어난다. 집에서 기르는 소도 한 식구로 계산하여 소날을 믿어왔던 조상님들의 농우를 몰래 도살해 가는 도둑들이 전국의 확 트인 일일생활권 도로망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농부가 아흔 아홉 번 손이 가야 쌀이 된다는 나락을 들길에 말리는데 순박한 농부의 노력과 땀을 백주에 훔쳐가는 진풍경 등도 우리가 몰문화, 몰가치적으로 살아온 응보일 것이다.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자가용의 난무, 냉장고, 텔레비전, 온장고는 가뜩이나 힘겨운 수출적자를 더 높이 올려주고 일회용 플라스틱 비닐제품, 화학비료 등은 온천지를 쓰레기 강산과 산성토양으로 만들고 있다. 호화의 극치를 이룬 사치, 방종의 일부 기득권 계층이 사회에서 큰소리 친다. 떼돈을 번다면 부녀자나 이웃집 여동생 볼 것 없이 살인, 인신매매의 대상으로 삼는 폐륜아 , 사적이익이 챙겨진다면 부실공사, 낭비행정, 인사의 난맥을 가릴 것 없이 저지르는 반민족적 인사가 판을 친다. 우리는 악의 치부를 부끄러움 없이 강행하여 왔고 후손에게 오염의 원천을 문화화 시켜 주면서 사회를 막가는 세상으로 끌고 가고 있다. 민속문화의 탯자리 고향에의 기대 민속문화의 보존이라 하면 초가지붕 밑에서 돗자리 깔고 시조나 창을 부르거나 상다리가 휘도록 음식을 차려놓고 번문욕례속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참다운 민속의 보존은 생활속의 평범한 지혜를 찾아 인간답게 살자는 것이다. 인간답게 살려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가치와 윤리를 살피며 생활한다. 미래를 사는 사람들은 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발해, 신라시대처럼 조국을 남북으로 갈라놓는 정략을 꿈꾸지 않고 쥐똥만도 못한 권력이나 기득권을 위하여 민족을 동서로 분단시키는 흩은 일들을 하지 않는다. 진실로 삶의 문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하나의 촛불이 되어 꺼져가는 지혜와 인간사랑, 화합을 이끌어 주는 희생자요, 봉사자가 되려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더불어 사는 대동의 문화에 눈뜬 사람들은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세상에 못된 일은 하지 않았다고 미소지으며 육신의 허무를 타사며 새 생명을 구하는데 심장을 맡기고 의학의 발전에 마지막 몸을 맡기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와 역사의 기생충 같은 배신자와 반역자들은 교언영색과 곡학아세를 일삼으며 썩어가는 육신의 영달과 냄새나는 치부에 혈안이 되고 가솔의 비뚤어진 풍요에 큰 웃음을 치면서 세상을 곡예사처럼 유명하며 권력과 모욕스런 부귀, 허울뿐인 명예를 쫓아 세상을 더럽힐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를 때라는 옛 어른의 말씀처럼 우리의 고향 전북이 정치, 경제적으로 가난하다고 하여 허겁지겁 정치화, 근대화, 공업화라 하여 공해산업, 정치산업 후발단지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초록의 혁명을 가져온 농산의 집산지로서 누가 무슨 욕을 하여도 너그러히 포용하는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인심이 서린 곳, 후백제의 도읍답게, 동학혁명의 탯자리답게, 긍지와 정의를 지키며 높은 예술과 살아있는 문화를 가진 한국의 정신과 희망이 숨쉬는 곳, 서기가 서린 곳이기를 빈다. 파괴된 민속문화의 잔해에서 진정한 삶의 진실과 가치를 만천하에 소생시키는 학문, 예술, 종교, 과학, 역사와 문화의 고향으로서 축복받기를 기구한다. 추석이 가져다 주는 인간선언 해마다 오는 한가위지만 그래도 늘 추억의 동산처럼 우리의 마음속을 설레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헤어져 있거나 모여 있거나 간에 모두가 마음의 고향에 모여 농사의 큰 어려움을 딛고 수확을 얻어낸 풍요에 감사하는 명절이다. 같이 모여서 조상과 마을 어른께 제사하고 기도하고 인사하고 농사의 풍년을 신과 어른께 고마워하면서, 더불어 즐기며 온가족, 온마을, 온사회가 하나됨을 느끼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선행의 계절이다. 모처럼 일상의 번잡스런 생활에서 벗어나 생활의 활력과 힘을 얻고 기대에 부풀어 보며 꿈을 간직하는 기도의 시간이다. 금권퇴폐적 사고, 권력지향의 발작적인 광기를 떨쳐버리고 재생간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고귀한 사회이념의 진정한 합의가 도출되는 공동참회의 시간이어야 하고, 넉넉한 마음을 심어주는 새로운 가치를 일깨우는 시간이어야 한다. 다수의 고통과 편중된 지역문제를 해결 못하면, 소수의 안락과 특정지역의 안위도 보장받을 수 없는 인간상실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케네디의 경고를 귀담아야 하는 명상의 시간이다. 우리는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산업근대화, 경제 제일주의에 반비례하여 정신문화의 성장이 침체되었고, 빈익빈 부익부, 골목정치가 확산되어 계층간, 지역간, 연령간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사회발전에 가장 중요한 전통윤리가 박살나고 미래지향적 가치는 숨을 거두고 있다. 특정지역의 배타적 이기주의, 삼강오륜의 파괴, 물질․금전․권력제일주의의 비정상적 사회발전은 치유될 수 없도록 만연되어 있다. 인간의 지혜가 과학과 기술을 앞세워 자연을 개발하며 도전하였고, 우리가 편리하게 살려 하였던 그 지식과 과학기술이 오도된 가치와 생각 때문에 우리를 비인간화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였다. 과학기술에 힘입어 기업화된 농업은 발달하고 있지만 농어민은 더 어렵게 살게 되었고, 우리 조상들이 머리와 가슴, 마음으로 일구었고(hand, head, heart craft) 지혜롭게 살았던 고향은 황폐화되고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제발 추석이 민속학 사전에나 나오는 어휘가 아니고 삶의 재생을 위한 정신, 물질, 사회생활이 맑고, 밝고, 윤택해지는 자치의 재발견이기를 기도한다. 삶의 진실이 환생되는 조용한 자기 성찰의 축제가 되고 이러한 기도의 순간이 한달에 한번 정도라도 추석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 현대속에 되살려지는 삶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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