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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0 | 연재 [문화와사람]
명창 이동백(2)최동현
최동현(2004-01-29 16:19:03)


이동백이 외양과 인품, 예술에 있어서 극찬을 받는 몇 안 되는 소리꾼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지난번에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무랄 게 없다보니, 이동백은 연인들과의 로맨스도 더러 있었던 사람이었다. 사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창에게 로맨스 한두 가지 없다는 것이 말이 안되긴 하겠지만, 유교적인 윤리 규범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대에 신분적 차이를 뛰어넘은 이동백의 로맨스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당시 민중들의 사회적 요구 까지도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이동백의 첫 번째 로맨스는 그가 공식적으로 데뷔했던 곳인 창원에서 있었다. 이동백이 창원에 머물 때였다. 이동백은 스물 여섯 살에 창원 부사 앞에서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처음 이름을 떨쳤다고 하니, 이동백이 이십 대의 한창때였을 것이다. 어느 날 매파가 찾아와서 <이 진사댁 아씨가 이명창을 한 번 보고 첫눈에 반하여, 저의 집을 찾아와서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니, 같이 가셔야만 하겠습니다.>하고 조르는 것이었다. 이동백은 망설였으나 만일 거절하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더라는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었다. 만나보니 천하의 가인(佳人)이었다. 정혼한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어 청상과부로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동백은 <반상(班常)의 차별이 엄존한데 어쩔 수 없다>고 하였으나, 그 여인은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주면서 이동백을 가장 좋아하는 이참봉을 찾아가 통사정을 하여 허락을 얻어내라는 것이었다. 이동백은 은장도를 들고 이참봉을 찾아가 사정을 말했더니, 이참봉은 창원의 유지들을 움직여 이진사의 승낙을 얻어내 마침내 이동백과 그 여인은 혼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듯하다. 수절하는 청상 과부가 이동백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나, 양반댁 수절과부를 유지들이 움직여 천민이었던 판소리 광대와 혼인시킨다는 것은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다른 명창들에 얽힌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동백의 잘 생긴 용모와 뛰어난 예술이 빚어낸 한 신화(神話)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양반댁 수절과부가 정신을 빼앗길 정도로 이동백이 멋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당시의 윤리 규범을 깨뜨리면서 까지 이동백과 그 여인과의 혼인을 성사시켜줄 정도로 이동백이 사랑 받는 명창이었다는 사실을 간취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동백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는 한 여인을 두고 중고제 명창 김창룡의 동생 김창진과 맺은 삼각 관계에 관한 것이다. 김창진은 현존 명창 박동진의 스승이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김창진이 더 전면에 부각되어 있기 때문에, 이동백의 로맨스라기 보다는 김창진의 로맨스라 할 만하다.
장안에 이동백과 가까이 지내던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연인이 김창진의 소리를 듣고는 김창진에게 반해 이동백을 배반해 버리고 말았다. 화가 난 이동백을 이후 김창진을 지독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상대도 하지 않고, 소리하는 무대에 끼워주지도 않았다. 김창진은 그 여인이 이동백의 연인인 줄도 모르고 그 연인과 관계를 맺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선배이자 대명창인 이동백의 연적(戀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동백이 1867년생이고, 김창진은 1875년 생이므로 나이 차이는 8년밖에 되지 않지만, 이동백은 이십대부터 명성을 얻은 데다가, 소리꾼으로서는 최고인 정3품 통정대부의 직첩을 받았으니, 김창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김창진의 형 김창룡은 이동백과 어깨를 겨루는 명창이었지만 김창진이 가문의 소리제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쫓겨나다 시피했기 때문에 형 김창룡에게도 김창진은 비호를 받지 못한 것 같다. 이런 저런 일이 겹쳐 김창진은 실력에 비해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일생을 보내고 말았다. 그의 소리를 담은 유성기판이 단 한 장도 없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불우한 광대였음에 틀림 없다.
일설에 의하면, 김창진이 아편중독자였기 때문에 형 김창룡에게도 미움을 받았고 또 제대로 활동도 못했었다고 한다.
하여간에 어느 땐가 전주에서 명창대회가 열려 김창진도 이동백과 함께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관에 들어 바로 옆방에 나란히 이동백과 김창진이 묵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마다 목을 푸는데, 김창진은 자신의 최고 장기인<범피중류>(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로 실려 가는 대목과 수궁가 중토끼라 자라 등에 업혀 수궁으로 들어가는 대목을 배루는데, 아주 느린 진양조 장단이 사용된다)를 최대한 늘여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옆방 문이 열리더니 이동백이 나타나, <너 참 소리 잘 한다. 내 이제 너를 용서하마>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느릿느릿 부르는 김창진의 <범피중류>에 감동한 이동백이 개인적인 원한을 풀어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론 김창진이ㅡ 소리 기량이 뛰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그러나 또 동시에 이동백의 판소리 예술에 대한 깊고깊은 애정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동백은 1939년 3월 공식적으로 은퇴하였으나, 해방 후에도 잠깐씩은 무대에 선 듯하다. 이동백이 죽기 직전(이동백은 1950년에 죽었으므로, 아마 해방직후인 듯) 이리에서 공연을 할 때였다고 한다. 자신의 장기인 적벽가를 하는데, 웅장&#8228;호방한 우조가 주류를 이루는 앞부분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던 청중들이, 후반에 들어 조조가 호로곡으로 패주하는 슬픈 개면조 대목에 이르자 열광하기 시작하였다. 열광하는 청중들을 바라보던 이동백은, <니기미헐 놈들, 용개목 쓰닝개야 환장들허네그려>하고 혼잣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대체로 판소리는 일제시대 이후 개면조화 되는 추세를 밟아왔다. 따라서 고게(古制) 판소리의 웅장&#8228; 호방한 면이 감소되고, 여성적&#8228; 퇴영적 탄식조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청중들의 감성과 기호에 변화에 따른 것이다. 이동백의 한탄은 바로 이러한 청중들의 기호에 대한 노대가의 우려 섞인 탄식이었을 것이다.
이동백의 소리는 보다 더 우조에 역점을 두는 소리였던 것 같다. 물론 현재 남아 있는 소리였던 것 같다. 물론 현재 남아 있는 음반을 보면, <심청가>의 <심봉사와 심황후 상봉>대목같은 소리는 절규하는 개면조가 일품이지만, 그 대목마저도 탄식조로 흐르지는 않고 있다. 또 이동백이나 김창룡의 특기로 알려진 <적벽가>의 <삼고초려>대목 같은 경우, 웅장&#8228; 호방한 우조적 창법이 일품이다. 이는 소위 중고제 소리라는 것이 양반 지향적 미학을 가진 소리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동백 소리의 특징 중에서 빼 놓을수 없는 것이 즉흥성이다. 곧 연행현장의 상황에 따라 사설과 곡조를 그에 맞게 부르는 특성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보면, 이동백은 부를 때마다 달리 불러서 제자들이 따라 부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혹 제자들이 왜 난 지난번과 틀리게 부르는고 하면, <야 이놈아, 너 그렇게 멍청해서 어디 가르치겠느냐>고 도리어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동백 같은 대명창이야 늘 달리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창조력이 뛰어났겠지만 제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그러한 창조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배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동백은 변변한 제자를 두지 못했다. 제자가 없었으므로 전승이 끊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이동백은 말년에 경기도 평택에서 살았다. 죽기 전에도 날마다 북통을 짊어지고 산에 올라 소리를 했다. 죽기 직전에는 <이제 겨우 소리를 알 만하니 죽을 때가 되었다>고 탄식했다 한다. 한 평생을 판소리에 바치고도, 판소리 예술의 넓고 깊은 세계에 끝내 이르지 못했다는 절망감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동백의 예술 세계가 보잘 것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오히려 높은 예술적 성취에 이르렀으면서도 그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이동백의 구도자적 자세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구도자적 자세야말로 이동백의 예술 세계를 지탱해준 한 중요한 동인(動人)이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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