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1 | [문화저널]
남도 황톳길 달려 만난 환상의 섬
- 전남 보길도를 다녀와서 -
장교철․순창고 교사
(2004-01-29 16:07:26)
목적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가을. 그것도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속으로가 아니라 온 하늘이 푸르게 뒤덮여 있고, 속곳을 살살 파고드는 바람이 이는 날, 으악새가 ‘높은 음자리표’마냥 오르내리는 날이 제격이다. 물론 ‘단풍잎이 추억처럼 지는 산사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싶은 산’이든, ‘고단한 하루가 누워있는 바다’든 상관치 않겠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라면 파시에서 오는 몸살을 살살 어루만져 줄 바다가 좋을 듯 하다.
바다라고 해서 육지에 기대고 있는 바다보다는, 홀로 서있는, 가급적 뭍하고는 아득히 멀어진 바다속의 섬이면 좋을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금방 가을이 피어 오르고, 일상의 찌꺼기를 봄눈 녹이는 햇살 같이 녹여주는 곳. 일단 들어갔다가 때 되어 나오면 내 몸과 머리에서 정서가 마구 묻어 나올 수 있는 곳. 이름하여 보길도!
아이들과 나랏말을 같이 한 지 10년. 일년에 한 번씩은 ‘지국총 지국총 어와’를 가르쳐야 하는 나는 그동안 얼마나 머릿속으로 그리워하고 애달와 했던가. 고산의 격있는 풍류가 부러움과 그리움으로 떠올라 있는 그 곳을 나는 소문만 읽고 아이들에겐 마치 내가 그곳을 다녀온 양 뻐기던 것이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는 곳. 누군가가 보길도를 “섬이 아니라 나의 관념이요. 수백년 전의 시절을 초월한 노스텔지어로 떠있는 곳”이라 했던가.
나는 떠난다. 가을이 커텐을 열어 제끼던 9월에 그곳을 가기위해 학교수업까지 변칙으로 끝내고 11시에 전주로 간다. 갈 차는 한 대. 15일전에 예약이 끝났지만 부득이 한 분들을 위해 10여명 더 추가했으니 늦게오시면 자리가 없을 거라는 주최측의 은근한 협박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 정각 오후 한 시에 떠나니 시간에 착오가 없도록 당부하는 말도 기억하면서.
쾌청한 하늘, 차창밖에 갈대를 마구 간질이는 바람, 나른한 오후 시간의 찻속. 막힘없이 달리는 호남고속도로. 비아 인터체인지에 와서야 각자 소개가 끝난다. 나만 낯선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같이 온 사람들이 대부분 초행이란다. ‘신선한 사람’들이 모인 듯 하다. 모두가 ‘먹물’을 먹은 탓인지 자기 소개도 천차만별이다. 독특하다. 자기표현의 개성이 뛰어나다. 그래, 많이 다녀봐야 입놀림도 성장하는 거야. 아무리 훑어봐도 여자분들이 득세다. 간간이 산엘 가지만, 그곳에도 여자들의 침입은 맹렬적이다. 2천년대에 가면 다시 모계사회로 돌아간다는데 그 징후가 이런 곳에도 나타나는 것이 아닌지. 어찌 여자가 홀홀 단신으로 그 먼곳에 까지 가서 외박을 할 수 있을까. 집에서는 허락을 했을까, 아니면 집에서 포기한 사람들일까. 몇 분 식솔들을 모조리 모시고 와버린 완벽파도 있었지만. 이런 근심을 아니할 수 없는 걸 보면 나도 어느새 노인네가 돼가는 것 같다. 아니야, 그윽한 정취에 아득해질 보길도는 이들의 탈선도 허락할테지. 그러나 가장 큰 힘은 역시 백제기행의 가장 큰 신뢰임이 분명하다.
버스는 송정역에서 목빠지게 기다리던 심선생과 그 후예들, 그리고 우리의 1박2일간 학습교사가 될 김신중교수를 싣고 영산강을 건너 너른 나주평야를 가로질러 ‘땀절은 삼베옷이 아니면/ 때 묻은 고무신이 아니면/ 갈 수 없는’ 남도 황톳길을 달린다. 언덕인 듯, 들판인 듯 진양조로 이어지는 육자배기 길. 영암에 이르자 김교수의 「어부사시사」 강의가 시작된다. 어느곳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요, 배워야 한다는 것은 당위다. ‘발바닥이 다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 우리의 땅을 밟을 수 밖에 없는 일’이기에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자기발견을 위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야 한다. 열심히 배워야지, 더욱 알아야지.
서산이 해를 자꾸 끌어 당길 즈음 당초 약속했던 5시 배는 떴고, 5시 40분 발 카페리 3호가 기다린다. 상록천연기념물이 보물처럼 빼곡하게 차있는 완도 사람들의 마스코트섬, 주도(珠島)를 뒤로하고 바람이 다소 거친 완도를 떠난다. 뱃고동을 한 번 올리며 배는 간다. 모두가 물결만큼 설레임. 삼삼오오 둘러앉아 지는 석양을 보며 맥주를 나누며 이제는 서로가 낯선 이가 아니라 동지로서 만남이 시작되는가 보다. 뱃길로 15분쯤 지나자 울모래가 4킬로미터나 길게 누워있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아스라이 보인다. 넙도, 구도, 행간도를 지날 무렵, 아름다운 노을은 정열의 유령처럼 사라지고 어느새, 좌․우 섬들은 먹빛 괴물처럼 바다위에 버티고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물길을 달려 온 배가 보길도 청별리 부두에 닿을 무렵 사방은 어딘지 분간못할 어둠이다. 이름도 아름다운 갈꽃섬의 저녁불빛을 등뒤로 받으며 이제 내가 애타게 기다리던 현실이 왔구나. 동경과 설레임.
보길도 영광의 오할은 자연이 주는 은혜요, 나머지는 윤선도의 몫이란다. 물론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지만, 이곳을 세상에 가장 먼저 전하고, 가장 아름답게 단장하여 천혜의 조건을 어떻게 누릴 수 있었는지를 알았던 고산을 만나러 간다. 인물을 만나러 간다.
바다가 보이는 선착장 부근에서 여장을 풀 줄 알았는데 산길로 한없이 간다. 인가도 보이지 않는 길을 간다. 등불하나 더듬더듬 가는 길에 전령처럼 우리 앞길을 비춰주는 반딧불. 육지에선 이미 전설처럼 아득해진 물체를 오랜만에 보다니. 꼬마들의 탄성이 요란하다.
7시 30분, 우리의 숙소, "백록당"에 도착했을 땐 모두가 굶주림에 지친 상태. 8개조로 편성된 각 조는 주 부식을 배급받기에 혈안이다. 모두 생소한 사람이다. 내 조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형식일까, 호명된 우리 조는 완전히 노인네들끼리만 묶어놨지 않은가. 나이순으로 조를 짰나? 그러나 생활의 연륜은 이곳에서 나타나는 법. 준비물이 부족한게 없는 우리 조가 다른 조의 부러움과 시셈을 한 몸에 받고, 이번 기행에서 가장 화기애애한 조였음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일곱 명의 우리 동지들의 가정에 안녕을 빈다.
9시 30분. 저녁을 끝내자마자 마당에서 본격적인 이론 수업. 우리 백제기행을 빛내주시기 위해 공사다망 하심에도 불구하고 먼길을 와주신 김교수의 <고산의 생애와 문학> 강의가 시작된다.
고산은 1587년 서울 종로구 연화방에서 출생. 해남 윤씨의 시조 존부로 부터 16세손. 고산은 유심(惟深)의 아들이지만 숙부인 유기(惟幾)가 아들이 없어 그의 양자로 간다. 결국 어초는 윤효정이래 명문으로 알려진 사대부 집안의 종가후손으로 자라게 된다. 26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가지만 광해군에 아첨하여 권세를 부리던 북인 이의첨, 영의정 박승종 등의 횡포를 낱낱이 고발하는 상소를 올려 결과는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다시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 되어 6년간의 힘든 생활을 한다. 이 때의 어려움이 ‘견회요, 우호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영어의 생활에서 벗어나 “벼슬도 싫다. 명예도 싫다”하며 향리인 해남으로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42세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어 이때부터 입신양명의 꿈은 시작된다. 그러나, 1634년 서인의 압력으로 성주현감으로 좌천되어 49세 겨울에 벼슬을 버리고 다시 해남으로 온다. 1634년 청나라 군사가 한양에 입성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 애국의 정이 두터운 고산은 수군을 거느리고 강화도에 이르렀으며 인조는 이미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릴없이 돌아와 앞으로 남은 생을 탐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내려가던 중 이곳의 동백과 기암을 놓칠리 없는 고산은 가족과 노복 2백여명을 데리고 부용동에 들어와 은거의 보금자리를 틀게된다. 고산은 52세에 다시 벼슬을 받았지만 왕(인조)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덕으로 귀양. 효종이 즉위하여 승지의 벼슬을 내렸지만 서인들에게 몰려 다시 삼수로 유배를 간다. 78세에 다시 보길도에 와서 은거하다가 85세로 생을 마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지은 어부사시사 40수와 한시 32편은 오늘날 국문학사의 금자탑으로 남아 있다.
분명 섬인데 섬같지 않은 부용동의 밤은 깊어가고 하늘엔 별이 총총. 가을밤 찬이슬은 평상에 소록소록 쌓이고, 몇몇은 덧옷을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면서도 고산 선생의 가계(家系)에 서부터 당시 유학자들의 삶, 고산의 다른 작품과의 연계성,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의 인생관 대비 등 날이 새도록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김교수의 해박한 지식과 막힘없는 달변에 모두가 넋을 논다.
7년 대한 가뭄날의 빗발같이 반가운 지식의 해갈이다. 날이면 날마다 손바닥만한 순창에서 허구 헌날 쓰잘 데 없는 장난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죽였던가.
이어서 현재 보길중학교에 근무하며 30년간 고산 유적지를 관리하고 계신 강종철 선생께서 내일 현지안내를 맡게 됐다며 간단한 소개와 현 보길도의 사정을 소개하는 것을 끝으로 이론은 마무리. 그러나, 꼭 배움만이 아닌 흥을 기다리던 일행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헤아릴 줄 아는 저널측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또 하나의 기획. 이번 기행과 오늘밤의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는 프로그램인 가야금 산조. 전남대 국악과 학생들이 여기까지 왔다. 심선생의 간단한 해설과 함께 40분간 이어진 선율은 적요한 가을밤의 정취를 한층 짙게 드리우고, 귀뚜라미 소리가 백코러스로 받쳐주어 은일한 앙상블을 이룬다. 부용동의 연이파리가 공중에서 춤을 춘다.
서너명만 모여 집 밖에 나가면 고스톱이요, 뽕짝 마이크에 넋을 잃은 우리네 이웃들. 술 속에서 인사불성 질탕 노는 걸 즐거움으로 아는 친구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자정이 가까워지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친교의 시간. 분명 이때부터 술상자 옆에 끼고 세상사 요설로 진짜 동지애를 발휘할 시간인데, 너무나 분위기가 가라앉은 탓인지, 아니면 주무실 방이 부족하다는 비밀이 새나간 탓인지 누울 자리부터 챙기느라고 정신들 없다. 몇몇은 이대로 자기엔 이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느냐며 썰렁한 대청에 모여든다. 강의에서 미진했던 부분의 보충과, 요즈음의 세상사 이야기, 학문의 방향성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새벽 3시가 가까워 온다. 오늘 아침 일출을 염려하며, 잠을 자지 말고 붙이자며 9월 26일을 마감.
일처리 야무진 윤기자와 늘 상냥한 김기자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앙칼지게 “기상, 기상!, 일출보러 갈 사람 빨리 준비하세요!” 5시 30분. 정말로 잠을 잔게 아니었다. 다만 붙였을 뿐이다. 여기서 더 자면 나만 손해. 주섬주섬 챙겨들고 예송리 해수욕장으로 해를 보러 간다. 안개 한 점 없는 쾌청한 새벽. 천연기념물 40호로 지정된 상록수림과 메추리알만한 검은 갯돌이 완만한 반원을 그리며 오리 정도 펼쳐져 있다. 맞은편 복상도가 금방 다가올 듯 떠있고 길게 뻗은 소안도 뒤로 일출 기운이 일렁인다. 벌겋게 달아오른 아침해를 배경으로 무수히 박아대는 사진기. 바닷속으로 길게 박힌 수 만개의 갯돌이 바다에 씻김에서, 파도와 한 몸이 되어 제각기 소리를 내며 바다의 화음을 내고있는 예송리의 아침은 청청하기만 하다. 우리를 실은 버스 기사는 산중턱을 넘자 시동을 끄고, 오른쪽을 보란다. 섬사이 공중에 떠있는 실루엣이 제주도. 좀처럼 볼 수 없는데 우리들 보고 행운이란다.
아침 잠에 취한 식구들이 지금쯤 아침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테지하며 집에 오니 아침은커녕 쌀도 씻어 놓지 않음을 공박하자 치여사님 왈 “도대체 요즈음 젊은 부모는 자격이 있는거야 없는 거야, 뭐 맨날 뜨는 해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자식까지 내팽개치고 자식몰래 자기들만 구경가?” 댑시 화를 낸다. 꼬마들이 아침에 깨어보니 엄마 아빠는 간 데 없으니 난리가 날 수 밖에. 온 집안은 그들의 대성통곡으로 울음바다가 된 상황에서 느닷없는 해장보모 구실하느라고 진땀을 뺀 것. 역시 우리 조는 이번 기행에서 대들보였어.
정신없이 아침을 해치우고 본격적인 현장견학을 위해 일행은 강선생을 따라 동천석실로 간다. 아침해가 떠오르면 산 전체가 붉은 색으로 변한다는 해발 425미터인 격자봉에서 2킬로미터, 낙서재에서 북쭉으로 1킬로미터 쯤 떨어진 해발 100미터 중턱엔 천여평의 암석이 무리져 있다.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초입부터 길이 여러 갈래 길이다보니 길을 잘못들어 헤맨 일행들이 고생이 여간 아니다. 동천석실에 이르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 이어여 있고 아지랑이가 퍼렇게 아른거리며 여러 산봉우리가 첩첩이 벌여 있는 마치 연꽃봉우리가 터져 피어있는 듯한 현상”인 부용동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동천석실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대, 회황교 등이 자라잡고 있다. 45도의 가파른 선록인데 암벽에서 솟아난 석간수를 모아 작은 연못인 석담을 만들고 그 옆에 희황교란 다리를 놓고 석재를 만들어 오르내렸다. 이곳에는 고산이 차를 끓여 마시던 바위도 있다.
부용동 8경중 제 1경인 석실모연(石室暮烟)의 풍광을 고산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석실 부엌에선 차(茶) 끓인 연기이니/ 구림인 듯 무늬져 끼고도네/ 바람에 달려가도 섬돌에 돌아남고/ 달빛에 실려가다 냇물위에 머무네’
그의 거처였던 낙서재에서 음식이나 연락을 취할 때 명주실을 이용하여 끌어 올렸던 오늘날 케이블카 구실을 한 용두레바위, 격자산 산자락과 부용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정자는 간 데 없고 기왓장 부스러기만 흩어져있다. 내년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복원할 계획으로 올해 공사를 착공하기 위해 문공부로부터 8천만원의 예산지원을 약속받았는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란다.
격자봉 서쪽 세 번째 골짜기인 ‘계곡이 심원하고 수석이 기절(奇絶)하여 돌은 마치 옥(玉)이요, 물소리는 영롱한 옥소리’라며 고산이 이곳에서 유상곡수연을 하고 때론 목용을 즐겨했다는 낭음계곡은 5년전 군에서 노화도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보를 만들어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단다. 이때 이곳 주민들은 끈질긴 투쟁을 했지만 결국은 경찰을 동원시킨 가운데 일을 끝냈다며 혀를 끌끌 찬다. 그가 초가로 지었다는 거 낙서재와 마음의 근심을 씻었다는 무민당, 그리고 고산의 아들 학관의 휴식공간이었다는 곡수당, 옆산을 개간하여 남은 흙으로 산을 만들어 집터의 명당을 만들었다는 조산과, 하한대, 혁의대 등은 다음을 약속하며, 백이와 숙제를 그리며 붙였다는 미산을 지나 세연정을 향해 간다.
보길도는 고인돌이나 패총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란 때는 영암군으로 소속되었다가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이곳 사람들은 모조리 육지로 내몰리어 무인도로 남았다가 다시 청나라 오랑캐가 육지에서 갖은 약탈이 심해지자 다시 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는데 이곳 주민들의 가계(家系)는 10대에서 11대부터 시작한단다. 고산은 이용후생에도 밝아 옆 노화도에 60정보의 간척지를 만들고 진도에는 220여 정보의 농토를 개간, 지금도 그곳 주민들은 추수가 끝나면 감사제를 올리고 있다. 한때는 이곳 민, 관이 합세하여 보길도 알리기 운동을 폈으나 이제는 너무 몰려 중단을 했지만 올 여름엔 보길도 인구보다 2배가 많은 만명이 다녀갔단다. 너무 매스컴을 타다보니 일부 지각없는 외지인에게 이곳 땅을 파는 주민이 있어 뜻있는 주민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막고 있다며 나라에서 곧 보길도 일주도로를 낼 계획으로 있어, 그렇게되면 격자봉 뒤 절벽을 훼손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96년부터 소안도와 노화도 그리고 보길도 이 세 섬을 잇는 연륙교를 착공한다니 머지않아 보길도가 어떻게 변할지 두렵기만 하다. 우리네 국토 어느곳이든 이제는 자본이 유입되지 않는 곳이 없다. 불쌍한 우리의 산천. 더 망가지기 전에 더욱 또렷이 봐 둬야지, 확실하게 기억해야지.
이마에 땀이 날 즈음 10시 반에 세연정에 도착. 아! 별천지. 섬속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이곳은 조선 전통조경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운치있는 풍류가 피어났던 한국판 무릉도원. 격자봉에서 발원한 이 물을 받아 그 하류인 이곳에 보를 막아 계담(溪潭)을 만들고 물길을 돌려 만든 인공 연못에 암석을 의지하여 대(臺)를 만든 지혜는 볼수록 경이롭다.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안목 높은 격식으로 꾸며진 이 세연지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에서 이름한 것이다. 이 두 개의 연못,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방형의 축단을 만들어 한 칸의 정자를 지었던 세연정은 사면에다 “낙기루(樂飢樓), 동하각(同何閣), 칠함헌(七岩軒), 호광루(呼光樓) 등의 편액을 써서 걸었다는데 이는 세상사에서 뜻을 두지 말고 즐겁게 지내며 근심을 잊기 위해서라는데 일제때 없애버려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작은 수련이 가을 햇살을 윤기에 더하고 있는 세연지엔 곳곳에 바위가 놓여져있는데 “뛸 듯하고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흑약암, 활을 쏘거나 낚시를 즐겼다는 사투암 등 여러 바위를 모양있게 배열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고 협곡에서 내려오는 급류를 막은 구실도 한다. 낙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제자를 가르치다가 심신이 따분해지면 낭음계에서 목욕하고 이곳에 와서 동자로 하여금 이 연못에 소방(小舫)이라는 배를 띄우고 경옥주를 마시며 그가 지운 어부사시사를 노래하고 흥이 겨워지면 동쪽앞에 방형의 축단을 쌓아논 동대와 서대에서 아릿다운 무희들이 비단옷을 걸치고 서로 상응하며 춤을 추게하여 물속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즐기기도 하다가 때론 가장 솜씨가 뛰어난 무희를 선발하여 단독 리사이틀을 선보이게 하기도 했다는 옥소암이 머리만 내밀고 있다. 어찌보면 지배계급의 호사스럼과 사치에 필부들은 그저 벅찰 뿐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곳은 그의 단순한 여흥을 즐기기위한 장소라기보다는 한문시가가 주류를 이룬 그 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었던 찬연한 감수성의 터가 아니겠는가. 승모사상으로 우리문학이 괄시받고 천대받을 때 일상적인 소재를 깔고 작품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치열한 작가의식을 보여준 고산은 한국의 세익스피어라고 일컬으면 지나친 과찬일까.
또한 그의 과학적 안목도 뛰어났는데, 길이가 11미터, 폭 2.5미터, 높이 1미터 쯤만 석조 조립 돌다리인 굴뚝다리는 활처럼 굽은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이 세연지를 지탱해준 구실을 하고 있다. 판석으로 된 이 다리는 평상시에는 물막이 보와 사람들이 다니는 다리로, 비가 와서 물이 넘칠 땐 인공폭포가 된다. 공간은 지하터널식 수입구를 통해 물이 흐르게 하여 그 울음소리가 세연정 뿐만아니라 그의 거처인 낙서재까지 들리게 했다는데, 누가 그랬는지 지금은 흉측하게 시멘트로 발라놓아 그 기능은 간데 없고 회수담 벽 곳곳에서 물이 새어나와 이 다리의 기능은 볼 수가 없단다. 세연지의 물은 다시 회수담의 수면과 일정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들어가는 물의 수압을 올리고 낙차를 두어 회수담 수면에 물보라가 일어나지 않도록 들어가는 구멍은 5개, 나가는 구멍은 3개, 이른바 오입 삼출구(五入三出口). 입구가 출구보다 30센치미터 쯤 높게 만들어져 있다. 과학적인 안목에 다시 놀랄 수밖에.
이 연못의 바닥이 전부 암반으로 되어 있어 유리처럼 깨끗하여 남쪽 옥소대의 바위가 물에 그대로 비쳤다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 바닥에 토사가 쌓이고 수심도 얕아져 수초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더구나 일제시대, 인근에 현 보길국민학교의 운동장을 만들면서 세연지의 일부가 훼손되어 원형을 잃어 버려 아쉽기만 하다. 고산이 심었다는 고송(孤松) 한 그루만이 아름드리로 자라고 있을 뿐 주변엔 1920년대 일본인들이 심었다는 일본산 왕벚나무등이 우리의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1748년 고산의 5대손 윤위가 쓴 ‘보길도지(甫吉島識)’라는 기행문엔 ‘주변엔 동백나무와 연산흥이 심어져 있고 장송(長松)은 수면을 스치며 단풍나무는 바위를 가리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는데 그간 이곳의 복구가 너무 관심밖의 형식적이고 미봉책에 그치고 있다. 시종일관 진지한 설명을 한 강선생도 정말로 이곳은 현지 주민들의 신빙성 있는 고증과 관계학자들의 적극적인 현장대화가 선행되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11시 30분 강선생님은 12시에 또 다른 분의 약속으로 미진된 부분은 다음을 약속할 수 밖에 없다. 30분간은 각자 기념촬영과 각자 여흥으로 보내고 숙소까지 걸어와서 점심은 라면. 주최측에서 어렵게 구한 짐배로 보길도를 한 바퀴 돌아 물길로 해남 땅끝 마을로 간단다. 당초 스케줄에는 없는 일. 보길도 섬 일주하는데 2시간, 해남까지 1시간.
오후 2시, 우리의 배는 청별리 선착장에서 통통통 30분쯤 돌아나자, 고산과는 정적(政敵)인 서인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피비린내 나는 당쟁에서 패배,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정박. 보길도 동쪽 높은 암벽에 임금을 그리는 시를 적어 놨다는 “송시열 바위”도 먼 발치에서만 보여준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행로. 고산은 자연을 벗하며 천수를 누리다가 갔고 우암은 83세에 제주도 귀양길이었다니 그의 감회는 어떠했을까. 젊어서는 송강과 늙어서는 우암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그는 갔지만 보길도는 말이 없다. 엔진소리에 귀가 멍멍한 우리 일행들도 그저 눈앞에 펼쳐 풍광만 넋을 잃고 볼 뿐 말이 없다. 이곳의 특산물인 해태양식장의 시설물이 바다위에 정연하다. 소형동력선을 타고 작업을 하고 있는 어부들의 모습은 생활이 아니고 한폭의 서정으로 다가온다. 배낭에서 꺼낸 카셋트로 지난 87년 어느 방송국 TV 다큐멘터리 타이틀 곡인 ‘신어부사시사’를 헤드폰으로 크게 듣는다. 애상스런 잔잔한 리듬이 수평선처럼 아득하게 깔리며 파도소리와 갈매기 울음이 뒤를 마무리하는 또다른 소리로 꽉찬다.
멀리 서쪽으로 진도섬이 길게 이어져있고 드디어 갑판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고개를 쳐박고 가을 햇살을 등에 받고 조는 아이, 18톹의 그물망 어선은 토말리 탑을 왼쪽으로 비껴서 5시 30분에 어란진 포구에 닿는다.
당초엔 토말탑을 가기고 되었는데 촉박한 시간으로 곧바로 고산의 고향인 해남읍내로 직행. (해남 읍내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윤고산 유적지’인 녹우단은 작년 7월 제 20회 백제기행때 답사했음) 라면으로 떼운 점심이 지끔까지 있을 리 없는 우리는 반찬부터 집어 넣기가 바쁘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나니 전주서 순창갈 버스를 타는 것은 불가능한 일. 서로가 객지에서 아쉬운 작별이다. 어제만 하더라도 모두가 낯설었던 사람들. 하룻밤을 같이 하면서 정들었던 일행들이 차창속에서 흔들어 주는 이별의 손을 뒤로 하며 광주행 심선생의 승용차에 오른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꿋꿋한 선비로서 확고한 자기 주관으로 자신의 세계를 치열하게 살다간 조선조 지성인의 한 전형이었던 고산. 끝없는 번민과 고통은 유려한 우리 글로 격조높은 미의식을 나타내면 우리 문학의 질과 폭을 승화시킨 절정으로 우리앞에 서 있다.
짧은 기행였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듯한 백제기행. 심선생의 승용차는 아직도 배다. 물결에 흔들리는 내 몸. 서투름과 낯설음 그리고 얄팍함을 정직하게 일깨워준 1박 2일의 청해진 물결속에서 나는 시인인가, 고산인가. ‘인간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욱 둏다’는 그곳이 아직도 생생하게 어른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