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은
내 푸르렀어야 할 나이의 부끄러운
고백들이
어미니 얼굴 밑에
가라앉는 것을 봅니다.
사소한 수많은 화살촉이 찍힌
자리에
내 얼굴을 묻어 보면은
연못은 내 가슴 속 오열의 샘터에서
나처럼
억제해 온 물살을 파문지우며
사랑의 물놀이를
성립합니다.
연못을 들여다보며 내가 조용히 눈물
뿌리는 것은
고풍한 사원에
촛불 켜지듯이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연못」이라는 제목의 위의 졸시는 내 소년 시절의 시입니다. 문학의 길, 시의 길을고 거기 많은, 설레는 꿈을 두어 두었던 소년-위의 졸시를 쓸 무렵의 저는 거의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었겠듯이 순진하게도 고황에 든 문학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갈 수 있는 가능의 밭은 넓어만 보였고 가꿀 수 있는 삶의 화원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실될 수 있을 듯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꿈이 벽에 부딪치고 무형한 몽상의 쭉지마저 접혀야 하던 당혹에 맞닥트려야 할 때마다 잠 못드는, 뜬눈으로 새워야 하던 밤이 많아지고, 잘 돌볼 수 없어서 몸도 허약해 갔습니다.
감수성이 많아 작은 일에도 크게 감동하곤 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무시 못할 것이 선배들의 영향이었습니다. 철든 사람이라면 그저 무심히 흘려들을 줄 알 수도 있었을 사소한 몇마디 말에서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받고 곧잘 거기 나는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 당시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선배들 가운데서 손꼽히는 분으로서 강인섭, 허세욱 님을 들 수 있습니다. 위의 졸시는 당시 강인섭 님이 「학생계」라는 잡지에 투고하여 발표된 시「호수」(선자는 조지훈 시인이었습니다)를 읽은 후 그이로부터 직접 시 창작 동기를 듣고 그것이 깊은 인상을 남겨 결국 내게도 위의 「연못」의 시상이 자리잡히게 되었음을 밝혀드립니다.
강인섭 선배의 시의전문은 통 생각나지 않는데, 아주 잘 된 형상화라고는 볼 수 없는 한 구절만이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톰방톰방 던지는 죄악은 가라앉고.....” 운운하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인섭님은 당시 고3년생이었고 나는 중2년생이었습니다. 뒷날 시집 「녹슨 경의선」으로 통일시 운동의 한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는, 소년 시인 강인섭 님은 자기 가슴 속에 이는 피로감이라든지 갈등이라든지를 해소하는 한 방편으로서 교실 유리창을 통해 바라다뵈는 먼산맥의 어느 푸른 산속에 맑은 호수가 하나가 있어, 그 호수에 자기가 구속 하는 모든장애-피로감이라든지 갈등이라든지-를 돌멩이 던지듯 하나씩 던져버리고 이윽하여 돌아서면, 쇠락해져서, 본래의 맑은 영혼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하곤 했고 이런 먼 푸른 사맥의 먼 푸른 호수의 상상이 ‘호수’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강인섭 님의 상상과 똑같은 상상이 시적 모티브가 되어 나타난 것이 나의 경우 내가 고3되던해 10월9일에 쓴 「연못」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문규현 신부님, 박경원 시인 등이 주동이 되어 내 첫 시집을 발간해 주었습니다. 이분들이 시집을 편집할 때 졸시 「연못」은 편집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습작시로 서 시집속에 넣을 값어치가 안 보였기 때문이었겠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애착이 가는 것이어서 내가 감옥에서 나와서 두 번째 시집을 엮을 때에는 거기 끼워넣었습니다. 그것이 의외에도 좋은 평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너무나도 광포했던 80년대의 시인의 체험을 담담하고 투명한 시선으로 노래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광웅에게 있어서는 그의 삶의 편력 자체가 본연적으로 시적이었기에 그의 치열했던 체험은 별다른 수식이나 과장없이 그대로 언어화하는 것이 훌륭한 시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그의 5년간의 옥중체험이 시인의 의식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측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하여 여실히 엿볼 수 있겠다.
햇빛보며 감탄하게 될 때,
징역 생각난다.
끝없이 이어진 길, 감감한 길의 끝 바라다볼 때,
징역 생각난다.
담배에 성냥불 그어 당길 때,
징역 생각난다.
커피잔에 커피 따를 때,
징역 생각난다.
삼겹살에 소주 마실 때,
징역 생각난다.
「징역 생각난다」
5년간에 걸친 옥중 체험이 그의 평범한 일상사에까지 깊게 각인되어 있음을 위의 시는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이광웅의 시들은 그가 겪은 체험의 문제성이 커다란 비중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복잡한 기교나 수사가 상대적으로 필요치 않은 시세계에 속한다. 예컨대 “아름다운 영혼은/비단 옷 따위/걸칠/필요가 없지/우린/군더더기로 되는/정념의 살은/발라내고/햇빛 속에 설 일이지”같은 구절은 시인의 이러한 문학관과 세계 인식을 작품으로써 보여주고 있다(중략). 그러나 그 소박함과 단순함에는, 80년대 한국사회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삶을 영위하였던 사람만이 비로소 보여줄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여유와 일관된 신념, 맑고 부드러운 마음씨 등이 깊이 내재화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연못」이라는 제목의 시가 간직하고 있는 절제된 내면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중략)
오송회 사건으로 5년여 동안 감방 생활을 한 시인, 지속적으로 통일과 민주주의에의 그리움과 기다림을 노래하던 시인이 이제 “고풍한 사원에/촛불 켜지듯이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무한한 깊이와 한 인간의 복합적인 내면을 읽는다.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의 추이를 정확하게 포착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광웅은 「목숨을 걸고」를 통해서 한 지식인이 암울했던 체험을 잔잔히 얘기하는 민중시의 새로운 발성법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몫이다.
위의 인용한 글은 1989년 「문학과 사회」가을호에 실린 권성우 님의 졸시 두 번째 묶음「목숨을 걸고」에 대한 서평의 부분입니다. 윗 글에서 사실과 다른 데가 있는데 그것은 ‘지속적으로 통일과민주주의에의 그리움과 기다림을 노래하던 시인이 이제 “고풍한 사원에/촛불 켜지듯이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사실은 순서가 뒤바뀌는 것입니다. ‘“고풍한 사원에/촛불 켜지듯이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던 시인이 이제 지속적으로 통일과 민주주의에의 그리움과 기다림을 노래하는 것을 통해서...’하고 순서가 바로 잡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연못」을 쓰던 마음이 지금의 내 시 쓰는 마음의 주류를 이루어 흐르고 있다고 보아지는데 그러고보면 권성우 님의 지적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