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갑오년이 돌아왔다. 올해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2주갑을 맞는 해다. 라고 천지를 뒤흔들던 농민군의 함성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지만 그들이 들었던 ‘밥이 하늘이다’, ‘사람이 하늘이다’의 기치는 1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때 ‘동학난’, ‘동비’라 왜곡됐던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는 1994년 100주년을 거치며 바로잡혔다. 2004년에는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돼 정부차원의 국권수호운동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민간이 중심이 되어 시작됐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오히려 국가지원을 받으며 정체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새로운 연구결과나 신진연구자도 나오지 않고, 각 지역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념사업 역시 지역행사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다시 돌아온 갑오년을 동학농민운동의 의의를 되새기고, 기념사업의 원동력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에 공감대가 높아지고 있다. 132회 마당 수요포럼은 ‘동학농민혁명 2주갑,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주제로 동학농민혁명 연구과 기념사업에 오랫동안 열정을 바쳐온 전문가들을 한 자리에 모셨다. 120년이 지난 오늘날에 동학농민혁명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이고, 이를 대중들과 함께 기릴 기념사업의 과제는 무엇인지 짚어봤다.
일시 | 2013년 1월 23일 목요일 오후 2시
장소 | 한옥마을 카페 ‘공간 봄’ 세미나실
주최 | 사회적기업 마당 - 전북문화저널
사회 | 원도연(원광대 문화콘텐츠전공 교수)
패널 | 문병학(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박준성(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이광재(소설가, 『봉준이 온다) 저자)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원도연 |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두 갑자가 되는 의미 있는 해다. 포럼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 논의할 주제들을 먼저 정리해보겠다. 첫 번째는 2주갑의 의미다. 이 질문은 ‘우리가 왜 다시 동학을 이야기하는가’와 연결된다. 두 번째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이 그동안 어떻게 진행됐고,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를 짚어보려 한다. 특히 100주년 이후 20년 간의 한계와 과제, 성과를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2주갑을 맞은 올해 어떤 과제를 핵심으로 삼아 추진할 것인가를 논의해보려 한다. 먼저 2주갑의 의미를 짚어보자. 2주갑 왜 중요한지, 올해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역사학자이신 박준성 선생님께 먼저 의견을 여쭙고 싶다.
박준성 | 대중들과 역사기행 하고 강의를 하다 보면 느끼는 점이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라고 대중들이 다 기억하고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가리키는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불린 것은 갑오농민전쟁이다. 특히 ‘갑’자라는 이름 자체가 사람들한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굉장히 큰 것 같다. 그래서 평소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올해가 갑오년 2갑자가 되는 해구나 인식할 수 있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에 새겨진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리’란 노랫말처럼 연도와 함께 그 의미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 되지 않을까. 특히 엄혹한 오늘날의 현실과 연관시켜 본다면 좀 더 의미 있는 해가 될 것이다. 즉 갑오라는 이름 자체가 역사를 부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원도연 | 갑오년 이라는 명칭 자체에 일종의 호명 효과가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지금에 와서 왜 다시 동학인가, 우리가 역사 속에 있던 사건들을 재조명하고, 기념하고 하는 의미도 여러 가지 있을 것 같다. 특히 오늘의 현실과 관련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문병학 시인 의견은 어떤가.
문병학 | 기념사업을 하는 사람도, 연구자도 2주갑에 중요한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19세기 전봉준 장군이 살았을 때, 제국주의가 몰려들었고 반외세를 이야기했다. 120년 지난 오늘날의 외세라고 할 수 있는 세계화에 대해서 당시의 농민군과 같은 입장을 가질 수 는 없다. 그렇지만 당시 동학농민혁명의 고민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가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당대에 고정시키거나, 우리나라에 국한시킬 게 아니라 세계의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해야할 시기다.
최근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에도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오늘날 보수세력의 역사 재해석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반면 소위 진보라고 불리는 우리는 19세기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에 대한 현재화에도 더디게 가고 있다. 이 부분을 2주갑을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세계사의 전반적 흐름 속에서 역사적 발전 방향은 어디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위치는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걸 어떻게 계승해야하는지 폭넓게 보자는 것이다.
원도연 | 최근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가장 깊이 있게 고민하고 계시는 이광재 선생님의 생각도 듣고 싶다. 왜 하필 동학에 꽂혀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지, 그 이야기와 맥락이 비슷할 것 같다.
이광재 | 우리가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오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그것으로부터 앞으로 우리가 반복하게 될 현실에 대해 어떤 지혜를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이라 해서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이 현재의 우리에게 같은 무게로 검토해야할 사안은 아니라 여긴 것이다.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어디서부터 어떤 과정으로 시작됐었나,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다. 누군가는 영·정조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개화파와 갑오경장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근대의 시스템을 두드려 부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라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신분제에 칼을 대고, 전 근대적인 정치시스템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현해보고자 하는 움직임, 그 중심에 바로 집강소가 놓여있다.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전국적으로 실현되진 않았지만 집강소는 관과 민이 어떻게 자치정부를 형성하고 국가를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일정한 해법까지도 제시했다.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드문 사례이고 그걸 이끌었던 게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생각이다. 다시 갑오년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을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프랑스가 프랑스혁명을 얼마나 소중한 역사적 문화적 자산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동학농민혁명을 이렇게 방치해두고 어느 시기가 되어서야 한 번씩 돌아보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원도연 | 문병학 시인과 일맥상통한 이야기이면서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문병학 시인은 동학농민혁명의 의의가 우리가 처한 세계적 질서 속에 한국의 과제와 연결 돼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광재 선생님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군의 지향과 과정이 너무 작게 평가되고 있다는 말씀이다. 충분히 동의한다.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을 많은 농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만 여기는 것은 일종의 반란으로 보는 시각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런 희생자의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고자 했던 선구자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그런 시각의 전환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두 갑자를 맞아 많은 사업 준비하고 있을 텐데 그 사업을 준비하는 특별한 목표나 지향점이 있나.
이병규 | 백주년 사업 후 특별법과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명예회복 차원으로 기념재단이 만들어졌다. 희생자와 유가족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전국민적인 인식이 생기도록 전국화하는 문제가 중요할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아까 선생님들이 말씀하신대로 세계적인 정신으로서, 또 미래지향적인 대안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을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 이런 부분들을 가지고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그 흐름을 재단이 이끌어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원도연 | 동학농민혁명이 한국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시기라는 데는 모두 같은 의견이신 것 같다. 저는 동학농민군이 가졌던 사상적 지향점이나 목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광재 선생님은 우리나라 근대의 시발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꼽으셨다.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말씀해달라.
이광재 | 서구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이른바 근대를 농민군들이 지향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토론이 필요한 사안인 것 같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부수려 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걸 보면 그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사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다양한 계층이 참여해, 여러 방면의 요구를 내걸었지만 결국 그 내용들을 정리하면 우리도 정치권력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에 농민들에게 원천적으로 봉쇄돼있었던 정치권력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물론 저항의 의미도 크지만, 그것을 넘어서 우리도 정치개혁의 주체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더 크게 평가해야하지 않을까.
원도연 | 선생님이 말씀하신 관점의 전환은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서구적 근대 프레임으로 바라보면, 그냥 실패한 혁명일 것이다. 근대 사회를 꿈꿨으나 실패했고, 그리고 주장조차 명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들이 가졌던 지향은 어쩌면 한국적 근대, 조선 사람이 가졌던 근대 사회에 대한 자기들 나름의 표상이었다.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운동 2갑자를 맞으며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두고 봐야 한다 생각한다.
문병학 | 저는 그 부분에 상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도 수년 전까지는 동양적 근대를 서구적 근대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말이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다른 측면으로도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사의 흐름에서 봤을 때 우리의 전통, 동학의 역사가 특별한 것인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살펴봐야 한다. 서구의 역사, 조선의 역사 이렇게 떼어놓기 보다는 세계사 안에서 바라보는 게 필요하다.
박준성 | 그 당시 참여해서 싸웠던 사람들의 지향들을 대중적인 차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결국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과 관련이 깊다.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세상, 위아래 따로 없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이런 요구들은 시대와 환경이 달라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서양 혁명의 구호 중에 “빵을 달라. 그리고 장미도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1894년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밥이 하늘이다.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동학농민혁명은 그것이 단순히 요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요구들이 해결된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에 대한 전망까지 내보인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192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농민들이 “밥은 하늘이다. 사람은 하늘이다”를 외친 것이다. 그 말에 깔린 두 가지가 두 갑자를 맞는 오늘에 가장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원도연 | 박준성 선생님이 정확히 지적해주신 것 같다. 동학농민혁명이 가졌던 정신적 지향과 가치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문병학 시인 말씀처럼 서구 근대와 동양 근대를 기계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생각은 서구 근대 사회가 가졌던 평등사상의 핵심과 만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전봉준 장군이나 농민군 지도부 또는 동학의 사상적 지도부가 서구의 계몽사상을 생각하며 이런 주장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군 지도부가 ‘사람은 하늘이다, 밥은 하늘이다’라는 문제들에 전면으로 부각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요구를 명확히 읽고 응답했던 덕분이다. 물론 농민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생존권에 대한 치열한 투쟁이라 할 수 있지만, 시대적 흐름으로 보자면 어느 한 시대 특정 짓는 요소가 있는 거다.
문병학 |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인데 오지영 선생의 『동학사』에는 폐정개혁안에 토지의 평균 분작 요구가 나온다. 판결문이나 다른 연구서적에는 등장하지 않아서 논란은 있지만, 어쨌든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충분히 나올만한 요구였다. 이런 부분들은 오늘날에도 대단히 급진적인 사상이다.
이광재 | 토지 평균분작 요구는 논란이 있는 부분이고 그걸 사실로 단정 짓긴 어렵다. 하지만 그런 문제의식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혁명에 참여했던 주체들이 매우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됐고, 큰 싸움을 하는데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요구를 명문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도연| 동학농민혁명은 기존 계급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원동력이 됐다. 토지 평균분작이 공식입장은 아니었겠지만 농민들 내부에 욕구와 열망은 잠재돼 있었을 것으로 본다. 조선사 500년 역사를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표출돼 있었던 것 같다.
이병규 | 폐정개혁안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실제 지향했던 내용을 완화시키고 보다 많은 농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으로 절충을 해서 나온 것이다. 그런 측면들에 있어서 토지문제도 그랬으리라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얘기하는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동학농민혁명 정신에 있었다. 그것을 현대 트렌드로 표현하자면 사회적 경제의 개념들을 농민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원도연 |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중심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보다 진취적인 의미부여는 상당히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속에는 ‘밥이 하늘이다’라는 생존권에 대한 강렬한 투쟁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하늘이다’ 즉 신분적 평등에 대한 지향성과 열망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로 경제적 평등까지 바라본 것이다.
개인적으로 전봉준 장군은 혁명가로서 대단한 자기 훈련을 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전봉준의 젊은 시절은 주거지가 여기저기로 나오고, 특히 20대의 기록이 거의 없다. 여기 저기 살았다는 언급은 있지만 기록이 명확하지 많았던 것을 보면 여행을 많이 다니던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새로운 사상에 대한 이해와 각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광재 | 대접주가 아니었음에도 농민군 총수가 되었다는 것만 봐도 그가 준비돼있는 지도자, 인정받는 지도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도연 |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보자.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기념사업은 100주년 기념 이후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20년, 100주년 그 이후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고 어떤 성과와 한계가 있었는지 이야기해보자. 박준성 선생님은 전라북도 외 지역에서 기념사업을 보셨으니까 먼저평가해주시면 좋겠다.
박준성 |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고생각한다. 외부의 토론과 관심을 촉발시키고 연구를 심화시킨 부분은 공이지만, 이게 지자체 밥그릇 싸움 식으로 비춰지는 경우가 많은 것은 과다. 성과는 크나 일반인들의 관심을멀게 만든 측면이 있다.
문병학 | 빛과 그림자가 있다. 성과는 크게 두 개다. 첫째는 특별법이고, 두 번째는 백년 만에 그 변혁의 지향점을 현재화 했다는 것이다. 70년대는 동학농민혁명이 금기시 됐고, 80년 민족운동이 성장하면서 현재화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요청됐다. 그러나 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 기념사업이 정치적 흐름과 연결됐다. 100주년을 맞아 각 지역 기념단체가 생겨나게 되고, 지자체에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걸 연구가 뒷받침 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얽이고 설킨 종합세트가 됐다. 기념일 제정을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이다. 이 문제를 짧은 시간에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 결국은 또 다시 동학농민혁명 본질을 통해 새로운 지향을 잡아가야 한다.
이병규 | 저도 그 과정들을 계속 봐왔다. 각각의 주체들이 각자의 생각과 행동을 하고, 또 그게 어떤 시점에 따라 바뀌면서 또 다른 입장이 생성되고, 그 과정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걸 풀기는 해야 하는데 너무나 어렵고 힘겨운 상태다. 반드시 풀기는 해야한다. 하지만 그 사안에 너무 집중돼서 기념사업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면 오히려 전체 기념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관료적 시각에서 보자면 기념일을 정하고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념식을 여는 게 반드시 필요하고 또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꼬여있는 지금의 상황은 해결이 쉽지 않다. 이걸 관료들이나 지역민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게 어려운 과정이다.
원도연 | 이광재 선생님은 기념사업 전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 줄 수 있으실 것 같다.
이광재 | 기념일 문제부터 말씀드리면, 이 기념일을 확정하는 문제는 길게 토론하고 길게 관찰하고 그렇게 확정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창과 정읍 갈등도 있긴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지역 혹은 다른 지역의 시민들, 학자들까지 참여하는 그런 기념일 제정으로 승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념일을 제정해서 대통령이 참석하고 축사나 한 번 하고 가는 식의 관제화는 사실 별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논의를 모아가는 과정을 공개하고, 많은 국민들이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해나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프랑스 혁명도 오랜 토론과 논의를 거쳐 몇 번이나 뒤집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정됐다. 백주년이 경과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학술적인 신원은 어느 정도 이뤄졌다. 거기에 많은 역사학자들의 공있고, 그게 백주년을 경과하면서 가장 큰 성과였다고 생각한다. 한계를 말하자면 역사적 사실을 사실 그 자체로만 해석하는 일을 넘어서야 한다. 문화적으로 다시 해석하고 전파하는 일들이 진행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도연 | 같은 의견이다. 특별법 제정, 명예회복, 그리고 학술적 연구의 진전, 이런 게 20년 성과이지만, 동시에 거기에 멈춰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술연구도 10여전부터 뚝 떨어져서 새로운 신진연구자가 안 나온다.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다 끝나서 안 나오는 건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학계에서 새로운 의제를 자꾸 던
져줘야 하는데 그걸 못 던져 주고 그 안에만 갇혀있으니까 기념사업이 그 것에도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새로운 학설, 논쟁, 연구자들이 선구적으로 나서주면서 논의가 따라가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기념일 제정이 기념사업의 최대 과제처럼 비춰지고 있다. 답답한 심정이다.
박준성 | 100주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농민혁명 자체에 대한 연구들도 그렇지만 그걸 바탕으로 전개됐던 밑으로부터의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들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진행됐던 민족해방운동,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 그리고 해방 이후의 10월 인민항쟁까지 민중들의 근현대사로 묶을 수 있다.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을 보고 프랑스혁명사 3부작을 썼듯이 박헌영은 인민항쟁이 끝나고 갑오전쟁에 대한 글을 썼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을 기반으로 그 이후의 근현대사 흐름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까지 이어져야 하는데, 100주년의 뒷심이 약했는지 그런 연구들이 흐지부지 돼 아쉬움이 남는다.
원도연 | 전공이 역사학은 아니지만, 100주년 기념사업 이후 신진 연구자가 없다. 이이화 선생님 명예박사 초청장 명단을 찾다보니까 100주년사업 때와 그대로더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이 관제화된 영향이 크다. 예를 들면 만석보에 대한 기념사업을 보면 참 답답하다. 그 양성우 시인의 그 긴 시를 새겨서 들판에 놓은 건 너무 기계적인 기념사업이다. 안 하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박준성 | 100주년 기념사업을 마치면서 곳곳에 조형물이 들어섰지 않나. 그 이후 최근 다시 그 증상이 재발하는 형국이다. 대표적인 예가 보은이다. 얘기를 들어봤더니 지자체에서 높이가 높은 조형물을 요구한다는 거다. 그런데 수직적인 조형물은 권위주의식 질서를 상징하지 않나. 동학농민군들의 지향점과도 반대되
는 것이다. 조형물에도 사상적 역사적 기반이 깃들어야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걸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데 참 안타깝다. 이 지역으로 역사기행을 오면 동학농
민혁명기념관을 못 들른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이다. 벽마다 글을 너무 빽빽하게 써놨다. 그걸 다 읽으려면 답사를 진행할 수가 없다. 전시관에는 요약해서 전시하고, 전문은 팸플릿으로 만들어서 더 알고 싶은 사람은 가져가게 할 수도 있지 않나. 복원사업도 그렇고, 조형물도 그렇고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참 많다. 앞으로는 팻말이라도 만들어서 누가 주체가 돼서 누가 만든 복원물, 조형물인지 명기하고 논란이 있거나 비판이 있는 부분도 적어야 한다. 앞으로의 사업에도 반드시 주체와 참관자를 밝혀놓았으면 한다.
이광재 | 중국 단동에 가면 항미원조 기념관이 있다. 중국이 이런 설치나 전시에 아주 뛰어나더라 기회가 되면 재단에서 꼭 그 기념관을 답사해봤으면 한다.
이병규 | 국가 시스템 안에 유적지를 보존하고 관리가 포함되도록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재단에 조사해 파악하고 있는 유적지가 3~400개 되지만 전문가가 아니면 터의 위치 등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시군이나 도 문화재로 지정되면 국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지자체에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
이광재 | 현재 유적지에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활용 하고, 미학적으로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조형물 같은 것은 상징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유효하다. 그런 걸 사람도 없는 허허벌판에만 세우지 말고 도시로 좀 끌고 나오면 않되나. 전주만 해도 동학농민혁명에서 굉장히 중요한 도시인데 관련된 조형물조차 없다.
원도연 | 만석보에 가면 들을 봐야 하는데 시비만 바라보게 된다. 진짜 봐야할 것을 가리는 여백 없는 조형물들이 안타깝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어간다.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기념사업에 성과와 한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음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와 기념사업의 핵심과제를 한두 가지 정도 꼽아봤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조금 조심스럽지만 기념일 얘기도 대중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잠깐 이야기 나눠야 할 것 같다. 우선 학술적 과제부터 박준성 선생님이 말씀 해 달라.
박준성 | 지금까지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심화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재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1894년 농민들의 대중 투쟁이 그 이후 근현대 변혁운동 속에 어떻게 내면화 되어 갔을까. 그 앞의 역사 경험이 그 이후 주체들을 주체화시키는데 어떤 역사적 힘으로 작용했을까 하는 게 내 관심사다. 1894년이라는 시공간에 한정될 것이 아니라 그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작업이 더 깊이 검토되고 연구됐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다.
이광재 | 집강소를 통한 농민자치에 대해 집중적인 학술연구가 필요하다. 새로운 정치모델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여러 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좋겠다. 지금 근대 이후로 진행되고 있는 이 정치시스템, 대의제부터도 다방면에서 문제제기가 일어나고 있고, 우리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집강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늘 날에 필요한 교훈들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런 부분을 현실과 맞닿게, 문화적으로 풀어가길 바란다.
원도연 | 저도 두 가지 정도 말씀 드리고 싶다. 하나는 동학에 대한 연구가 분단의 상황에 갇혀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북한의 동학연구를 들여다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남쪽의 연구는 진앙지 중심으로, 사건의 근원인 전라도 지역에서 따져가는 연구를 해왔다. 반면 북한에서는 근대 민족운동의 출발점이라는 맥락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본 측면이 있다. 이런 점이 오늘날 새로운 동학연구에 여러모로 참고가 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사건사의 관점에서 벗어나 통사의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이 있었던 1894년은 민족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한 해였다. 그 해에 갑오개혁이 있었고, 청일전쟁이 있었고 그 결과로 동아시아에 일대 변화가 왔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하고 나서 “나는 개인적 의분으로 이 일은 한 것이
아니요,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했다”라고 말했다. 동양 평화를 위해 이토를 죽였다는 그의 말에서 그 시대의 한국 지식인, 선구자들이 바라봤던 동아시아 질서가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이 추구했던, 선진문명을 바탕으로 무력을 통해 삼국을 지배하려는 발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삼국의 평화와 상생을 기원하는 흐름이 있었고 그 속에 안중근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삼국이 근대에 들어서 가장 먼저 부딪쳤던 계기가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이런 차원에서 한중일 관계 속에서 동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병규 | 그래서 재단에서 국제 학술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말씀하신 그런 주제를 어떻게 잘 설명하고 내용을 채워갈 것인지, 그게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것과 덧붙여서 한가지 더 과제로 제시하고 싶은 게 있다. 그 동안 여러 지역을 직접 찾아다니며 조사하고 느끼는 것이, 그동안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인물들을 가지고 해석해왔는데 이제는 각 지역의 관점에서 지역의 인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역마다 지역의 인물, 그 지역 농민군들이 지향하고 추구했던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그걸 연구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또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을 주변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관군과 유회군의 입장,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지역 유지나 유생들, 그리고 고종이나 대원군 등 정치세력들의 입장에서 해석해볼 필요도 있다.
문병학 | 역사연구는 현재화에 그 의미가 있다. 최근 정치외교사 쪽 논문들을 많이 보는데, 동학에 대한 연구도 그쪽으로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동학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보일지 모르지만 이해와 해석의 층위가 높아질 것이다. 사실로서의 역사연구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다양한 분야로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연구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원도연 | 마무리하는 두 번째 주제로 올해, 그리고 앞으로의 기념사업에 핵심적인 의제를 한두가지 말씀해주시길 바란다.
박준성 | 몇 주년 하는 식의 기념에는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외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어진 계기를 활용하는 건 필요하다. 시기별, 지역별 동학역사기행을 전국 단위로 체계적으로 해봤으면 좋겠다. 마당이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기도 하다. 몇 년을 했는데 혼자 하기는 어렵더라. 기념일과도 관련된 이야기
데 전국의 동학유적지마다 그 지역의 기념일이 있다. 고부는 1월, 남원은 8월 이런 식이다. 계절마다 그 지역에 대한 느낌도 다르지 않겠나. 연구자들은 앉아서 상상만 하니까 그런 감수성이 둔해진다. 그래서 올해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던 시기에 그 지역으로 기행을 진행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성과를 사진집으로 내봤으면 한다.
또 하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노래를 수집했으면 한다. 예전에는 역사기행하면 이런 노래를 배워서 부르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이런 것들을 모아서 시디로 만든다든지 하면 좋겠다. 또 이걸 이어 받아서같이 부를 수 있는 새로 노래를 만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광재 | 특별한 관련은 없지만 제 경험담을 하나 말씀드리겠다. 며칠 전에 상해에 갔다 왔다. 거기에 독서 모임들이 있는데 두어 시간 강연을 했다. 사람들이 입이 떡 벌어지더라. 그랬더니 한국인 학교에서 한번 와서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국내뿐 아니라 재외동포들 중에도 동학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있다는 뜻이다. 기념사업에도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동학농민혁명을 문화적으로 분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뼈대만으로 대중들에게 이해해달라고 바라는 것은 무리다. 여러 형태의 문화로 재탄생해야 된다. 문제는 돈인데, 그런 측면에서 저는 올해 지자체 선거를 통해 정말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분들이 선출되기를 바란다. 지자체 단체장이 돼서 돈 내놓고 자기들 생색내려고만 하지 말고, 이상한 조형물 세우려고 하지 말고, 민간과 함께 스토리텔링하고 의미가 있는 조형물을 만들었으면 한다. 전주 한옥마을에 지난해 몇백만명이 왔다간다고 한다. 주말의 경우에는 동학혁명기념관에 평균 500~1000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이런 분들을 위해 창극이나 오페라를 상시적으로 공연해줘야 하지 않나. 그런 작업들도 진행이 되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올해는 소설을 한번 써볼까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문병학 | 시인으로서, 문학이 백주년 기념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90년대를 지나면서 그 이후를 못 보는 것 같다. 이제 지금까지의 성과를 가지고 치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겠다. 힘닿는데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도연 | 저도 두 가지 말씀드리고 싶다.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작품 중 <천명>이상의 작품은 없는 것 같다. 천명은 동학농민혁명의 스토리 자체를 재미있게 극적으로 보여준 음악극이었다. 지금은 동학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스토리는 스토리대로 보여줘야 하겠지만, 의미를 확장시켜나갈 필요도 있다고 본다. 안중근이나 청일전쟁와 연결 시켜보기도 하고 수준을 달리해서 놓고 보는 확장이 필요하다. 올해 기념사업에 서 꼭 했으면 하는 게 있다. 먼저 원평 구미란 유적지 정비다. 그 야산에 무덤인지 알 수도 없는 상태로, 22년이 지나도록 똑같이 방치돼있다. 들어가는 입구 표지조차 변변치 않다.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얻은 사람들은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영령들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희망 없는 전투에서 절망과 공포 속에 쓰러진 농민군들이 2주갑을 맞은 지금 우리를 보며 “너네 뭐하냐” 하고 말할 것 같다. 또 하나는 북해도에서 모셔온 농민군 유해 안장이다. 지금 전주역사박물관에 수장고에 있는데 고국에 모시
기 위해 가져온 유해를 수장고에 둬서야 되겠나. 이병규 박사께서 갑자라는 게 뭔가를 회복하고,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올해는 꼭 유해를 좋은 곳에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다.
문병학 | 안타깝지만 올해 예산 편성이 안됐다. 도와 김제시와도 이야기가 다 됐는데, 정부에서 예산을 받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올해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원도연 | 재단이 꼭 해야 할 일이지만 재단만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는 백주년 당시처럼 민간이 중심이 되어 그런 운동을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필요한 시기다.
문병학 | 기념재단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현재 재단이 전북 정읍에 와 있지만 전라북도 단체가 아니다. 전국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전체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걸맞은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역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으로서 재단에 꼭 바라는 점이다.
이병규 |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재단 입장이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과제를 말해보자면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이다. 농민군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문화재청을 통해 지금까지의 자료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걸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과정을 통해 기록을 남길 수 있다. 농민군 후손으로부터 신청을 받고 그걸 국가가 기록한다면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재단이 주체가 돼서 추진하길 바란다.
원도연 |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기념일 제정에 대한 의견과 함께 마무리 발언을 부탁드린다.
박준성 | 기념일을 정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좀 벗어나면 좋겠다. 기념일 제정을 통해 역사사건을 국가가 흡수하는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이 결여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기념일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고, 시기별 권역별 역사기행을 통해서 날짜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의미를 부각시키고전국적인 수준으로 기념할 수 있는 방법을 올해를 계기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광재 | 어쨌든 긴 호흡을 가지고 국민들의 반응을 보고 천천히 했으면 한다. 기념일이 제정된다고 빨간 날로 지정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문병학 | 특별법에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하도록 되어있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거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사실 1년 내내 전국적으로 동학 관련 기념일들이 골고루 있으니 1년 내내 각 지역 별로 기념할 수도 있다. 굳이 전국적으로 공통의 날을 못 박아두고 거기에 기념사업의 방점을 둘 필요가 있을까.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이광재 선생님이 말씀한 것처럼 조급하게 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기념사업이 되도록 폭넓은 논의의 과정이 필요하
다.
이병규 | 기념일 제정에 투여되는 에너지나 혼란이 전체 기념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잇다. 때문에 지금은 유보해두었다가 시간과 상황이 바뀌면 논의하면 좋겠다.
원도연 | 플로어의 의견도 듣고 싶다. 오늘 포럼에서 빠진 내용이나 추가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달라.
김은정 | 동학농민혁명이 일반대중들에게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연구자 몫도 있고, 시민운동가의 몫도 있지만, 120주년을 맞는 오늘에는 이것을 어떻게 즐기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걸 생각하다보니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세계의 이름난 혁명들은 대중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가만히 보면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방향을 한쪽으로만 너무 강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백주년 사업 이후 기념사업에 대해 여러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그 기간동안 대중화를 위해 무얼 했나도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까 이광재 선생님이 하신 “분칠하자”는 표현이 자극적이면서도 아주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대해 다양한 형식으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격렬한 토론도 있어야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며 혁명을 뮤지컬로 성공시킨 좋은 예시라고 생각했다. 동학농민혁명으로도 충분히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왜 모를까. 동학 축제도 했으면 좋겠다. 운동의 방식으로 민간에서부터 만들어 갈 수도 있다. 역사를 즐겼으면 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런 고민들을 펼쳐야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다른 나라에서는 혁명을 어떻게 기념하는 지도 살펴봤으면 한다.
원도연 |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두 갑자가 되었지만 과제는 여전하다. 20년 전 백주년 때부터 굉장히 많은 것을 했는데 여전히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현재 국가가 동학농민혁명 기념 사업을 가져가면서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민간의 역할은 오히려 줄어들고 왜곡되기도 한 것 같다. 동학농민혁명이 국가를 바꾸자고 한 거였지 국가에 기대서 하려했던 게 아닌 것처럼 기념사업도 국가의 역할과 민간의 역할을 따로 두어야 하지 않을까. 민간 부분의 자발성, 자율성, 창의성을 살리는 걸 새로운 과제로 설정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동학농민혁명으로 길게는 20년 이상 짧게는 10년 이상씩 성과를 내고 발언해 오신 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에 조금 더 진전된 과제로 만났으면 한다. 올해 모두 자주 만나야 할 것 같다. 장시간 수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