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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1 | [문화저널]
‘엄마와 아빠의 사랑’ 처방
서홍관․시인 (2004-01-29 16:10:49)
「인창이」 한 할머니가 다섯 살 된 남자 아이를 데리고 진료실에 찾아 왔다. “애가 자꾸만 배가 아프다고 해요. 머리도 아프다고 하고 밥도 잘 안 먹어요.” “(낮은 목소리로) 애네 부모가 이혼했어요. 엄마가 따로 사는데 가끔 전화도 하고 울면서 인창이 바꿔달라고 하더니 몇 달째 전화도 끊어졌어요.” “그 뒤부터 애가 이상하게 구석에서 무슨 생각을 해요.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멍하니 딴 생각을 해요.” 나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필요한 아이에게 배 아픈데 먹는 양을 처방하다 말로 아이의 무너져 내린 눈망울을 깊이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아이를 만난 곳은 서울 변두리에 개업한 한 선배의 병원에서였다. 레지던트 시절이었는데 일이 바쁜 선배 대신 진료를 해주고 있었다. 다섯 살 된 남자 아이가 할머니와 같이 들어왔다. 애가 배가 자꾸 아프다고 하니 진찰 좀 해달라는 말을 듣고 사무적으로 ‘언제부터 아팠느냐?’ ‘어디가 주로 아프냐?’는 등의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진찰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맹장염은 아니었고 단순한 위장 장애가 분명했다. 이럴 경우 의사들은 장염이라느니, 체했다느니 하면서 간단한 소화제 종류를 투약하고 경과를 관찰해보자고 하는게 통상적인 일이다. 나 또한 그렇게 예정된 순서를 밟아나가려고 하는 참이었는데 제동이 걸렸다. 할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바싹 다가 앉으면서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애가 자꾸 딴 생각을 해요”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딴 생각이라니. 그게 배 아픈 것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런 시시모진 시련을 만나게 되었다. 이미 그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도 생겼던 모양으로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하루가 멀다하고 엄마와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 때려부수고, 싸우는 속에서 아이는 울고 불고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결국 6개월 동안의 부부싸움 끝에 서로 합의 이혼하였다. 인창이는 아빠가 양육하기로 합의하였다. 즉 새 엄마와 같이 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가 친엄마만 찾고 새엄마도 애를 귀찮게 여겨서 도저히 집에서 기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따로 사는 할머니가 기르게 되었다. 친엄마는 따로 살면서 가끔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창이 바꿔달라고 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근데 6개월 전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에게 바싹 다가앉을 필요가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예?”하고 반문하였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나에게 이 아이에게 얽힌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이었다. 인창이는 엄마 아빠 품에서 잘 자라고 있었는데 2년 전부터 아빠가 다른 여자와 사귀면서부터 전화가 뜸해지더니 이젠 아예 전화도 몇 달째 끊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 대목에서 더욱 목소리를 낮추더니 ‘재혼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는 말을 하였다. 근데 문제는 인창이었다. 자꾸 여위고 잔병치레가 잦아졌다. 걸핏하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배가 아프다고 하고 배가 아프다고 하고 과자나 주면 조금 먹고 밥을 거르기가 일쑤였다. 예전에는 텔레비전을 켜 놓았을 때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나오면 좋아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멍하니 딴 생각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고 떼를 쓰니 할머니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안스럽게도, 그런 엄청난 사연을 들으면서야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자를 진료하느라 진료받으러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픈 배를 만지면서 약간 얼굴을 찌푸린채 힘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같이 절망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이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데……. 나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대와 관심을 갖지 못한 듯 아래만 내려보는 푹 꺼진 눈을 보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이런 아픔을 준 어른들은 누구란 말인가! 왜 이 아이는 이런 고통을 스스로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신이 선택할 기회도 없이 모든 것이 박탈된 인생이란 것은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한가. 그날 나는 진료를 하다 말고 한참이나 아이를 보고 있었다. 환자의 처방란에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라고 크게 쓰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할 수 잇는 일이 없듯이 소화제를 처방하고 말았다. 아이와 할머니는 나의 약을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나는 그날 저녁 내동 진료를 하면서 그 아이의 눈망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에도 처음으로 얼굴을 대하는 환자의 수가 십수명에 이르기 때문에 의사면허를 받은 뒤 지금까지 내가 진료한 환자의 수는 대략 수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얼굴이나 이름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지만 몇몇 환자들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잊기 어려운 환자들은 의사로서 큰 실수를 해서 곤욕을 치렀거나, 의사로서 큰 보람을 얻은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창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희망없이 살아가는 아이에게 그저 소화제만 처방해야 했던 기억은 나에게 아픔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들에게 강조해서 말해두고 싶다.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그것이야말로 무책임한 어른들이 벌이는 가장 잔인한 학대의 하나이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인창이는 자꾸만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엄마의 손길과 눈망울을 기억해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서 ‘딴 생각(?)’을 하고 있니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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