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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0 | [문화저널]
이 가을의 열병
박남준․시인 (2004-01-29 15:40:00)
1. 운명처럼 내가 달려 갔다. 내가 말을 건넸다. 마술에 걸린 것처럼 말이지. 신호등의 그 짧은 빨간 불빛의 대기의 시간을 가슴조이며 기다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부는 들녘과 같은 그의 파문져 오는 맑은 웃음. 그와 헤어진 후 내게 벗어날 길 없는, 내목을 조여오는 것과도 같은 무서운 고뇌의 굴레가 씌워졌다. 2. 썰물처럼 그렇다 썰물처럼 가슴 한편이 빠져 나가고 이윽고 모든 가슴이 무너지듯 쓸려 나가고 산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을이다. 바람인가 바람이 분다 다가온다 가을 바람, 바람은 나를 스친다. 탕--- 나는 관통되었다. 지나친다 지나간다 빠져나가고 다 빠져나가고 쓸쓸함이 남는다 쓸쓸함만이 남는다. 그 사랑만이 남는다 그대 만이 남는다 두눈 가득 고인 눈물 3. 삼류야 삼류 이건 숫제 신파라고 산파야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마음 그사람은 모를거야 모르실거야”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한결같은 사랑타령의 그많은 대중가요의 가사들이 이렇게도 마치 나를 두고 노래하는 것 같다니 4. 그도 지금의 나와 같은 날들이련지. 온갖 두근거림과 온갖 설레임과 온갖 목마름의 갈증, 온갖 가슴의 답답함, 온갖 절망의 낮과 밤, 시시분초를 떠나지 않고 밀려오는 그대를 향한 사랑 미칠 수도 있을게야 가슴이 터질 수도 있을 게야 이 절절한 가슴앓이 아! 이 질식사와도 같은 숨막히는 간절함. 그도 이러할까 내가 숨쉬고 있는 것일까 무너지는 한숨. 5. 고문이야 고문이야 걷잡을 수 없이 파고드는 욕망, 고통, 괴로움, 이 무서운 형벌. 그는 아는 것일까 풀들과 풀꽃들과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이 가을의 나무 숲, 흐르는 물 그 물에 떨어지는 한잎 한잎의 낙엽, 저 부는 바람 속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풀벌레 풀벌레 애처러운 울음, 어느 것 하나 어긋나지 않고 그대에로 향하여 이어진 나의 떨리는 고백, 사랑이라는 것 아시는지 그대 이밤 다지도록 나의 온몸 온가슴 세포 하나하나에 무수히 돋아난 섬모, 온갖 섬모들 마저 간장을 끊고 끊는 애끓는 사랑으로 눈물지는 것 울어도 울어도 머리카락 두손 가득 움켜쥐며 도리질을 치며 치며 날밤을 또 그렇게 새워도 6. 황량한 벌판에 홀로 남아있는 것인가 어느 누구도 나의 안타까움 나눌 수 없다. 이룰 수 없는 나의 사랑. 늑대들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이 들판 나의 대지는 끝없는 사막. 사막의 한 가운데 모래 모래 모래 그 사막의, 내가 이제 더는 이를 수 없는 저 언덕 저 먼곳 낙원처럼 떠올랐던 그대의 신기루. 달려 갔었다. 다다를 것 같았지. 잡고 싶었다. 놓치지 않아야 했는데 더 이상 그대의 신기루 떠올릴 수 없다. 떠오르지 않는다. 모래가 된다. 모래로 남는다. 무너진다. 이 절망스러운 갈- 증- 7. 죽음이다. 떠도는 나의 영혼 이미 내게서 떠나가버린 넋. 가버린, 빠져나가버린 영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죽음이다 죽음에 가깝다 난도질의 가슴 부여잡고 홀로 누운 밤 꿈길로는 그대 오지않을까 저기 저 아득한 벼랑끝 꽃처럼 피어오는 그대 아 아- 가위눌려 허위허위 다가갈 수 없어 소리칠 수 없어 끝내 그대 이름 불러보지 못하고 8. 가을꽃이 바람에 날린다 바람에 날린다 바람앞에 선다. 옷깃을 여민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저 바람앞에 서있는 일이다. 잎지는 나무에 기대어 나무가 되어갈 일이다 나무가 되어갈 일이다 무성한 여름의 잎들은 어느덧 땅에 떨어져 마른잎으로 구르고 마른 나뭇가지- 이제 새들의 노랫소리 들려오지 않는다. 움츠리며 몸떠는 가을꽃 그 꽃의 눈물. 별이 뜨고 별이 진다. 지는 것은 별만이 아니다. 9. 꽃이다 꽃이 아니다 이제 나는 한송이의 꽃 피워 올릴 수 없다. 누구도 나를 이 깊고도 어두운 빈방에 가두지 않았다. 저 조여오는 칠흑의 벽면마다 축축히 묻어 나오는 죽음의 냄새, 혹은 자살의 충동 그 너머에 유혹처럼 피어나는 꽃, 그대의 얼굴 10. 꽃이다 꽃이 아니다 그대다 그대가 아니다 진정 목숨을 걸고 피어나는 꽃들은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나는 두려워 하는 것인지. 그 무엇도 나를 이 절망과 가슴 미어지는 고통을 안기며 비수가 되어 찌르지 않았다. 11. 편지를 써야겠어 보․고․싶․다 보고 싶다라고 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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