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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0 | [문화저널]
지상 끝의 사랑을 위해
김판용․시인 (2004-01-29 15:45:14)
시에 무슨 이야기를 붙인다는 것이 덤스러워 질색이다. 그 말은 어쩌면 시는 시대로 오롯히 남겨두고 독자에게 모든 걸 맡겨 보자는 오기도 한 몫 한터이지만 사변적인 시가 범람하는 시대에 더 할 이야기가 뭐 있겠느냐는 나의 문학적 견해의 일편이기도 하다. 이글이 사족이 아니었으면 한다. 지난 겨울이었다. 변산반도를 돌아본 사람들은 보았겠지만, 새삼 밝힌다면 산과 바다가 묻히고 묻히는 지상의 끝 말이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들이 고만하게 추위를 나고 있었다.-그 아름다운 기암과 눈 시린 바다 그리고 아스라한 섬들이 꾸미는 몰아의 절경은 차라리 이야기하지 않으련다.-몇굽이 산을 돌아 굽이치고 물결을 돌아 이른 마을이 있었다. 모항(茅港)이었다. 해변인데도 해송이 아닌 붉은 적송이 울창하고 모래 사장이 고운 해수욕장까지 거느린 곳으로 마을의 옆구리엔 갯벌이 깊숙이 들어와 만조 때면 석호처럼 물결이 잔잔했다. 마침 나는 어느 노조의 역사 기행팀을 이끌고 변산반도의 유적지를 답사하던 참이었는데 점심 때를 지나 몹시 허기지던 차에 가게가 있어 요기를 하려고 무조건 들어선 것이다. 반도 중에서도 유난히 바다로 뻗어나온 모항은 제주도의 일출봉을 방불하는 가위 변산의 일출봉, 아니 일몰봉이라 부를 만했다. 그 마을에서 산과 바다에 갇혔던 마음을 풀고 주위를 보았다. 나목이 잔잔한 연봉과 울뚝불뚝 한 바위들이 산널겅은 바다를 향하여 내리고, 아슴하게 다가오는 파도는 내려오는 산들을 감싸며 끝없이 뒤척이고 있었다. 겨울 물들이 산 굽이에 숨어서 감때사나운 난바다의 상처를 씻고, 능선의 산들은 대지를 몰아온 거센 호흡을 내쉬고 있었으니, 그것은 지상의 끝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극치 어쩌면 대지와 해양의 신열 오르는 정사(情事)의 오르가즘 같았다. 우리 일행은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가게의 쪽창으로 바다가 보이고 라면 가닥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또 쪽창과 라면 가닥 사이로 산이 보였다. 그러면서 살아온 날들의 여정을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 사는 길이 저처럼 서로 감싸주며 빈 가슴을 채워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항에 박형진 시인이 살고 있음을 부끄럽게도 지난 여름에서야 알았다. 마침 그옆 국민학교에서 행사가 있어 늦게까지 그리고 많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모항 해수욕장에 가서 몸도 잠겼다. 그때는 이미 ‘모항에 가면’이란 졸작시를 쓴 후였다. 한 시인이 지키고 있는 마을을 감히 끄적였으니 염치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도(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비포장이어서 먼지 폴폴 날리는 길을 걸으면서도 무례를 용서하라거나 이실고지(以實告之)를 못했으니 이 자리를 빌어 고두 회초리를 맞고 싶다. 모항에 가면 모항에 가면 그대 삶의 바다를 보리라 서해 시린 물결들이 돌아와선 눕고 맨몸의 갯벌이 물살에 추위를 삭이며 섞는 모항에 가면 산은 뻗다가 얼마나 낮아져야 마을이 되는지 알리라, 난바다 파도 뒤척여 사람의 바다에 드는 밀물 그 심연의 눈물과 사랑을. 서로의 빈 가슴을 채우며 출렁이는 삶은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가 그렇게 겨울 모항에 가면 바다와 산이 얼굴 맞대고 오손 도손 살아가느니 그대, 모항에 가면 각설하고, 그래서 나는 모항을 모항(母港)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신 농원의 호화로운 방갈로의 유리창들이 거만하게 마을의 낮은 집들을 깔보듯 석양의 햇빛을 반사 시키는 저무는 날망에서 바라보노라면 항구는 오지랖 넓은 어머니 같이만 보이는 것이다. 어머니의 품같은 모항을 권하고 싶다. 고기 잡으러 사는 작은 어부들의 마을, 질기고 억센 띠(茅)이파리처럼 지키며 살아가는 삶과 그리고 외롭지 않은 산과 바다가 감싸고 도는 해안에서 먹고 마시는 라면 한 봉지 소주 한 잔의 나눔이 정겨우리라. 그리고 당신도 항해의 물비늘을 벗고 정박하는 법과 사랑을 배우게 되리라. 출렁이는 파도와 소소리 바람 울창한 소나무 숲에 싸이기만 한다면 마침내 산들에 묻히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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