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황씨가 쓴「판소리 역사」에는 이동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대목이 있다. ‘사내답게 후리후리한 키에 건장한 몸집, 흠이나 거친 데가 없이 매끈하게 빠진 이목구비, 늠름하고 대가 바르면서도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 점잖고 엄숙하면서 친밀감을 주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비한 매력, 어떤 옷을 입든지 몸에 어울리고 멋과 귀태가 넘쳐흐르는 자태는 보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거기다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고 일컬을 만큼 선척적으로 타고난 맑고 아름다운 성음으로 구성(아마 ’목구성‘인 듯), 발림, 너름새의 삼합이 조화되어 듣는 사람의 넋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동백이 외양과 내면, 그리고 소리 기량을 통해 얼마나 낳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인지, 대강이나마 짐작을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동백이 사진을 통해, 이동백의 길고 많고 허연 수염을 퍽 인상 깊게 생각하고 있다. 위엄과 인자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수염 말이다.
이동백은 이른바 5명창 중에서도 가장 장수하여, 늦게까지 생존한 사람이다. 1867년에 태어나서, 1950년 경기도 평택에서 죽었으니, 그는 84세까지 장수한 사람이다. 그가 명창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 26세 때였다 하니, 반세기 이상을 명창으로 활동했고, 또 줄곧 최고 명창의 지위를 누렸다. 일제시대 일류 대우를 받은 사람은 이동백과 송만갑이었다. 당시 정정렬같은 이는 2급대우를 받았으니, 이동백에 대한 인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게다가 이동백은 소리꾼으로서는 가장 높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첩을 받은 사람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남도적 감성으로 들어보면, 이동백이 소리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이해가 잘 안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판소리 청중의 감성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소리였던 모양이다.
이동백은 1867년 충남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에서 출생하였다. 충남 서천이면 장항 부근이니 전라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군산을 자주 다니고, 텔레비전도 전주의 것을 보며 라디오도 전북지역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듣는다. 이 마을에는 지금도 이동백의 생가가 남아있다. 동네 앞 족에 위치한 이 집은 괘 넓은 마당과 당시로서는 상당히 컸을 몸채를 지니고 있어서, 이동백이 궁핍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동백은 8살때 서당에 들어가 13세 때까지 한문 공부를 하였으나,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소리에만 흥미를 느껴, 중고제 명창 김정근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김정근은 중고제 소리의 시조라고 하는 천재 요절 명창 김성옥의 아들이며, 5명창 중의 한 사람인 김창룡의 아버지로, 아버지인 김성옥이 창안한 진양조 장단을 완성하고,<무숙이 타령>을 잘 불렀다고 한다. 김정근은 장항으로 이사해서 살다 죽었는데, 이동백이 김정근을 찾은 것은 김정근이 장항에 살던 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동백이 김정근에게 배운 기간은 별로 길지 않았던 듯하다. 곧 김세종을 찾아가 배운다. 김세종은 신재효 당년에 신재효의 사랑에서 소리 사범 노릇을 한 동편제 명창이다. 전북 순창 출신이며, 신재효의 이론을 실천한 사람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김세종이 <춘향가>는 김찬업, 정응민을 거쳐 정권진․성창순․성우향․조상현 등에게 이어졌다.
이동백은 또 이날치에게도 배웠다. 이날치는 담양군 수북면 출신으로 서편제의 시조인 박유전의 제자이다. 본래 줄타기의 명수였으나, 소리를 배우고자 박만순의 수종 고수 노릇까지 한 사람이다. 이날치의 소리는 현재 광주 일원에 퍼져 있는데, 서편제적인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소리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이동백을 이른바 중고제․동편제․서편제 등의 소리를 모두 다 배웠다고 생각된다. 사실 대 명창 치고 많은 선생으로부터 다양한 소리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다. 많은 사람에게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기교를 배운다는 뜻이다. 판소리는 음을 꺾거나 떠는 독특한 방법으로 기교를 부리며, 그 기교에 따라 개인이 소리 특성이 드러나고, 또 그 기교에 따라 평가되는 측면이 강한 예술이다. 그러므로 많은 선생들로부터 다양한 발성기교를 배우는 일은 대 명창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 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흔희 이동백을 가리켜 중고제의 명창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동백의 소리는 동편이니 서편이니 하는 남도 소리와 차별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감창룡이 남도 소리와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는데 반해서, 이동백의 소리는 남도 소리와 매우 유사하다. 그 이유는 바로 이동백이 남도 소리를 많이 배워 익힌 대문이다.
20세 전후해서 수업과정을 마친 이동백을 이후 독공 과정에 들어간다. 독공이란 판소리 수업을 어지간히 한 사람이, 깊은 산 속이나 절간 등 조용한 곳을 찾아 혼자 집중적인 훌련을 쌓는 것을 말한다. 명창들은 대체로 이러한 독공 과정을 통해 자기 나름의 독특한 소리를 완성해 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독공 과정이란 전승 받은 소리를 연마하고, 거기에 자기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동백이 독공을 했다는 곳은 자리 고향 뒷산인 흐리산 꼭대기 부근에 있는 용굴이라는 굴과, 진주의 이곡사(里谷寺)라는 절이었다고 한다. 작년 봄 필자가 이동백의 고향인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를 찾았을 때 는 마침 어렸을 때 이동백의 얘기를 많이 들어서 알고 있다는 80세 된 노인을 만날 수 있었다. 서울로 이사하여 살다가 이제 인생의 마지막을 고향에 와서 보내고 있던 그 노인은 연세에 비해 훨씬 정정하였다. 그래서 그 노인의 안내로 흐리산 용굴을 찾아나섰다. 어렸을 때는 늘 다니던 곳이었다는데도 오랜 세월이 흘러 기억의 희미해져 버렸기 때문에, 그곳을 찾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결렸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용굴은 굴 이라기 보다는 쭈그리고 앉아야 겨우 비나 피할 수 있을 듯한 곳이었다. 굴 안쪽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는데, 옛적에는 이 샘이 깊어 서해 바다에까지 이른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비도 피할 수 있고, 목도 축일 수 있고, 더구나 남쪽으로 탁 트인 곳이어서 서천 벌을 내려다보며 소리 연습도 할 만한 곳이거니 싶었다.
흐리산과 이곡사에서 5년여의 독공을 마친 이동백은 26세 때 창원 부사 앞에서 <새타령>을 불러 단번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 <새타령>은 박유전→이날치→이동백으로 이어진 것으로, 민요이다. 이동백은 판소리 곳곳에 자신의 장기인 이 <새타령>을 끼워 넣어 불렀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새타령>은 마치 이동백의 등록상표처럼 되어 버렸다. 이 <새타령>은 일제시대 취입한 것을 최근 신나라 레코드에서 복각해서 출판한 바 있다. 갑자기 최상성으로 솟구치는 이동백의 트기가 잘 나타나 있는 명곡이다. 어떤 이는 이동백이 구사하는 고음을 가르켜 신기(神技)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우선 고음을 장기로 구사하는 그런 소리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