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1 | [특집]
지역소극장 운동의 현실과 이상
곽병창․창잦극회 대표
(2004-01-29 16:22:20)
1.
전북 지역 최초의 연극 전용 소극장이었던 「전북 문예소극장」(대표 서정일)이 처음 문을 연 것이 1983년이었으니까, 이 지역 소극장 운동의 역사도 어언 10년을 헤아려 간다. 그동안 「월리 소극장」(대표 신상만), 「황토 소극장」(대표 박병도) 등이 그 맥을 이어 활동했고, 지금은 「창작 소극장」(대표 곽병창)이 유일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의 활동을 일일이 언급 할 수는 없지만, 이 지역 연극의 발전에 이 소극장들이 끼친 공은 지대하다. 무엇보다도 연습장 하나 확보하기 어려워 쩔쩔 매던 그 이전의 연극계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이들 공간은 연극인들이 모여서 작업할 수 있는 가장 일차적인 장소였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음을 말할 수 있다.
그런 토대가 아니었더라면 지금만큼의 양적인 성장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질적인 고양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도 이들 공간의 덕택이다. 떠돌이 신세를 못 면하던 연극인들에게는 자신감과 희망을 주었고, 연극에 관한 한 사각지대나 다름 없던 이 지역의 시민들에게는 그나마 귀중한 관극 기회를 마련해 주었던 셈이다.
이제 그 뒷면을 보자. 「황토 소극장」의 경우, 5년을 넘겨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을 버텨 온 셈이지만, 나머지 두 경우는 길어야 2년 남짓에 손을 들어야 했다. 「창작 소극장」은 이제 만 2년이 되어간다. 위에서 말한대로 큰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공간 하나를 유지해 내는 일이 그렇게 힘이 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좀 더 궁극적인 대책은 없는가?
2.
그래도 연극하는 일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걱정하는 일은 한 마디로 돈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재정적인 빈약함을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더 많다. 소극장을 운영하는 데에 드는 돈은 연중 무휴로 연극을 공연할 수만 있다면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한 극단이 1년 내 소극장 무대를 채워 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소극장 하나를 진정한 연극 상설 공연장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체 연극 단체들(아동극단, 인형극단, 뮤지컬 극단 포함)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이런 일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소극장에서, 장기적인 공연 계획을 수립, 시행해야 할 것이고, 그런 일을 감당할 전문적인 인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극장의 공연 기획단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필요하다면 여러 극단에서 뽑은 전문 기획자들로 구성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극단이 서넛쯤 되고 또 의욕적으로 출발하는 새 극단도 합류할 것을 예상한다면, 모두 네다섯 정도의 극단이 왕성한 공연을 해 낼 것으로 전망된다. 이 극단들에서 1년에 한 편 정도의 소극장 공연을 계획하고 만들어 낸다면 지금 있는 소극장 하나를 유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각 극단마다 소극장 하나씩을 꼭 가지는 일이 아니라, 수용자인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진정한 소극장 연극을 제공해 주는 데 있다. 여기서 진정한 소극장 연극이라 함은, 처음부터 소극장 공연만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실험성과 창작성이 강하고 관객과의 친밀도가 높은 공연을 말함이다.
연극인들 전체가 소극장 연극 운동이라는 하나의 공동 목표를 가지고, 궁리하고 노력한다면, 위에서 말한 공급 부족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일정 기간 동안을 꾸려 나간다면, 아마도 기존의 소극장을 아예 공동 운영하는 방안도 모색해 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유일한 공간인 창작 소극장이, 한 개인의 출자와 사업적인 목적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소극장이 갖고 있는 결함을 보완하는 일도 빠른 걸음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고, 머지 않은 장래에 더 크고 훌륭한 공간을 민간 연극인들이 합심해서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실현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배려와 지원이 당연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방자치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더욱 지방의 행정 당국이나 의회 등에 거는 기대가 증폭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정책적인 배려의 두 번째 항목쯤으로 지적할 것으로는 소극장 관계 법령의 정비이다. 현행 규정에 의하면 연극 전용 소극장과 영화관으로서의 소극장에 관한 규정이 구별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주차장이나 정화조 등을 설치하는 기준까지 상업 영화관에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법 적용을 받고 있다. 실질적으로 100석 규모의 연극 공연장이 어떻게 동시에 30대 이상의 주차 공간을 부대 시설로 마련할 수 있으며, 101인 이상이 사용할 정화조를 설치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소극장 연극 운동이 합법적으로 활성화 할 수 있는 길은 제도적으로 막혀 있는 셈이다. 전문적인 연극 공연장으로서의 특수한 사정을 감안해 줄 조례의 정비 또는 신설이 절실하다.
3.
소극장 운동은 19세기 후반에 유럽에 처음 시도된 이래 연극 형식의 혁신과 끊임없는 탐구의 모습을 보이면서 발전해 왔다. 진리의 실현과 형식의 개변, 관중들의 구체적 삶 속에서 돌아 가려는 지칠 줄 모르는 창작 의지, 이런 것들이 소극장 운동의 진정한 정신일 것이다. 그것이 이 지역에서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연극인들의 자기 성찰과 끊임없는 계발, 그리고 사심없는 연대의 바탕 위에서 개성을 추구하려는 열린 마음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거기에 도울 곳을 찾아서 해결해 주려는 행정 당국의 정책적 배려 등이 더해질 때 진정한 소극장 운동이 우리 지역에도 꽃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