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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문화저널]
석동 공소를 찾아서
최진성․남원여고 교사 (2004-01-29 16:38:13)
이번에 찾아간 공소는 익산군 용안면 석동리 석동(돌꼬지) 공소이다. 전주에서 논산(충청남도)행 직행버스를 타고 익산군 함열읍을 지나 논산군 강경읍에 닿기 바로 전에 잠시 쉬는 곳이 용안면이다. 여기에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 타고 약 10분 정도를 가면 이 고장의 명산인 무학산이 나오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석동리 신은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그 다음이 바로 석동 마을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은 처음 찾아가기에는 버스노선이 조금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 공소는 도로를 중심으로 약 60여 세대의 석동 1구와 약50여세대의 석동 2구 등 모두 110여 세대가 있다. 이 가운데 1구는 40세대가 그리고 2구에는 28세대가 신자 세대수다. 공소 형성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박해 시대가 끝나고 1890년에 교우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공소는 지난 11호에서 살펴보았던 원바실 공소처럼 박해 때문에 형성된 공소가 아니고 약 2km 떨어져 금강이 흘러가고 있는 평야지대라서 꽤 큰 규모의 논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형성 되었다. 그래서 마을이 형성된 이유도 살기가 좋아서라고 할 만큼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고 신앙도 열심이어서 면 소재지의 용안 성당보다 먼저 성당이 생겼다. 즉 주변에 택촌, 두동, 동지산, 옹동, 돈다산, 학동 그리고 장구름 공소들 외에도 많은 공소를 거느려 성당까지 세워진 큰 공소였으나 현재는 용안 성당에 속한 공소로 되었다.(사진 1 참고) 지금 용안 성당에 속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용안면 면 소재지가 논산과 연결되는 23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해서 점점 중심지가 되었고 신자들도 많이 살게 되었다. 그러자 이 곳에 용안 성당을 세우면서 자연히 석동 공소는 이 성당에 흡수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석동 공소는 성당 건물이 있으면서도 주임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공소로 되었다.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논과 밭 등의 공소 소유 재산을 갖고 있다.(사진 2 참고) 필자의 분류 기준에 의하면, 이 석동 공소는 공소로 이용되는 성당 건물이 마을 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중앙형’이고, 지형 분류에 의하면 ‘평지입지형’이다. 여기에서 평지 입지형이라는 것은 산지, 산간분지 및 고원, 구릉지, 그리고 평지로 구분한 지형분류에서 이 공소가 금강 주변의 평지에 입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우촌 형성 시기별 구분에 의하면 ‘성당 건축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교우촌 형성 시기를 종교 경관의 형성 과정으로 보고 교우촌 형성 전기, 교우촌 및 공소 형성기, 그리고 성당 건축기로 나눈 바 있다. 다음으로 이 석동 공소에 민속 신앙이 남아 있는지 알아 보았다. 우리의 민속 신앙은 대게 건축의례에 딸린 고사(告祀)와 집지킴의 가신(家神)등이 대표적인데 전혀 없었다고 한다. 또 신자들 가운데 부엌의 ‘조왕신’을 위해 정화수를 떠 놓으며, 마루에는 ‘성주동우’라는 가택신(家宅神)을 모시는 집들도 역시 전혀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현재도 어지간한 마을이면 집을 새로 지을 때 텃제나 상량제 또는 성주굿을 하는데도 이 마을에서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 마을 신자들의 음택관(陰宅觀)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장지(묘지)로가 장 많이 선택되는 곳은 개인 선산과 공동묘지 등의 차례였는데 명당을 찾지는 않는 반면에 장지를 정할때는 주로 지관과 상의한다는 상반된 대답을 들었다. 이것은 명당을 찾는 행위 자체는 미신이라고 믿기 때문에 명당을 찾지는 않지만, 지관에게 조상을 위해 좌향(坐向) 정도를 묻는 것은 천주교 교리에 크게 어긋나는 행위가 아니라고 신자들이 이해했던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지관은 명당의 혈처를 정하는 사람인데 이는 신자들의 음택관에 풍수지리사상이 스며든 예가 된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 3년 전의 답사에서 당시 공소 회장이었던 황기모(62세)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이 마을 신자들의 음택관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한다. 약 30년 전 쯤 이 마을에 사는 어떤 신자가 십자가로 만든 묘비를 사용하였는데, 이 묘비가 마을 뒷산인 무학산의 날개에 해당하는 곳의 혈처를 누른다하여 들고 나선 인근 주민들의 항의가 너무 심하여 그만 이 묘비를 땅속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다. 공소를 떠나면서 멀리 보이는 무학산이 마치 땅을 차고 금강 포구를 향해 날아가려는 새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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