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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칼럼·시평 [문화칼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이영호(2004-01-29 16:03:50)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Peace Makers)의 험난한 운명을 말해주는 「살림」이라는 조그만 잡지에 실린 글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열어본다.
헝가리 태생 미국 이민 여성, 마담 쉬윔머 사건은 평화운동을 펼쳐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마담 쉬윔머(Rosika Schwimmer)는 1921년 헝가리에서 도미, 시카고에 정착 후 미국 정부에 시민권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시민권 신청은 거부되었다.
그 연유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무기를 들고 싸우겠다’는 서약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 51세. 1929년의 마담 쉬윔머 시민권 거부 결정은 유명한 판례가 되었다. 당시 그녀는 여권운동 뿐 아니라 평화주의에 대한 국제적 영향력이 큰 강력한 여성이었다. 연방정부의 이러한 결정은 외국의 반전론자에게 시민의 자격을 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사건이 되었다.
마담 쉬윔머는 1926년 시카고 귀화국에 시민권을 신청하였다. 그녀는 미국의 헌법과 법들을 지지하고 방어할 것을 맹세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맹세를 앞두고 시카고의 귀화국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는 “만약 필요하다면, 귀하는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무기를 들고 싸우겠습니까?”라는 질문이었고 쉬윔머는 이러한 질문에 그럴 수 없다고 답하였다. 결국 1927년 10월 재판과정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평화운동에 대한 소신과 양심을 지키려는 뚜렷한 의사를 표명했다.
결국 마담 쉬윔머의 시민권 신청은 거부당했다. 사실은 상급 재판부도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쉬윔머 또래(51세)의 남성들 조차도 지금까지 무기를 들고 싸우도록 요구받지 않았으며 당시의 미국의 어떤 법도 휘윔머에게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고서 그녀의 시민권 신청을 기각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은 시인까지 하였으나 연설가로서 저술가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군복무를 거부하도록 영향을 끼칠 인물이며 평화주의를 고무시키는 자는 시민이 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아래 1929년 5월 쉬윔머의 시민권 신청은 연방대법원으로부터 거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보너스로 받게 되었다. 그녀가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대사직을 떠났음에도―.
그녀는 나머지 생애를 체류 외국인으로 어렵게 살았다. 시민권 거부 이후 저술가로도 강연자로도 유지해갈 수 없었다. 20여년 동안을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쉬윔머의 평화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지난 9월 24일 신문지상에 국방부의 ‘신국방전략’이 알려지고 이러한 국방부의 추진이 그간이 정부가 표명해온 바와는 달리 ‘흡수통일, 미군 계속주둔 전제’ ‘해․공군 2배 증간’(한겨레신문 9월24일자)으로 추진되고 있는가 하면, 24일의 유엔총회 연설에서는 ‘북한 핵 포기하면 군축 협의’가 제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28일 오전에 미국의 부시가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지상 및 해상발사 단거리 핵무기를 일방적으로 해체․폐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는 소식에 접했다. 부시의 핵 폐기 선언 연설에서 ‘유럽과 한국에 배치된 모든 지상발사 전술핵 무기를 미국 본토로 가져와 해체 폐기하고 해상 전술핵 지상의 전술 핵의 대부분을 해체․폐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어서 28일 미 국방부가 배포한 자료에 의하면 ‘주한 미군은 지상 발사 단거리 랜스 미사일 1개 포대, 곡사포부대 4개 대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핵탄두 발사가 가능한 것으로 밝혔다.’ 이것은 미국이 지금까지 밝힌 것 가운데 한국에 전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을 가장 확실하게 시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언급하지 않고 있는 군산, 오산등지의 주한 미공군 보유의 핵폭탄에 대한 깊은 우려를 갖고 있다. 결국 한반도 핵보유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극구 부인해온 입장에서 시인도 부인도 아닌 입장으로, 이제는 철편피처럼 내 놓고 말하게 된 입장이 된 셈이다.
금번 미국의 핵군축선언은 오히려 제3세계의 핵무장에 쐐기를 박고 전체적으로는 새로운 핵군축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부분적 양보를 통해 유일한 핵 강대국으로서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구축의 관철에 그 본래 의도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기에, 부분적 핵 감축은 이뤄지겠지만 전략 핵무기분야에서의 추가감축은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첨단 전자장비(걸프전에서 실험되었을)를 발전시킬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는, 다분히 정략적 조처라는 비난도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한겨레 신문 29일자).
한마디로 핵이 없는 세계, 막대한 군비가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진정한 평화시대의 도래를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핵문제는 남한 배치 핵무기의 철수 발표를 계기로 머지 않은 장래, 더 현실성있는 비핵지대화 논의까지도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 비핵지대화’라는 목표아래 그간의 반핵 평화운동을 생각해 볼 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김세진, 이재호 이들 열사들은 반핵평화의 목소리를 최악의 어두운 시기인86년에 부르짖었다. 자신을 산화하여 한반도의 제단에 꽃으로 피어있다. 오늘 우리들의 반핵 평화운동은 미미하고 그 앞날도 어두운 첩첩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힘을 모아갈 수 있으며 그 꽃이 피어지고 있음을 안다. 생명파괴의 세력을 평화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역사가 이뤄질 것이다. 마담 쉬윔머와 같은 평화에 대한 의지가 모두 이루어 질 수 있다면…
1955년 봄, 뉴욕의 신문들은 민방위 훈련이 6월15일로 예정되었음을 보도했다. 보도에는 경고가 따랐다.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지 않는 사람은 1년간의 구류와 500달러의 벌금형을 받는다고. 이 훈련은 핵전쟁을 가상한 것이었다.
6월15일, 민방위 그 날, 몇몇 사람이 맨하탄의 시청앞 공원으로 모였다. 경보신호가 울리자 그들은 소풍객으로 태연히 공원에 남아있었다. 경찰은 그들을 연행하였다. 그들이 뿌린 전단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이 거짓 대피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 우리는 두려워하는 훈련을 받지 않겠다….” 그들은 24시간 뒤 아무 조건 없이 석방되었다. 1년 뒤 같은 식으로 민방위 훈련이 반복되었고 맨하탄시청 앞 공원시위도 재현되었다. 그들은 5일간 구류를 받았다. 1957년 또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1958년에도 한 명의 여자, 일곱명의 남자가 가상 핵폭발이 뉴욕에서 일어난 시각에 지상에 남아 있었다.
1959년에는 14명이 체포돼 그중 5명이 5일 구류를 살았다. 1960년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 시청 앞 공원에는 1천여명이 모여 있었다. 500명은 공원 안에, 500명은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 경찰이 대피 명령을 하자, 소리 높여 웃어댔다. 그들 중 25명이 체포되어 D5일간의 구류를 선고받았다. 1961년 민방위훈련이 실시되었을 때 시청 앞 군중은 2,000명이었고, 40명이 체포되었다. 시위는 전 뉴욕으로 확산, 경보가 울리자 시민들은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땅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정치가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드디어 뉴욕에서는 민방위 훈련이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 이 운동을 주도 한 사람 역시 비련의 희생자인 도로시 데이라는 늙은 여성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설혹 이 시대가 PAX AMERICANA의 지배아래 있을지라도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 땅의 사람들, 복이 있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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