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0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침체된 우리 영화계의 자존심
「장군의 아들 3」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1-29 15:48:03)
서울 개봉(7월 11일)보다 한달이나 늦어졌지만 「장군의 아들 3」을 보았다. 「장군의 아들 3」역시 「결혼이야기」, 「하얀 전쟁」처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이다. 말할 나위없이 흐뭇하고 대견한 일이다.
아다시피 「장군의 아들」은 ’90년 개봉된 1편이 68만명으로 우리영화사상 최고의 관객동원을 기록한 바 있다. ’91년 개봉된 2편 역시 35만명으로 그 해 최다관객 동원의 우리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일각에서 3편까지는 합이 2백 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호언이 대단하다.
지금도 서울에서 상영중이고 지방 여러 곳도 속속 개봉하고 있으니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관객동원으로 보면 「장군의 아들」시리즈는 굉장한 우리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대단한 우리 영화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노상 그랬듯 이번 역시 세계적 관심을 끈 「원초적 본능」, 「연인」이나 물량대작의 외화와 맞붙어 거둔 성과라 그 의미와 가치가 깊고 크리라 생각된다. 최근의 외화「사랑과 영혼」, 「늑대와 춤을」들에 비하면 분하게도 새 발의 피지만 우리영화의 자존심을 그나마 세워준 셈이다.
우리영화가 침체를 벗어나려면 「장군의 아들」을 하나의 모델로 삼아 분석 연구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아울러 해보게 된다.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몰려든 관객들은 남녀 막론하고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음을 염두에 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장군의 아들 3」은 2편에 이어지는 서사구조로 짜여있다. 즉 일경에서 쫓기는 김두한(박상민)이 원산․봉천 등지에서 좌충우돌하다 종로로 다시 돌아와 한바탕 활극을 펼치는 것이다. 정리하면 김두한의 좌절과 방랑, 그리고 재기라고 할 수 있다.
내용적 특징이 있다면 유랑극단 가수 장은실(오연수)과의 사랑이 제법 강도높게 그려진 점이다. 로맨스의 보강인 셈인데, 이는 시리즈 완결편으로 알려진 「장군의 아들 3」의 전체적 특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오락적 요소가 한층 강화된 것이다.
무대를 만주까지 넓힌 것도 3편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원산을 거쳐 만주․봉천에 도착하여 마적단과 벌이는 한바탕의 액션은 조건없이 이 생더위를 잊게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민족의 김두한’이기 때문 뭔가 호쾌한 정서가 따르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1940년대 초엽의 봉천과 종로거리를 벽제 오픈세트에서 박진감 넘치도록 재현했으며 중국어․일본어의 대사자막을 구사하여 영화의 완성도에 접근하려는 진지한 자세를 보여 주기도 했다. 까닭없이 상영시간만 길어 지루하게 느껴지는 무릇 다른 영화에 비하면 약 100분의 상영시간도 적절했다.
타이틀롤 박상민이나 김동회역의 이일재, 하야시역의 신현준 등 조연들의 표정과 액션연기 역시 1․2편에 비해 다를 바 없었다. 특히 3편에 새로 가세한 오연수의 키스씬에 들어갈때의 입술연기는 그가 타고난 ‘끼’의 연기자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군의 아들 3」은 전편의 수준에 못미치는 듯하다. 만약 전편들처럼 관객동원에 성공하게 된다면, 심하게 말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뭐니뭐니해도 대리체험할 ‘민족적 카타르시스’가 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2편에서도 아쉬운 점으로 지적했지만 김두한을 시대상황과 밀접한 민족의 ‘어깨’로 그려내지 않고 일개 깡패로 보이게 한 것이 그것이다. 1․2편에 식상한 관객들을 위한 새로운 시도로 보이긴 하지만 로맨스의 강화가 그런 혐의를 떠안게 된다.
서울에 돌아온 김두한은 뿔뿔이 흩어진 부하들을 규합하여 다시 종로를 누비지만, 그러나 서사구조의 인과관계엔 장은실과의 사랑이 무게있게 실려있다. 하야시 패거리에게 부하들을 잃고 성난 사자처럼 돌진, 마침내 그를 죽이는 (죽지않는 것으로 처리되지만) 김두한의 행동반경이 장은실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이제 한맺힌 민족의 억눌림을 위해 포효하는 주먹과 거기에 따르는 어떤 대리만족 같은 정서를 관객들이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전편의 프리미엄도 있는데 사랑에 눈 먼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로서의 김두한으로 굳이 윤색할 필요가 있었는지 매우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주관객층이 10대부터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인 점을 감안해보면 오락적 요소의 강화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데, 구체적으로 만나보자. 우선 장은실과의 정사씬을 들 수 있다. 실연(實演)의 진한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성희(性戱)로 비롯된 여자의 규칙적인 신음소리를 두 번씩 화면에 꽉 채움으로써 엉뚱하게도 ‘역시 김두한’ 임을 유도하고 있다.
토라져 나간 장은실을 뒤쫓아 나온 장면의 김두한도 그런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이미 조형된 이미지 때문인지 그런 대목은 사나이(김두한)에게도 순정은 있구나 하는 찬탄보다 장군의 아들이 아닌 평범한 남자의 모습일 뿐이었다.
한국어와 일본어 발음의 억양도 아쉬운 점이었다. 김두한 등의 한국어억양은 가냘프고 여성적인데 반해 하야시 등의 일본어는 굵직하고 남성적이었다. 배경이 일제 침략기였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습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기에 그 억양도 ‘장군의 아들’ 다웠더라면 더 좋은 뻔 했다.
조금 앞에 말하고 싶었지만 화면 생략이 잦아 마치 옴니버스 영화같은 착각을 갖게 한 것도 「장군의 아들 3」이 드러낸 한계라 아니할 수 없다. 원산→봉천→종로로 이어지는 김두한 행적이 유기되지 않은 가운데 1․2부로 끊어지는 듯한 화면 편집은 마치 가위질 많이 당한 영화처럼 보여 또 다른 아쉬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