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0 | [문화저널]
전주 여의동 집자리 유적
곽장근․전북대 박물관 조교
(2004-01-29 15:45:50)
전북지방의 원삼국시대 연구현황
전북지방은 지금까지 도내 전지역에 걸쳐 실시된 지표조사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내지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유적들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도내 전지역에 많은 유적이 산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굴조사를 통해 나름대로 그 성격이 파악된 유적은 몇몇에 불과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북지역에서도 최근 이 지역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집자리유적들이 발굴되기 시작하여 이 지역뿐아니라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커다란 활력소가 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남원 세전리, 김제 청하면 동지산리와 전주 여의동 유적을 들 수 있으며, 이번에 소개하는 여의동 집자리 유적도 이러한 맥락속에서 의미하는 바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북지방의 백제 이전 시기, 즉 원삼국시대에 대한 연구는 그 기본적인 실체마저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부분은 베일 속에 가리워져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원삼국시대의 연구가 문헌기록보다는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의 성과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와 관련된 문헌기록의 발견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발굴조사도 아주 미진한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당분간은 원삼국시대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도내에 산재되어 있는 유적의 발굴 성과와 밀접한 관련을 띠고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여기에서는 여의동 집자리 유적의 소개를 통해 백제가 이 지역을 흡수하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적인 특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성과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유적의 조사에서는 당시의 모든 성격을 명확하게 단정할 만한 성과는 없었기 때문에 소개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여의동 유적의 위치 및 발굴 경위
이 유적은 작년에 개통된 서부순환도로를 따라서 이리방면으로 가다보면 전주공단을 벗어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도로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즉 도로가 개통되고 나서 전기공사를 하면서 세워진 철탑이 우뚝솟아 있는 밭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몇 년전에 전주시의 외곽지역을 흡수하는 과정에 전주시에 편입된 지역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전주시 덕진구 여의동에 속한다. 이 지역 일대는 전주시의 서쪽지역을 감싸는 황방산에서 북서쪽으로 완만하게 흘러내린 지루들로 형성된 완만한 구릉지대로 대부분의 지역이 이미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이 집자리유적은 이미 개간된 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굴조사를 실시하기 이전에는 그 존재여부를 전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만 몇 년전에 실시된 지표조사를 통해 고인돌 2기가 조사되고, 또 서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지역에는 전주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백제고분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외에도 황방산 줄기와 전주공단이 만나는 지점에는 고인돌 1기가 자리하고 또 몇년전에 황방산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구릉지대의 논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 출토된 유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유적의 존재 가능성은 상당히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에 서부순환도로 개설공사를 진행하면서 이미 학계에 보고된 바 있는 고인돌이 본래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어 그같은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전북대 박물관에서는 곧바로 현지를 답사하여 도로의 절단면상에서 일부 토기편과 숯이 출토되는 양상으로 보아 집자리로 추정되는 흔적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와같은 조사 결과를 즉시 관계기관과 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관계자에게 알려 고인돌이 있었던 곳과 집자리 유구가 발결된 지역에 대한 공사를 중단 하도록 요청하였다. 이같은 유적보존에는 국립전주박물관의 관장님을 비롯한 직원 여러분과 특히 이규산 학예연구관의 지대한 노력이 있었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유적이 확인된 지역의 공사가 전면중단되고 나서 곧바로 추진되었으나 처음부터 적지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전주에서 개최 예정인 전국체육대회 이전에 서부순환도로의 모든 공사를 마무리지어야 하는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전국체육대회 기간 동안에 전주시내의 교통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당시로는 이 도로의 개설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그 결과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발굴조사는 그 유적의 전지역이 아닌 고인돌이 있었던 지역과 집자리 유구가 확인된 일부 지역에 국한시켜 긴급수습조사 형식으로 실시되었다. 또 도로공사로 인하여 도로면마다 10M 내외 높은 단을 이루는 곳에서 확인된 집자리 유구가 강우나 주변지역 공사로 더욱 파괴될 우려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유적에 대한 긴급 수습발굴 조사는 그 공사를 주관하는 전주시의 발굴경비 지원과 촉박한 공사 일정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담당하는 삼성종합건설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5월 13일부터 약 보름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그 결과 이 유적에서는 도로공사를 하면서 이미 반절 정도 잘려나간 집자리와 한곳에 두 개의 집자리가 중복된 형태로 조사된 2개 등 모두 3개의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이 중에서 집자리가 중복된 것은 먼저 만든 집이 어떤 연유로 폐기되고 나서 그 후에 같은 곳에 다른 집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그 주변지역에는 또 다른 집자리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이 지역 일대에는 대규모의 집자리 유적이 있을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집자리 주변지역에 있었던 고인돌 2기는 포크레인으로 공사를 하면서 유구 전체가 파괴되어 더 이상 조사를 실시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고인돌과 같은 경우에는 거대한 덮개돌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유적이라는 최소한의 식별은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여 유적을 파괴시킨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경우는, 종전에 공사현장에서 유적을 어떻게 다루어왔던가에 대한 하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공사 자체만을 위한 종전의 공사방법은 분명히 지양되어야 하며, 앞으로는 사전에 공사대상지역에 대한 최소한의 학술조사를 병행하는 공사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유적에는 조사된 3개의 집자리는 모두 풍화 화강암층을 파내고 마련한 수혈식 형태로 원삼국시대의 전형적인 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지표면에서 어느정도 깊이까지 흙을 파내어 구덩이와 같은 생활공간을 마련하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억새나 풀로 지붕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의 내부에는 중앙에 토기편과 더불어 다량의 목탄과 불에 그을린 진흙구덩어리가 한곳에 다량으로 뭉쳐있어 그 곳에는 화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면에는 주거공간을 말끔히 하기 위하여 굵은 모래가 섞인 점토를 전면에 걸쳐 깔았다. 또 모든 벽면에는 벽면의 흙이 떨지는 것을 방지하고 보온을 위해 바닥면에 깔았던 점토를 역시 두껍게 발라서 시설하였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집 내부에서 파손된 상태로 출토된 상당량의 토기류가 주류를 이루며, 이외에도 실을 뽑는데 사용된 가락바퀴와 그리고 홈자위 1점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원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들로 이 유적의 시기와 성격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여의동 유적의 성격
이 유적에 대한 조사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도로를 개설 하면서 유적의 일부가 파괴되어 이를 수습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 된 것이다. 따라서 도로공사의 특성상 조사 기간이 대단히 촉박하고 또 조사경비도 충분하지 못해 조사지역을 확대하여 충분한 조사를 실시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 유적은 이번에 조사된 3개의 집자리 외에도, 그 주변지역에는 또 다른 집자리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세전리유적과 같이 대규모의 집자리유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조사에서는 유적의 성격이나 연대를 밝힐 수 있는 충분한 자료를 얻을 수가 없었지만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예가 많지 않은 원삼국시대의 집자리에 대한 조사라는 점에서 우선 조사의 의의를 찾을 수가 있다.
원삼국시대는 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시대구분 방법으로 서력기원 개시 전후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의 시기를 말하며, 이것은 1970년대초 처음으로 제창되어 현재는 어느정도 학계에 정착된 상태이다. 이 시기의 가장 뚜렷한 문화적인 특징으로는, 청동기가 완전히 소멸되고 철이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철기가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철기의 발달로 이미 초기 철기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철제농기구를 이용하여 농경, 특히 벼농사가 현저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와 관련된 유적의 대부분은 그 이전 시기의 유적과는 달리 대체로 구릉지대나 넓은 들판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분포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철기의 발달과 광범위한 보급으로 인한 농업의 눈부신 발달로 그 당시 사람들의 농업에 적합한 지역을 찾아서 생활공간을 이동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여의동 집자리 유적은 위치나 출토유물 등 여러 가지면에서 종전에 다른 지역에서 조사된 유적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원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삼한의 마한지역에서는 54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중국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전북지방에는 15개 정도의 소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 단 하나의 소국도 정확한 위치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조사된 여의동 유적과 종전에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남원 세전리, 김제 청하면 동지산리 원삼국시대의 유적들은 그 소국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원삼국시대의 유적들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이와같은 자료가 충분히 축적된 상태에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된다면, 전북지방의 원삼국시대에 대한 실체가 다소나마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조들이 남겨놓은 문화유적을 보존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유적이 자리하는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대부분의 지역이 이미 논과 밭으로 개간되었거나 아니면 주택단지나 공단지역으로 조성되어 언제나 세심한 주의가 요망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