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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한상봉의 시골살이]
다섯편의 시(詩)와 하나의 절망노래
김유석․시인 (2004-01-29 16:28:02)
1. 길은 멀다 판화처럼, 스산한 하늘빛이 눌러찍은 들 가운데 멀어서 눈 감고 가는 길 가다보면 끊긴 연줄처럼 아득히 흘러내리는 길 속으로 또 한 세월이 빨려들어가고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숙이 빠져드는 그것은 살아있는 늪, 땀이 되지 않는 무게를 얹고 쭉정이 같은 내촌양반 쿨럭거리는 경운기에 끌려간다. 길이 있어 가는게 아니다 공동묘지 같은 마을과 마을을 지나 피막처럼 썩어가는 우리들의 삶을 염하러 가는길 씨발씨발 후려치는 눈발에 금새 녹아지워질 발자국을 찍으며 우리는 지금 수매장으로 간다 (우리는 지금 수매장으로 간다) 2. 밧줄에 묶여 실려오는 동안 낫자국만 흉터처럼 남은 들판이 내내 깔리었다 가벼운 짐에도 오래 정들어 따르는 삐걱이는 소리, 흔하여 눈에 밟히지 않는 아픔들 데리고 한철 묵은 쌀빚 깊으러 가는 길 수매장은 상가처럼 쓸쓸했다 저울대에 올려져 중량을 달고 외국산 기계로 수분(水分)을 재이고 젊은 검판원 서툰 삿대질에 옆구리가 찔려도 꿰매어진 입들은 말이 없고 우리가 매기지 않은 값에 이등급의 설움이 정부미, 그 허름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나가면 전표를 떼어 한다발 지폐와 바꾸는 우리들의 피와 땀, 어느 추운집 저녁상에 올라 따뜻이 우리들의 몸을 추억해 줄것인지 어느 한 곳 모여 흐르지 못하는 침묵으로 빈 수레에 얹져 끌고오는 들판의 아슴한 하늘에 자꾸 물음표를 거는 철새들 누가 지핀 것일까 빈 몸을 털고 꾸역꾸역 모여들어 제각기 몫의 불빛을 쬐다 제각기 몫의 겨울을 껴입고 돌아서는 저 모닥불은, 몇 사람의 절망을 태워야 저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추곡수매장에서. 1) 3. 덤보다도 초라하게 팔려가는 팔고나서 스스로를 의심하면 까칠한 슬픔만이 지폐처럼 반품되어 오는 매춘같은 하찮은 것들 속에서 더 하찮은 것 하나를 가려내는 일이 귀한 것들 가운데 더 귀한 것 하나를 솎아내는 일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아는 늙은 노새의 잔등 위에서 휘어진 길 하나가 풀어져 길 밖으로 간다 채찍자국이 환하다 (등외품(等外品)) 4. 마른침을 찍어가며 지전을 세는 촌로(村老)의 끝돈 한 장이 모자란다 삭정이 같은 손가락으로 다시 세어보면 두장이 모자라고 살아낸 세월만큼 한 장씩 더 모자라는 가을, 삶이라고 믿어온 모든 것들이 이제사 모자라는 마음의 행방을 가늠하는 것을 아서라, 손금따라 흘러온 강 막걸리 한사발로도 지워지지 않는 뒤늦은 해탈이여 (추곡수매장에서. 2) 5. 슬픔이 슬픈 표정 앞을 서성거린다 배고픔이 배고픈 몸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구걸하듯 웃고 있다 무논에 머릴 박고 한밤내 우는 기러기떼처럼 문을 열어둔 채 외출한 주인은 돌아오지 않고 앉은뱅이 밥상같은 들판에 놓여 찬밥처럼 식어가는 집들을 겨울비에 말아 떠넣는 쌀길 살길 쌀길 살길 살길 살(生)길⋯⋯,을 처음이듯 확인하며 간다 삐걱거리는 세월에 배고픔을 심고 고봉밥같은 달이 뜰 때까지 아, 먹고싶은 (米路, 迷路) 6. 겨울비 내린다 맞춰지지 않은 주파수 소리처럼 들판 가득 흩뿌리는 겨울비는 마른 도랑하나 적시지 못하고 부르튼 땅의 살갗에 눈물자국 같은 얼룩만 남긴 채 스며들고 희끗한 머리카락 날리며 불어오는 서해 바람이 식어버린 땀처럼 춥다. 그러나 정작으로 추운 것은 겨울비도 북서풍도 아니다. 익히 짐작은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울분보다 비애가 앞서는 수매량과 가격, 그 우울한 수치들을 믿지 않으려는 표정들이 동구밖에 참새처럼 널려 비를 맞는다. 애초 우리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년초 새로뽑은 선량들도 양곡유통위원회도 다 빛좋은 개살구 쯤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우리가 막연히나마 의식했던 것은 년말의 대선 뿐이었다. 덕분에 몇가마 더 구걸할 수 있었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 부질없는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거두어야할 것인가 기실 근본적인 대안이 없다면 떠날 자 들판을 떠나라고 왜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는가 쌀을 수입하겠노라고 왜 솔직히 고백하지 못하는가 그 어떤 말도 침묵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지지 못하는 겨울, 절망 속에도 힘이 있다면 저 빗방울 눈송이로 바꾸어 잠시만이라도 슬픈 소문같은 이세상 덮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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