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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1 | [한상봉의 시골살이]
십일월이 있는 풍경
김유석․시인 (2004-01-29 16:02:21)
1. 흐릿한 것은 아름답다 생생하게 살아오거나 지워져버릴 때까지 깊고 섬세한 뿌리를 여백 속에 감추고 그림자마져 안으로 접어사위 채 윤곽만으로 떠흐르는 묵시의 거리(距離) 그 한끝으로 목발을 짚고 따라흐르는 세월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한 끝을 흔들면 썩은 동아줄처럼 전체가 삭아내리는 물기둥, 내 중심의 추(錘) 늘 삐걱거리며 여담는 세월의 물목에 나는 얼마나 크고 징그러운 물고기를 키우고 있는지 밤마다 강물 위로 내려서 천천히 강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검은 돛배를 찾아서. 1) 다시 이쯤 서있기로 한다. 추수를 끝낸 들판이 모악의 눈썹 밑으로 쓸쓸히 시계를 당기듯, 고여있던 모든 것들이 스스로 바닥을 밀어올리며 저음의 바람소리를 풀 듯. 제 뿌리를 굽어보고 말없이 잎사귀를 떨구는 키큰 나무들과 노을 속으로 제 그림자를 끌고자 그 아득한 벼랑아래로 밀어뜨리는 열매없는 나무들이 지평선처럼 바라다보이는 이쯤,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삶은 늘 우리를 외롭게 하지만, 별이 새는 낡은 지붕에 오래된 문패같은 계절이 걸릴때면 삶에게 익명으로 연애편지를 쓰던 사람들도 덧없는 희망을 더는 표절하지 않으리 더러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오기도 하는 절망을 혼자 수음하지 않으리 먼길 걸어온 낙타의 눈망울에 고이는 우물같은 십일월,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잘 모르지만 날마다 기항지같은 밤이오는 이쯤이 2. 제 살을 안개에게 주며 나의 피는 식는다 안개는 내 갈비뼈의 비밀을 알고 있다 밤이면 강마을의 불빛 깊숙이 빨아마시며 물이 되어 흐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잠결마다 무딘 낚시바늘 하나 꿰어놓는 건너고 싶은 곳 어디든지 나룻배를 걸어둔다. 쌓이고 싶은 곳엔 하류를 보여준다. 조금씩 떠밀려와 쌓이는 곳 쌓여서 썩어가는 수심을 말하지만 하류는 없다 실밥처럼 흩어져 있는 물새발자국, 목선들의 지느러미가 찢어져있는 바다에 이르는 그 곳 절벽 뿐이다. 물소리뿐인 나의 강 (검은 돛배를 찾아서. 2) 강둑에 앉아 노을이 마셔버린 텅 빈 강의 울음을 들을때면 어느덧 십일월이 와있었고 저물도록 그 소리를 따라 흐르면 강물 끝에 세워지던 절벽이 보였다. 절벽도 천천히 내려가면 길이 될 수 있으므로 끝은 아닌데 그 절벽 밑으로 바다가 보이지 않아 우리는 끝이라고 생각하며 수없이 돌아서곤 하였지만, 강을 건너는 것과 따라 흐르는 일⋯⋯, 건너는 것만이 길이 될 수 있을까 건너간 자는 다만 넓이를 가늠할 수 있을 따름, 패이는 살의 아픔 속에 수십을 두는 강물의 뜻을 알 수 있을까 몇 굽이 물목을 두기도 하고 무릎 길이로 속살 내비쳐 유혹을 하기도 하면서 바다에 다와가는 강물이 왜 끝까지 건너는 길을 내어주지 않고 하류에 모래톱만 보여주는지, 거품같은 수심에 하찮은 피래미들만 기르는지 그리고, 저물녁이면 아스라이 절벽을 내려 우리들을 돌려세우는 것일까. 언덕에 바람든 청무우 몇뿌리 내려두고서 3. 줄거리는 없고 상황만이 하염없이 반전되다 마는 식민지 영화처럼. 목탄으로 그리는 들판, 날아갈 듯 날아가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까지 대신 짐져야하는 무게에 눌려있기 때문이다. 우렁껍질처럼 온기가 식어버린 발자국 몇 켤레 엎질러두고 사람들은 굴뚝에 군불지피러 가고 썰물지듯 들판이 베혀지자 사람과 사람의 마을들이 섬처럼 멀다. 그래도 밤이면 저마다 등대를 켜는 집들, 가만 흔들어보면 장날의 동전처럼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쥔 것 같으나 펴보면 메마른 손금 위에 쭉정이만 떠밀리는 십일월, 여기서부터 벌써 겨울이다. 이제 바람이 들불을 놓고가면 몇은 떠나고 몇몇은 씨감처럼 끝까지 남아 떠나간 자의 어두운 기억이 되리라. 밀물이 실리는 바다 흐릿한 섬들이 밀려오다 닿지않은 거리에 뿌리를 내린다 뜯어버린 소식같은 조개껍질들만 기슭까지 떠밀리고 비늘 반짝이며 물살짓는 목선들은 죽음을 삶의 수평선 위에 나란히 걸쳐놓는다 등대지기는 잠에서 깨어났을까 어둠의 사다리를 타고 달팽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를까 (등대지기는 알고 있다 캄캄한 뱃길보다도 흐릿한 안개가 더 위태롭다는 것을) 자욱히 안개가 낄 때까지 등대는 켜지지 않고 소금기뿐인 흐릿한 밤 회유어(回遊魚)들은 강물을 버리고 바다로 간다 천천히 수문을 내리고 나는 알에서 깨어나는 치어(稚魚)들을 기르며 바다에는 무서운 고래가 산다고 가르친다 그래도 그것들을 무럭무럭 자라 바다로 가고, 다시 강물로 올라와 짜디짠 알을 낳을 때까지 나는 수문을 열어놓은 채 기다린다 (검은 돛배를 찾아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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