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1 | [문화칼럼]
이 아이의 성년식을 지켜보고 싶다
- 「문화저널」 창간 5주년을 축하하며 -
문치상․전북일보 광고국장
(2004-01-29 16:05:19)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문화에 대한 따뜻한 인식과 사랑을 바탕으로」 문화 예술의 정보지인 『문화저널』을 발행한다는 소리를 들은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창간 5주년이란다.
무엇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 튼튼한 물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의 여건은 고사하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제작되는 것이기에 더욱 어려움이 컷으리라는 것은 의심 할 바가 없다.
없는집 제사 돌아오듯 시간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으리라. 태어날 때부터 젖이 부족하더니 흔하디 흔한 우유나 이유식은 먹이지 못한 채 엄마가 씹어 넣어주는 쌀뜨물과 여기저기서 도와주는 암죽으로 연명해서 5년.
그래도 그녀석은 잔병치레는 좀 했겠지만 이제는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을만큼 건강하게 자랐다. 남들처럼 유아원이나 유치원을 보내지 않았어도 예의범절이 뚜렷하며 글도 알고 날들과 어울려 졸 줄도 안다.
다섯 살 박이 「문화저널」은 이제 어디다 내 놓아도 자랑스러울만큼 성장했다.
머뭇거림 없이 전북의 자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동학혁명과 판소리 그리고 전북의 문화예술을 현대적 감각에서 재조명하고 접목시켜온 일등공신 『문화저널』을 삽입 할 수 있게 됐다.
너무 어린 나이에 옥동자를 분만하기에 저들이 어떻게 아이를 양육할까 무척이나 걱정을 했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영양분 한줌도 도와주지 않은 처지에 이러쿵 저러쿵 창간 5주년을 축하할 입장도 아니지만 먼 곳에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재미도 만끽 할 수 있었다.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아이의 부모들은 혼신을 다해 꼭 필요한 영양분을 먹였고 그 거름도 그 소유자가 가장 좋은 품질을 대부분 무료로 제공을 했으리라 믿는다.
그러기에 더더욱 튼실한 아이로 커가고 있으며 커가리라 의심치 않는다.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관계치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올바르게 걷고 있는 다섯 살의 「문화저널」은 건강한 모습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는 살아왔다.
그러나 이 아이의 장래가 탄탄대로의 밝음만 있는 건 아니다.
입학도 해야되고 졸업도 해야되며 취업하기까지 너무 험난한 고개가 많다.
오염이 심각한 세태에 살다보니 아플 수도 있다.
그 아이의 부모도 늙음과 함께 한계를 느낀다.
누군가가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그 보호자가 누구여야 하는가?
지금처럼 자기 희생을 감수하는 집단이어야 한다.
그 집단은 어떻게 육성해야 되는가?
우리 모두가 「자랑 할만한 문화예술정보지」라고 평가를 하면서도 그 아이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그 아이를 찾기보다는 찾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우리 고장에 그만큼 자랑스러운 아이가 있다면 너나 모두 동방박사가 예수를 찾아가듯 해야될 것이다. 찾아서 어려운 짐을 덜어줘야 한다.
그 일을 해야 될 사람들이 바로 지방의회 의원들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문화저널』발간 지원 조례(?)라도 만들 용의는 없는지 묻고 싶다.
「이렇게 해 주십시요」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챙겨주는 풍토가 아쉬워서 하는 얘기다.
이 경우는 비단 문화저널에 국한된 건 아니지만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그때서야 「전혀 몰랐다」거나 「누가 문제제기를 해봤느냐」고 따지지 말고 각 분야에 「과연 전북발전에 어떤 부분이 도움이 될 것인지」를 찾아서 제기하는 의원들이 되자는 것이다.
행정당국도 마찬가지다. 「작년에도 이만큼 지원했으니까 올해도 이만큼」「옛날엔 이랬으니까 지금도」「전혀 그런 예가 없어서」등등 도식적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영세민 지원하듯 찔끔찔끔 연명할 만큼의 먹이만을 주니까 그 편안함 때문에 자립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언제까지 어항속의 붕어노릇을 해야되는 것인지? 문예진흥기금이라는 것이 생색내거나 고루 나누어 먹는 이사집 팥죽은 아니지 않는가?
지역문화예술진흥에 보탬이 되려면 집중적인 지원만이 가능하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단지 「욕을 먹지 않겠다」는 안이함 때문에 배분되는 자금이라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기업들이 흔히 얘기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천은 제로에 가깝다.
더더군다나 생색이 크게 나지 않는 문화예술쪽의 지원이란 생각하기조차 거북하다.
몇푼 안되는 돈이지만 체육쪽이나 아니면 불우이웃이나 장학금이라는 명분에 투자를 하면 신문 방송에 이름도 나고 거창한 독지가나 자선가가 된양 대접을 받지만 유독 예술분야의 것은 그만한 댓가가 없다. 그런 사람이 별반 있지도 않지만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신문방송의 기자들조차 대견스런 기사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이왕 체육성금 등을 낸 사람의 명단이 밝혀진다면 당연히 예술분야의 성금 기탁자도 밝혀져야 한다. 물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지만 어디 세상사가 그런가?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고 예술쪽의 사람들도 고마움을 표시 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의 철저한 외면만을 탓하지 말고 그들의 문화예술쪽에 씨앗을 뿌리도록 토양을 가꿀 필요가 있다. 그 건전한 토양을 위해 발버등 치는 곳이 바로 『문화저널』이고 『문화저널』을 통해 우리는 우리 지역의 자랑을 알게 된다.
누가 요구해서도 아닌 전북문화저널사를 꾸민 모든 분들이 의욕과 정열 그리고 진지한 자세로 오늘을 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평화가 그윽한 여러분의 광장에 어설프게 등장한 각설이의 푸념으로 창간 5주년을 축하하면서 그 아이의 성년식까지 만이라도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