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2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좋은 원작과 좋은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1-29 16:37:03)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외화 보기를 무슨 ‘가문의 영광’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나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을 만큼 우리 영화를 즐겨 본다. 시시하다고 흔히 말들 하지만 미국이나 홍콩 사람들이 즐겨 봐줄리 없는 바로 우리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긴 우리 영화가 시시한 건 사실이다. 정치의 민주화와 물가안정이 노상 과제인 이 땅의 원천적 악덕 환경과 맞물린 영세한 자본 및 기술 등이 그 주법이다. 거기에다가 감독들의 치열한 장인정신과 괄목할만한 스타부족, 그리고 관객들의 선입관적 외화 중독증까지 한몫하고 있어 우리 영화는 시시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시함은 이제 겨우 국민소득 6천불 나라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몫이라고 보는게 옳다. 그것은 또 영화를 봐주지 않는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못났다고 내 자식을 양질(良質)의 외제로 바꿀 수 없는 노릇이기에 시체말로 주제파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 개봉(8월 15일)후 40일이 지나서야 이곳 극장에 간판을 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면서 그것은 역시 나의 희망사항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난 여름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결혼이야기」․「장군의 아들 3」․「하얀전쟁」 등 몇 편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가 그랬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또한 극소수의 ‘정예관객’과 함께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착찹한 심정이었지만「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결코 시시한 우리 열화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최근의 한 설문조사결과 독자들에게 최고 인기작가로 꼽힌 이문열의 ’87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영화아카데미 1기 출신인 박종원 감독이「구로 아리랑」에 이어 두 번째 연출한 작품이다.
또한 9월 7일 폐막된 제16회 몬트리올영화제 본상 후보작 물망에 올라 매스컴의 각광을 받더니 올해 처음 제정된 ‘최고 제작자상’을 수상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느 스포츠신문이 최고 제작자상에 대해 규정했듯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를 테면 뛰어난 작품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영화인 것이다.
원작소설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소재와 기법의 참신함이 돋보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95년 겨울, 아버지의 전근에 따라 시골학교로 옮겨간 5학년생 한병태(고정일)가 그곳의 카리스마적 분위기와 부딪치다가 결국 동화되고마는 서사구조로 짜여있다.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5학년 2반의 급장 엄석대(홍경인)다. 담임 최선생(시구)의 보이지 않는 비호아래 엄석대는 두 개의 얼굴로 한병태를 짓누른다. 구식 표현이긴 하지만 천사와 악마의 얼굴이 그것이다.
한병태가 엄석대를 통해 겪는 세계는, 그러나 고도의 상징성으로 장치되어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작품성에 값하는 주요인 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라면 어디서든 있을 법한 권력 형성과 그것을 쫓아 기생(寄生)하는 군상들, 그리고 거기서 보여주는 진실은폐와 정의의 외로움 같은 메시지가 절제된 영상에 의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잘 정제된 이를테면 ‘어른들을 위한 우화’인 셈이다.
그와의 외로운 싸움에 지치고 질린 한병태는 이제 엄석대 휘하의 제2인자가 되어 권력의 달콤함에 젖어내리지만 6학년 담임 김선생(최민식)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함으로써 영화는 전환을 맞는다. 담임의 막강한 힘 앞에 엄석대의 신화는 점점 무너져가고, 우리는 인간의 영욕과 권력의 부침을 충분히 읽게 된다. 특히 눈치만 보며 짓눌려 있던 반 아이들의 앞다투는 엄석대에 대한 폭로는 뭉클한 감동으로 무릇 대중의 정체를 깨닫게 함과 동시에 아픈 채찍으로 우리의 삶이 과연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묻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런 메시지가 박진감 넘치는 구체적 모습으로 와닿는 것은 소년스타들의 몸짓과 표정 등 살아있는 연기에 의해서다. 가령 홍경인의 입을 꽉 다문 무표정한 모습이나 그의 실체(기차길에 엎드려 있기)를 몰래 보게된 고정일의 절망적 표정과 추파 던지는 시선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또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시시하지 않은 우리 영화로 받쳐주는 하나의 힘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아이들을 너무 어른스럽게 ‘다듬어 놓은’ 작위성을 들 수 있다. 지금도 그런데 자유당 말기의, 그것도 시골(서울 342K 지점의 팻말이 화면에 비친다.)의 국민학교 5학년들이 치러내는 추천․동의․제청 등의 진행이 너무 매끈하여 하는 말이다.
소설과 영화의 차이겠지만 잘못 돌아가는 교실 및 엄석대의 카리스마에 대한 한병태의 심리적 궤적이 독백이나 일기 등을 통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지 못한 것도 나로선 아쉬운 점이었다. 또한 교무실의 장기판 묘사가 만약 그 당시 어수선했던 사회분위기의 반영이었다면 지금과 구별되도록 적절한 설명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그러나, 역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같은 우리 영화가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로 아리랑」으로 탄압(가위질)을 겪고 열악한 제작 현실에 몸서리쳤을 텐데도 벗기는 에로물과 짜는 멜러물에 안주하지 않은 박종원감독의 장인 정신이 대견스럽거니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우리 영화의 앞날이 밝다는 것을 예고해준 괜찮은 작품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