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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연재 [문화가 정보]
익산 입점리 백제고분군
곽장근(2004-01-29 15:43:02)


우리들의 오랜 숙원사업 중에 하나였던 국립전주 박물관이 개관된지도 벌써 1주년이 다 되어 간다. 처음부터 이 박물관은 부지선정 문제로 심한 몸살을 앓다가 급기야는 본래 계획된 자리에 그 터전을 잡지 못하고 전주시 외곽으로 쫒겨 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개관 초부터 너무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박물관으로서 본래 기능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라고 의구심을 가졌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개관 1주년을 준비하고 있는 이 박물관은 우리들이 우려했던 걱정거리를 깨끗히 씻어 버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즉 다른 지역에 있는 국립박물관보다 뒤늦게 개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중한 일들을 무리 없이 잘해내고 있다는 여론이 높다.
이와 같은 생각은 비단 박물관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박물관에 한번쯤 다녀온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 있게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많은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인가? 이런 궁금증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초현대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물의 위용도 아니고, 또 완벽하게 잘 갖추어진 부대 시설도 아니다. 다름 아닌 전시실에 정성스럽게 진열된 수많은 유물들이 바로 그 모든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고 있다.
여기에 전시되고 있는 대다수 유물들은 지금까지 전북지방에서 실시된 발굴조사나 다른 조사과정을 통해 출토된 것이 대부분이다.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이 유물들은 전북지방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다. 바로 이 유물들이 국립전주 박물관의 중요성을 한층 일깨워 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이 지역 역사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뿌리깊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는 우리는 때때로 이 유물들을 통해 전북지방에서 찬란하게 꽃 피웠던 지나간 역사의 한 단면을 그려 볼 수 있고, 또 문자가 없었던 선사시대나 문헌기록의 부족으로 베일 속에 가리워져 있던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장황하게 유물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국립전주박물관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유물이 있어 그 유물을 소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 유물은 금으로 만든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익산 입점리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이 유물도 어찌 보면 현재 전시되고 있는 유물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단지 다른 유물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나라 사람들은 금을 무척 좋아하는 국민성을 가졌다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바로 이와 같은 우리나라 국민성 때문에 기인하는지 모르겠지만, 전시된 많은 유물들 가운데서 입점리 출토 유물은 유독 많은 관심이 대상이 되고 있다. 또 전북지방에서 이런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믿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에 여기에서는 이 유물이 출토된 입점리 고분군에 대한 발견경위, 발굴조사 과정 그리고 유적의 성격에 대하여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유적의 위치와 발견 경위

이 유적은 전북과 충남의 도계를 형성하고 있는 금강이 한 눈에 굽어 보이는 구릉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익산군 웅포면 입점리에 속한다. 이 지역 일대는 험준한 소백산맥에서 서해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린 지류들이 모여 형성된 구릉지대로 들판 곳곳에는 그다지 높지 않은 야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의 인근에는 새터마을이 있으며, 이 마을은 옥구군 나포면과 익산군 웅포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능선에는 어래산성과 도청산성 등이 남북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 두 산성은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금강변이 요새지로 삼국시대 이래로 연안방어에 있어 전초기지로 사용되어 왔다.
이 유적의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진 시기는 1986년 2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이 유적은 마을 사람들의 구전이나 문헌에 기록된 것이 전혀 없어 그 존재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유적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새터마을에 거주하는 임성수씨이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던 그는, 1986년 2월 2일 오전 10시경에 마을 뒷산으로 칡뿌리를 캐러 갔다가 삵괭이가 드나드는 구멍을 발견하고 20cm 깊이까지 겉흙을 걷어내자 그곳에 이상한 돌무더기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입구를 막고 있던 돌 20여개를 빼내고 그 안으로 들어가 금동관, 금동신발 등 다수의 유물을 꺼내어 이와 같은 사실을 2월6일 익산 군청에 신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세상에 아려지게 되어 곧바로 문화재연그소 주관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정도로 주민들의 제보는 끝나지 않았다. 1차 발굴조사가 종료된 그해 가을 입점리에 거주하는 임낙동(당시 응포중학교 3학년)군이 마을 뒷산에 밤을 주으러 갔다가 토기가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익산 군청 공보실에 신고를 하게 됨으로써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토기가 토출된 지점은 능선의 정상에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구릉상의 중간지점으로 이미 봉분이 깎여나가 외관상으로는 고분의 존재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런 제보에 접한 발굴조사단에서는 즉시 토기가 노출된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불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입점리 유적이 세상에 알려지게된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어느 유적에 대한 불굴조사를 실시하게된 동기에 대한 설명은 지난번에 여러 차례 걸쳐 소개해 드린바 있다. 이 유적의 경우도 종전에 소개한 경우와 별다른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내용을 새삼스럽게 다시 소개한 것은 이 유적에서 있었던 일이 다른 유적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또 이 유적을 처음 제보한 사람은 발굴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이 분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사람도 아닌 바로 학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유적에 대한 불굴조사를 실시하기까지 그 동기 제공은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만의 힘에 의존하기에는 분명 한계성이 있다. 이 유적의 경우처럼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실시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는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선조 들이 남겨 놓은 모든 유적에 대한 보전을 위해서 그것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절실하게 요망된다고 생각한다.

2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6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실시되었다. 1986년 2월27일부터 4월3일까지 실시된 1차 발굴조사에서는 금동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된 1호 고분과 그 주변지역에서 다른 고분6기 등 모두 7기의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2차 발굴조사는 지표상에 토기가 노출되어 그 존재가 확인된해 10월10일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돌방과 널길을 갖추고 있는 8기의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이 8기의 고분중에서 금동제 유물이 출토된 1호분을 제외한 나머지 고분들은 본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심하게 파괴된 상태였다. 그래서 조사된 8기의 고분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거의 원상 파악이 가능한 1호분을 중심으로 그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1호분은 능선의 정상부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린 경사면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봉분의 형태는 원형으로 고분의 주변 지역에는 많은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있었으며, 정상부에는 2-3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마련된 돌방은 경사면이 생토암반층을 ㈁자 형태로 파내고 나서 그 안에다 장방형이 되게 시설하였다. 이 돌방을 구성하고 있는 네 벽은 바닥에서 위로 90cm내외 지점까지는 수직이 되게 쌓고 그 위로 부터는 네 벽을 안으로 점차 좁혀가면서 둥글게(궁륭상)축조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크기가 30-40cm정도 되는 4매의 뚜껑 돌을 올려놓아 천정을 만들었다. 돌방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마련된 널길은 남벽의 동쪽에 완전히 치우쳐 있으며, 돌방과는 달리 수직이 되게 쌓았다.
그리고 그 입구는 돌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2매위 판자모양 돌을 이용하여 막았다.
돌방의 바닥에는 크기가 30cm내외되는 비교적 작은 돌을 이용하여 전면에 거쳐 깔았으며, 그 중 일부는 이미 교란된 상태였다. 그리고 바닥에 깔려있는 돌들 바로 아래에는 널방 속에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굴껍질과 조개껍질 등을 잘게 부신 다음 진흙과 모래가 섞여 있는 흙을 혼합해서 전체적으로 시설하였다. 또 널길 입구에서부터 남쪽에는 돌방에 고인물이 쉽게 빠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돌로 배수 시설을 특별히 시설하였다. 이 1호분의 크기는 돌방을 구성하는 북벽 242cm, 서벽은 268cm로 장방형이며, 그리고 널길은 높이 240cm, 폭 85cm, 길이는 158cm정도 된다.
이외에 다른 고분들은 파괴정도가 심하여 정확한 구조를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일부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대체로 생토 암반층을 파내고 나서 그 안에 돌방을 만들고 돌발을 구성하는 남벽 에는 돌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널길을 시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고분의 형태는 전형적인 백제 고분의 특징적인 요소로 지난번에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란 남원지방에서 조사된 가야계 고분과는 그 구조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만 예외적으로 남원 두락리 2호분은 이들 고분과 동일한 구조를 띠고 있어 많은 관련성은 있지만, 널길의 위치와 돌방 내부의 회칠 여부 등 몇 가지 점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귀중한 유물 다량으로 출토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조사된 8기의 고분 중 1호분 내에서 출토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 금동으로 만든 신발과 관모, 철제 발걸이, 말재갈, 은제 말띠드리게, 네귀 달린 청자 항아리 그리고 6점의 토기 등은 제보자가 칡뿌리를 캐다가 발견한 1호분 안으로 들어가 수습한 유물들이다. 다시 발굴조사를 통해 금동제 관장식편, 금동제 드리개, 화살통 꾸미게, 금제 귀걸이, 유리구슬 그리고 다량의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금동으로 만든 신발은 금동판을 이용하여 금동줄로 꿰매어 만든 것으로 그 바닥에는 앞굽에 6개 뒷굽에 4개씩의 금동못을 박았다. 이 신불은 바닥에 박은 금동못중 뒷굽에 있는 몇 개는 끝이 뭉둥하게 달아있고 왼쪽 신발은 얇은 철판으로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어 실제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신발의 크기는 길이 30.2cm, 폭 10.2cm이며 최대 높이는 9.3cm정도 된다. 이와 유사한 금동제 신발이 전남 나주 신촌리 9호분, 일본 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바가 있다. 금동제 관모는 옆면에 고기비늘 모양의 무늬가 장식되어있고 뒷면에 길게 위로 휘어져 올라 가는 장식이 있는데, 그 끝은 공을 반으로 자른 형태이다. 마지막으로 자기는 높이 17.3cm내외의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어깨부분에는 4개의 꼭지가 붙어있는 청자이다. 이 청자는 공부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6개의 꼭지가 붙어있는 창자와 유사한 형태이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입점리 유적의 발견경위, 발굴조사 과정 그리고 출토유물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며, 원상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면서 많은 유물이 출토된 1호분을 중심으로 유적의 성격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이 1호분은 능선의 남쪽 경사면의 암반층을 파내고 천정이 궁륭상으로 축조돈 전형적인 백제 돌방무덤이다. 이와 유사한 고분은 고구려지역에 다수 밀집 분포하고 있으며, 백제지역에서는 한강유역과 공주지방에 밀집되어 있고 부여 이남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조사된 것이다. 이런 분포양상으로 보아 이 형식에 속하는 고분 중에서 상당히 올라가는 것으로보고 있다.
그 이후에 전북지방에서는 이와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는 남원 두락리 2호분이 조사되었으나, 널길의 위치, 돌방 내부의 회칠방법 등 몇 가지 점에서 이 고분과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고분의 구조면에서 입점리 1호분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는 것은 백제와 가야의 문화교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로 보인다. 또 이 유적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와 같이 뒷면에 휘어진 긴 나팔 모양의 장식이 있는 비슷한 형태의 유물과 금동제 신발이 일본 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이와 같이 고분의 구조와 출토 유물 등에서 보이는 이들 지역 고분과 밀접한 공통성은 당시에 백제와 가야,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 교류 관계를 입증하는 근거자료로 볼 수 있다. 또 백제와 가야 그리고 일본과의 교류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결국 입점리 고분은 출토된 유물과 고분의 구조 및 양식 등으로 보아 5세가 중반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그 피장자는 중앙귀족이 지방행정 책임자로 파견된 귀종층이거나 아니면 토착 세력집단의 유력자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근래에 들어 전북지방에서는 전지역에 대한 활발한 지표조사를 통해 입점리 유적 외에도 백제 고분이 도내 전지역에 걸쳐 곳곳에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은 몇몇 유적에 불과할 정도로 아직까지도 미진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 더구나 발굴조사가 실시된 유적 중에서도 이번에 소개한 입점리 유적을 제외한 나머지 유적들은 파괴된 고분에 대한 수습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져 고분의 구조만을 확인하였을 뿐 출토 유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백제 고분에 대한 상세한 성격을 파악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제보자에 의해 이 유적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유적에서 많은 귀중한 유물이 출토되어 전북지방에 있는 백제 고분의 성격 규명이 보다 명확하게 이루어진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전북지방에서 확인된 백제 고분에 대한 불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성과를 토대로 연구가 진행된다면 그 성격이 보다 더 명확하게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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