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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0 | [문화칼럼]
임진왜란이 아니고 조․일 전쟁이다.
양재숙․전북도민일보 편집국장 (2004-01-29 15:41:39)
1592년 임진(壬辰)년,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明)나라 3국간의 한반도에서의 7년에 걸친 장기간 대규모의 국제전은 여러 가지로 잘못 인식되어 있고 크게 왜곡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잘못된 인식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 대규모 장기간의 국제전이 기이하게도 우리의 인식속에 “난(亂)”으로 인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물론 오늘의 한국인들에게도 이 전쟁은 “임진년에 왜인들이 일으킨 난”으로 인식되고 있고 이 역사적 대 전쟁이 “임진왜란”으로 명명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일반은 물론 학계에서도 아무런 이의가 제기되고 있지 않다. 과연 이 역사적 대 사건은 “난”이었는가? “난(亂 : revolt)”이라 함은 “정통정부의 권위에 대한 비 정통 무장집단의 도전행위”라 정의 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전쟁(戰爭 : war)”이라 함은 “정통 정부간의 군사적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년에 조선을 침공한 일본의 무장세력은 비 정통의 무장집단이었던가? 1590년 선조(宣祖) 23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 일행이 휴대한 국서에 “조선국왕 이연이 글을 일본국왕 전하에게 바치노니…(朝鮮國王李 奉書日本國殿下…)라 했고 이에 대한 일본의 답서에 ”일본국 관백 수길이 글을 조선국왕 각하에 바치노니…(日本國關白秀吉奉書朝鮮國王閣下…)라 했다. 서로 조선국토와 일본국토의 정통 정부임을 인정하고 있었고 임진년에 조선에 침공하여 조선국의 정부군(官軍)과 충돌한 일본의 무장세력은 바로 일본국의 정부군이었다. 정통정부의 정부군 끼리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었던 만큼 “난”일 수 없었고 “전쟁”이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전쟁 즉 조․일(朝․日)전쟁 또는 조선과 명 연합군과 일본군간의 국제전쟁으로 보아야 바른 역사인식이고 옳은 명명이 될 것이다. 고려이래 한반도와 중국연안에 출몰,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던 무장 왜구들의 분탕질이야 말로 왜란이다. 명백하게 전쟁이었는데도 당시 조선의 조야는 물론 오늘에 이르러서도 이 역사적 대 사건을 조․일전쟁이 아닌 임진왜란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은 어쩐 사연일까?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의 의식속에는 일본 비하(卑下)의 정서가 깔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조선의 조야는 대륙의 명나라(漢族)만을 문명국, 문명인으로 숭상하고 남쪽의 일본인 (倭人)들이나 동북쪽의 여진족(女眞族)에 대해서는 비 문명의 미개족으로 무시했다. 비록 외교의례에서는 명에 사대(事大)하는 대신 이들에 국가관계의 교린(交隣)정책을 채택하고 있었으나 정서적으로는 국가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국 정부군에, 1627년 정묘(丁卯)년과 1636년 병자(丙子)년에는 청(淸 : 女眞族)국 정부군의 침공을 받아 호된 시련을 겪은 뒤에도 이같은 정서는 여전했다. “임진왜란”이나 “정묘 병자호란(胡亂)”은 바로 비하 정서의 소산이다. 대등한 국가간 관계의 군사적 미개지역의 무도한 무장집단의 군사적 난동행위-난-으로만 인정하려 했다. 호된 시련을 겪은 뒤에는 중오심까지 겹쳐 비하정서는 더 짙어졌으며 특히 일본에 대해 더했다. 그러나 이같은 현실외면의 주변국 비하정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자신에 매우 해독적이었다. 문제는 비하정서의 편견으로 인해 상대를 있는 그래도 바로 보지 못했고 사실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데 있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지혜를 잃었던 것이다. 조선 건국이래 전쟁이 나기까지 2백년 간 일본은 60여차례나 사신을 보내 조선의 사정에 대해 정통해 있었으나 조선은 건국후 50여년 간 6차례 사신을 보낸데 그쳤고 1443년 세종(世宗) 25년이후 1백 50여년 간에는 단 한차례의 사신을 보낸 일도 없이 이 호전적인 잠재적국에 대해 스스로 눈을 감았고 귀를 막아 버렸다. 그 사이 일본은 강력한 군사대국이 되어 있었는데도 조선은 이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비하정서로 인해 상대를 알려하지 않았던 결과다. 상대를 아는 지피(知彼)의 지혜를 잃었던 만큼 자기를 아는 지기(知己)의 지혜도 잃었다. 당시의 조선은 자신들이 당시로서는 세계적 수준의 강력한 무기체계를 갖고 있었던 사실을 잘 몰랐을 정도였다. 위대한 세종 대왕이 당시 조선의 우수한 과학기술력을 바탕으로 고려 최무선 이래의 각종 화기(火器)를 대대적으로 정비, 대포(大砲․銃筒)등을 양산하여 전국의 주요 병영에 배치해 두었던 것이며 보병들의 소화기인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일본군 정도는 간단히 격퇴할 수 있는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막강한 화력을 창고에 잠재워 둔채 개전 초기, 일본군의 소총에 맥없이 무너져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군은 곧 화기의 위력을 깨닫게 되었고 해전에서의 이순신(한산도 대첩), 육전에서의 권율(행주대첩) 김시민(진주대첩) 등이 우세한 화력으로 일본군을 대거 섬멸, 조선에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었다. 비하정서의 해독은 적을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데 그치지 않았고 이 전쟁에서 이기고도 이긴줄을 모르는 어리석음으로 까지 이어졌다. 전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승패개념이 있을리 없었고 난으로 보았기 때문에 평정개념-“난리가 가라 앉았다”-만이 있었다. 그래서 승리의 환호, 우리 민족의 위대함은 전하지 않고 난리통에 당한 고통과 아픔 그리고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만을 전해 후손들에 패배주의와 약자의 논리만을 남겨 주었다. 이상하게도 개명한 오늘에 이르러서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 부르고 있다. 4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한국인들의 의식은 변함없이 “임진왜란적”이다. 지피지기의 지혜를 발휘 하지 못하고 미운놈이 있으면 벽을 쌓고 몰라 버린다. 임진왜란이 아닌 조일전쟁으로 볼줄 알아야 하겠다. 1910년 일본의 재침으로 조선왕조가 마침내 멸망한 것은 조일전쟁을 끝내 임진왜란으로 고집했던 자폐(自閉)성 어리석음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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