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노을지는 삶
어쩌면… 붉나무의 잎새는 참 붉게도 단풍들었다.
은행나무는 샛노랗게, 떡갈나무는 황갈색으로.
그들도 한때는 푸르렀으리라.
이제 지난 여름의 잎새는 보이지 않게.
푸르던 젊은 날이 가고,
사랑과 그로 인한 열정마저 식어갈
내 삶에 다가올 가을 날, 나는 또 무엇으로 노을 노을져갈까?
단풍이 들고 단풍이 져 갔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11.맑은 사람
맑은 사람, 시인 이광웅형의 노래 금강산녀며 월미도를 듣노라면 어느새
내 눈에 이는 눈망울, 풀잎처럼 여린 광웅형이 영문도 모르게 날조된 오송희사건으로 연루되어 무고한 옥살이를 하던 시절, 이 노래를 배웠다고…
그의 눈이 안개처럼 일어나는 물기로 잔잔히 파문져갈 때, 흔들려올 때, 가슴저며가던 그 술자릴 끝에서 김용택, 안도현, 심호택 우리들은 광웅형을 일러 맑은 사람이라 여겼다.
12.첫 눈 소식
설악의 대청봉에 내렸다는 첫 눈 소식.
지난 여름 왼손 두 손가락에 물들였던 붉은 봉숭아 꽃물 아직 남아 있는지 살몃 내려가는 눈길.
여태 기다려야 할 사랑 떠도는 것일까
손톱 끝에 남아있는 붉은 꽃물자위
허허로운 웃음이 바람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13.편견이 준 상심
그 안타까움은 한동안 나를 에워싸고 잠 못 이루게 했다.
지병으로 세상을 뜬 평론가 김현. 그의 생전 나는 얼굴 한번보지 못했다. 그의 글을 매우 수사학적이며 현학적인 것으로만 여겨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그가 떠난 후 비로소 나는 그의 문학에 다가설 수 있었다. 편견이란 참으로 몹쓸 것이구나. 그의 죽음은 주변과 무엇보다도 문학계에 큰 상실이었으며 뒤늦게 나는 상심에 빠졌다.
그는 참 따뜻한 사랑을 지닌 사람이었구나. 그의 사랑을 받았던 일군의 사람이 부러웠다.
14.누워있는 사람
내가 바람이다. 그 바람을 일게하는 들이며 바다이다.
내가 산이다. 그 바람을 가로막는 산. 산허리를 뚫는 암흑의 무저갱.
그 혼돈의 칠흑어둠을 밝히려 타오르는 불길, 불을 끄는 물, 적시며 채워 흐르는 물이다.
물이 흐른다. 들을 지나 강, 바다로 간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 나는 그렇다면 바다였는가?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는 일어나지 않고 눕겠다.
15.병
좋은 소설이나 시를 읽고 난 이후면 가슴 뛰는 감동(눈물이나 분노 혹은)과 함께 어김없이 찾아오는 질투, 불면증세.
그러나 얼마나 황량할까 불면 없는 날들의 무감각증세는
16.떠도는 떠도는
지난 밤 풀벌레 소리 들려오지 않네. 노래하지 않네 새들, 새들은 어디 갔을까 먼동의 햇살을 타고 날아오른 새들 돌아오지 않고 나 어디에 서 있는가 취한 몸 그만 곤한 잠 뉘려는 데, 돌아가야겠는데, 떠돌아야 하나
치둥치둥 바람은 갈잎새 휘휘 돌며 눈발처럼 불어오고 갈곳 없는 데
17.풍경
파아란 하늘 흰구름 한점 둥실 살랑이는 바람에 실려 사르락 소곤거리며 낙엽지는 햇볕 좋은 날 늦가을 양지쪽 처마 추녀 한켠 들어져 세상 모르고 낮잠 즐기는 팔자가 상팔자라는 개와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며 쏟아지는 햇살을 향해 연보라빛 연기 피워 올리며 한 개피 담배 태워 문 사내가 있는 뜨락앞을 지나 흐르는 졸졸 투명한 개여울가 이끼낀 돌쩌귀에 누어 가쁜 숨을 파닥여 대는 노랑나비에 다가올 죽음
18.달뜬 밤 까치밥
손길이 닿은 곳은 이미 앙상한 가지. 남김없이 다 따내지 않고 남겨 좋은 감 몇 개, 이제 곧 까치가 날아들어 반가운 소식 전하리라. 까치밥을 남겨 놓는 훈훈한 인심들 머지않아 찾아볼 수 없으리.
달 뜬 밤.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밥. 돌아가신 외할머니 해마다 까치밥 남겨놓고 알길 없는 북녘 외아들 소식 애달아 하셨지. 한 분 외삼촌은 황해도 그 어딘가 아직 살아 계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