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기간 약 6개월 동안 집강소를 통해 농민군들은 사법, 행정 등 국가통치 행위를 수행했다. 집강소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충청도 경상도 그리고 강원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부분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군․현 단위 또는 지역단위로 조직 또는 총괄되어 왔고 대점소에도집강, 그 아래 집강과 접주가 있었음 하부 집강소에는 서기, 성찰, 집사, 동몽의 소임을 주었다. 농민군들은 최후의 중앙정부를 수립하지는 못했으나 집강소를 통해 그들의 개혁의지를 유감 없이 실현 시켰다.
농민전쟁을 수행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농민을 주축으로 한 하층민이었다. 농민군 지도자가 백산에서 출전 격문에 나타나듯 수령방백과 양반토호를 제외한 평민이하 하층민이 그 중심세력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당면문제를 이 조직을 통해 개혁 또는 청산하였다.
먼저 집강소 활동의 주체를 알아 본다.
실제 집강소의 지도부와 접주 들은 농촌지식인으로 중농이하의 경제적 조건을 지니고 있었고 그 하부는 거의 하층민이었다. 집강소 조직 중에 중요한 행동대원인 포사는 포수 출신으로 짜여졌고 동몽은 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 고창의 재인흥낙관부대, 남원의 천인부대는 각기 손화중과 김개남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역졸, 재인, 백정, 노비 그리고 포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일선 행동대원으로 활약했다. 신분으로는 하층민, 경제생활로는 소작농민, 무토(無土)농민이 중심이 되어 양반을 능욕사고 노비주를 타도하고 토호들을 징치했던 것이다. 이런 기록이 있다.
“이르는 곳에 이름난 부자와 사나운 이서들을 수색해서 두들기거나 빼앗았으며 그 나머지
평민은 일체 묻지 않았다“.<오하기문>
이처럼 집강소의 주체는 빈농하층민 이었으므로 잔악한 수령권의 행사는 당연히 변혁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양반에게 모욕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양반의 씨를 말린다고 불알을 까는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지주, 몰락 양반이 전혀 참여치 않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기회주의적 속성으로 때로는 현실개혁의 의지에 따라 그들은 농민군에 협조 또는 참여한 분류들로 단계를 거치면서 늘어났다.
그러면 집강소를 변혁적 개혁은 어떤 내용이었나를 알아본다. 이는 다음의 몇 단계를 거치며 점점 격화되었다.
첫째는 국가적 수탈과 지주적 수탈에 대한 폐정개혁운동이 있었다. 이는 전주화약 당시 주로 3정에 관련되는 사례에 대해 제도대로의 시행을 요구했다. 3정의 문란은 조선후기부터 몇 백년에 걸쳐 부정, 불법, 탈법으로 이루어진 부패의 온상이었다. 이런 것을 최소한 국가 제도의 규정대로 시행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 당시 새로 신설된 전 운영에 관계되는 사항의 시행을 파헤쳐 강한 불만을 나타냈으며 이들이 장리로 원전의 몇 배를 물리는 고리채를 완전히 탕감케 하기도 했다. 농민군이 내놓은 많은 폐정요구는 바로 이런 데에 모아졌다.
둘째는 신분해방운동을 강렬하게 벌였다. 농민군들은 집강소 이전에도 접장이라는 평등한 호칭을 썻는데 집강소 기간에는 이것이 뚜렷이 일상화 되었다. 황현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의 법은 귀천과 노소가 없어서 모두 맞절을 했다. 포사는 포사접장이라 불렸고 어린아이는 동몽접장이라 불렸다. 종과 상전이 모두 입도하면 서로 접장이라 불러 친구와 같았다. 그러하기에 사노, 역인, 무부, 수척 따위 모든 천민들이 즐겨 따랐다.
이처럼 집강소 초기에 이들 천민들이 대개 집강소로 몰려와 그 행동대가 되었다. 이런 속에서 6월11일(음력)에는 조정에서 농민군의 폐정개혁을 검토키 위해 교정청을 설치했고 이어 개화정권이 들어선 뒤6월28일에는 의안이 발표되었다. 이 의안의 17개조 중에 “공사노비의 법은 혁파하고 인신매매를 금한 일”과 “역인, 재인, 백정은 천민의 지위를 면케 할 일”이 들어 있었다. 이 조항은 초기 개화파들의 신분평등정책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광범위한 하층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제의 술책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 조항이 발표되자 노비주들은 크게 반발했고 양반 토호와 상민 천민들 사이에 크게 마찰이 일었다. 특히 노비주들의 강한 반발에 개화정권은 “노비의 세습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이제 노비의 천민들은 제도적인 해방을 쟁취한 마당에서 향촌에서 실제적인 권리를 누리기 위해 투쟁이 나선 것이다. 노비와 천민들은 이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리하여 상전이나 양반에 맞서 이를 현실적으로 확인키 위해 투쟁이 나섰고 집강소는 이를 실현시키는 좋은 매개가 되었다.
6월이후 이런 상황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접장이 모두 천민 노예여서 양반과 사족을 가장 미워했다... 무릇 남의 노비로 적을 따르는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록 적을 따르지 않는 자도 모두 적들에 묶여 상전을 겁주었다. 그리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워 강제로 종량(조비를 양인으로 만드는 것)케 하였다. 혹은 그 주인을 결박해서 주리를 틀고 매질을 하였다. 이에 노비를 둔 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노비문서를 태워 그 화를 풀었다. 순박한 노비들이 더러 태우지 말기를 원했지만 기세가 원체 거세어 노비주들이 두려워졌다. 혹사족 노비주가 노비와 함께 적을 따르는 자들은 서로 접장이라 불러 그 법을 따랐다. 백정, 재인의 붙이가 평민사족과 더불어 맞절을 하자 사람들이 더욱 이를 갈았다.”<오하기문>
이런 기세는 분명히 제도적 해방을 집강소를 통해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지도자들 곧 송화중과 김개남은 이들 하층민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접을 만들어 천인부대를 편성했고 이 부대를 이끈 홍낙관 등은 신분 해방운동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농민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셋째는 민중의 억울한 일을 해결했다. 농민군들은 관아를 접수할 것에 맨 먼저 감옥을 들이쳤다. 동학도로 지목되어 갇힌 자도 있었지만 대개 억울한 송사 모든 조세범, 양반능욕범, 부채범 따위가 대부분이었다. 집강소 기간 동안 이들의 소장을 접수하고 이를 처결했으며 또 기왕의 처벌도 심사하여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풀어 주었다. 이는 수령의 고유 권한이었고 종래 암행어사 또는 감사가 행하는 사항이었다.
넷째는 토지의 분작을 추진했다. 농민군 지도자들은 토지문서를 접수하고 이를 환수하거나 지대의 철폐를 꾀했다. 전주화약 당시 그 폐정개혁의 하나로 ‘토지의 평균분작’을 들었는데 실제 집강소 기간동안 이것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각지에서 노비문서와 함께 토기문서를 탈취하여 소각한 사례들이 잦았다. 더욱이 짧은 기간이어서 이것이 제대로 재분배로까지는 가지 못했으나 지대의 인하와 철폐투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개화파들이 여러 차례 개혁을 표방했으나 이 집강소 기간을 전후로 하여 토지의 재분배는 늘 제외되어 왔으며 일제의 정책에서도 이것은 늘 배제되어 왔다. 다음은 장면 반 침략 항쟁을 위해, 또는 봉건세력의 타도를 위해 이 기간동안 군의 군비 또는 염출이 있었다. 군수전 군수미의 명목으로 돈과 양식을 거두어들이고 말을 수색에 사용했다. 이들은 화약과 옷감을 만들거나 확보했고 무기의 조작법을 익혔다. 이해 7월들어 전봉준과 전라감사와의 밀약에 의해 수집한 모든 군기를 각 고울 군기과로 수합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로 성과가 없자, 8월6일 전봉준과 다시 이의 실현을 위해 김학진은 각읍에 공문을 보냈다.
“근래 무뢰잡배의 행동을 금지하는 일로 전봉준 등의 말에 따라 이에 감결을 보내 거듭 신칙 하였거니와 연이어 몇몇 고을의 보고를 보니 이 무리들이 전곡을 토색 하고 멋대로 노략질하는 것이 열읍에 가득하여 폐단이 더울 심하다.”<오하기문>
그리고 고울 수령과 집강소가 협력하여 이를 막고 무기를 수합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전봉준도 집강소에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냈다.
“지금 우리의 거사는 오로지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자는 것인데 저 교활하고 불량한 무리들이 멋대로 날뛰며 평민을 침학해서 마을이 피폐하게 되었다. 하찮은 혐의나 작은 허물이라도 꼭 보고하라. 이들은 덕을 배반하고 선을 해치는 무리이니 각 읍의 집강들은 밝게 살펴 금단하라.”
그리고 추후에 이미 거두어들인 포창, 검마는 공납에 속하게 하고 역마와 장사꾼의 말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포마를 거두어들이는 일과 전곡을 토색 하는 일은 일체로 금하고 묘를 파헤치거나 사채를 봉납 하는 것 등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막는다는 따위를 지시했다.
이는 세가지 의미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무뢰배들의 토색질을 막고 민심을 얻는 일, 둘째 각기 접주들의 횡행을 막아 집강소에 명령계통과 기율을 세우는 일, 셋째는 관민이 다음 봉기에 대비, 효율적으로 동원체제를 만드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이제 8월에 들어서는 새로운 수습을 도모하는 감학진을 동민군 편으로 끌여 들여 2차 봉기를 준비했다.
이 집강소 활동은 해방구의 통치행위였고 내정에 있어서 점령지 정책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