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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 | [특집]
문밖에 서계신 아버지들의 추억
이병천 ․ 편집위원 ․ 소설가 (2004-01-29 15:36:21)
우리들에게 추석은 음력 팔월 보름 하루 뿐만은 아니었다. 그 남은 날짜가 우리들이 가진 손가락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할 때부터가 사실은 추석이었기 때문이다. 하루의 밤을 맞아 잠을 자기 전마다 우리는 그 작은 손가락을 얼마나 꼽아 보았던가. 그렇게 기다리던 우리의 간절한 기다림 속으로 추석이 일주일쯤 앞으로 다가오면 할머니는 시장에 나가 제수품이며 우리들의 추석빔을 사가지고 오셨다. 우선 조기 두어 마리쯤, 그리고 대추면 배, 사과, 감 등의 과일에다 아직은 턱없이 철이 이른 우리들의 겨울옷 한 벌쯤이나 고무신 한 켤레를.... 밖에서 나가 놀면서도 할머니가 언제쯤 돌아오실건지 우리는 또 얼마나 기다렸던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당신들의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소에 나가 벌초를 하고, 그걸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논 가장자리에서 조금은 일찍 여문 벼를 몇단 베어오셨다. 조생종 벼가 보내며 보리밥처럼 누렇고 너덜너덜해진 위아래 방문의 문종이를 떼어내고 다시 흰 쌀밥의 색깔이 나는 한지를 발랐던 것이니 가을 햇살 아래에서 말라가면 더욱 희게 표백되던 그 문종이의 하얀 빛이라니!... 기나긴 여름 한낮이 기울고 이윽고 할머니가 돌아오시면 할아버지가 우리를 대신해서 왜 그렇게 늦었느냐고 조금은 가볍게 짜증을 내시고...... 할머니는 조기 한 마리 값이 얼마나 비싼지 하면서 혀를 내두르곤 하던 우리들의 추석! 그러나 그 보퉁이에는 어김없이 고무의 탄력성으로 굽혀져 있던 고무신이 조기보다 더 먼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어디 따로 있던 시절이던가! 그걸 아직은 따갑기만한 햇빛에 며칠 널어 말린 다음 솥에 넣고 마저 익히면 그게 올기쌀이 되는데 우리가 그 해 들어 처음 먹는 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한해를 신어보면 발길이 보다 언제나 한치는 더 컸던 고무신..... 추석이 더 가까워져서 누구의 입가에서도 흐뭇한 표정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날 때가 되면 마을 공동으로 해야할 일들이 그제는 은밀하게 벌어지곤 했다. 지금도 그런 단속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밀도살을 하면 안되는 때여서 돼지 한 마리를 잡는데도 마을 전체가 무슨 일을 공모하듯 약간은 긴장되고 술렁이는 것이었다. 하물며 풍년이 되어 소라도 한 마리 잡아야 할 때랴! 소를 잡는 일은 돼지를 잡는 일과는 처음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 마을의 대사였다. 백정이 따로 없어서 누군가 몇 번 그런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는 사람이 나서게 되지만 소의 정수리를 작은 망치로 한번만 때리면 된다는 장담과는 달리 나중에는 도끼며 함마까지 동원되고.... 우리는 그 얼굴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흘러내리던 소의 눈물도 보았다. 그러나 우리들의 어린 날, 돼지에다가 심지어 소까지 잡아도 될 만큼의 풍년은 도대체 몇 해나 되었던가! 쇠고기가 없으면 없는 대로 처마 밑에 걸어둔 고깃근이 조금은 꾸득꾸득해질 무렵이면 이미 추석은 이틀쯤 앞으로 다가와 있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그때쯤의 추석 풍경을 실로 추석 당일보다도 몇 배나 더 좋아했다. 어디에나 먹을 것들이 흔전만전했다. 뒷곁의 마당속에서는 아무리 깊이 파묻었다고는 하더라도 술 익어 끓어 넘치는 냄새가 풍기고 그 냄새만으로도 우리 조무래기들은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취하곤 했었다. 거기에 그 해 들어 새로 짠 들기름이며 참기름으로 무엇을 부치고 볶고 굽는 냄새가 마을 동구밖까지 퍼져 나갔다. 우리는 그래서 그 고소한 냄새들이야말로 마을과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네 조상들의 무덤까지 가서 닿고, 그게 곧 조상들을 불러내는 추석날의 초청장이라고 믿곤 했었다. 할머니는 너그러우셨다. 그때쯤이면 우리가 새로 사온 고무신을 먼저 신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허락하셨고 기름에 데쳐져 뜨겁기 그지없는 부침개를 입이 볼아질만큼 우적우적 밀어넣어도 마냥 웃기만 하셨다. 아아, 우리들 생쥐처럼 집을 들락거리며 부지런히 추석을 고마워하고 있을 때, 발에서는 땀이 차고 그 때문에 자꾸 고무신이 미끄러지는 것도 모르고 동네 고샅길을 나가보면 어떤 풍경들이 있었던가! 누군가가 몇 번씩 싸리비질을 하고 풀을 뽑아낸 하얀 고샅길 위로는 이제 바야흐로 고추잠자리들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투명해진 햇볕이 찬란한데 그 하늘을 올려다보면 전날까지도 그렇게는 보이지 않던 파란 하늘이 서럽게도 한 마장쯤은 더 멀리 비껴나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거기 모여 있었다. 우리는 오랜 뒷날까지도 왜 어른들이 동구밖에 나와 계시는지를 알지 못했다. 윷놀이를 하는 사람들 주위로 언제나 새까맣게 모여 섰던 사람들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버스가 한번씩 당도할 때마다 거기서 내리는 승객들을 일제히 건너다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비로소 고향을 떠나서 술 한 병과 과일바구니 하나와 고기 두어 근을 사들고 직접 그런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어른들은 그랬다. 버스가 보이고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지점에 모셔 윷놀이를 하면서 추석이 되어 고향을 찾는 자기의 아들딸과 친척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용케도 자기의 아들과 딸을 찾아낸 사람들이 노름판에서 재미본 이들처럼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난 뒤까지 밤늦게 이어지던 쓸쓸한 윷놀이 판, 거듭 모가 나오고 거듭 윷이 나와도 하나도 흥이 날게 없던 그들의 마지막 윷놀이 판이야말로 어쩌면 우리에게는 가장 감동적인 추석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추석 명절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있음으로 해서, 함께 존재함으로써 기쁨을 누릴 수 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막차가 끊어진 뒤, 이미 작취미성인 상태로 쑥대머리 한 구절이나 육자배기를 흥얼거리며 제집으로 찾아들던 식구 없는 어른들에게, 그제는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다릴 것이 없는 추석이 소리 없이 밝아오곤 했다. 우리들이 때를 모르고 불쑥 세배를 하기도 했던 그 날의 새벽, 제사상 머리에서 아무리 가르쳐줘도 언제나 그 아침이면 도로 새잽이가 되고 말던 홍동백서며 어동육서의 교훈, 한나절 다리품을 꼬박 팔아야 당도하던 성묫길의 고단함은 사실 우리가 그렇게 목놓아 기다리던 추석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또한 그때의 어른들처럼 동구밖에 우두커니 서서 추석을, 아니 사람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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