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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2 | [교사일기]
더디가는 사람 이야기
이연호․진안공고 교사 (2004-01-29 16:40:10)
선생님께. 스승의 날 안녕하시오 - 선생님. 5월은 스승님에기 고맛다고 편지을 선생님 안녕하시오. 선생님을. 1992년 5월 13일 제자 ○○옥낌 무슨 말일까? 하고자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 부분에 쓸 말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여기에서 끝을 맺었다. 한 장의 종이에 ‘선생님’이란 글자만 수없이 썼을 뿐 도무지 더 이상의 것은 나타나 있질 않다. 얼마나 답답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곤욕스러웠을까? 나는 이곳에 부임해 온지 얼마되지 않았다. 첫 부임지이기이에 나름대로 의지를 갖고 열심히 생활하며 모든 열정을 현장에 쏟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짧은 4개월이지만-가장 가슴 아픈 일이란 아직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하여 하고자 하는 말을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초임에 담임까지 맡아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무척 노력했지만 우리반에도 다섯명의 학생들이 - 그것도 고등학교 2학년 - 있다는데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처음부터 시작하는 의미로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알기 위하여 그 어린 꾸러기들을 도서실로 불렀다. 그들 나름대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비읍을 써보라는 선생님의 반강압적인(?) 말에 칠판에 쓰긴 쓰는데 이건 비읍이 아니라 디귿이다. 다시 한번 비읍을 쓰라는 말에 이번에는 미음이. “아니 비읍”하고 강조하여 반복하였더니 ‘ ’라고 필순조차 틀린 해괴한 글자를 쓰고 두려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가슴이 시리다. 왜일까? 사랑만으로 가능할까? 친구에게 엽서 한 장 쓰지 못하는 두려움을 없애고 어딜 가는데 이정표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다독거리며 시작을 했다. 그러나 막상 시작은 했지만 방법은 없었다. 다만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지라도 이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탄생의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에 꽉 찼다. 그리고 나는 나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국민학교도 입학하지 못한 그분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시다. 아무 글자도 모르시던 분이 성경책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쓸줄 알게 되셨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이란 힘으로 당신 스스로 강고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그 어린꾸러기들을 데리고 종례 후 매일 1시간씩 수업을 하였다. 방법은 모르지만 시작하는 수밖에. 기억, 니은․․․을 익히고 가갸거겨부터 익히면서 받아쓰기를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열성적으로 가르쳐도 만족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나의 교수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좀 더 체계적인 교수 학습의 필요성을 느낀 나는 다시 특수교육용 교재를 구하여 실시해 보았다. 그러나 교재의 한계성 때문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꾸러기들. 얼마나 답답할까? 책상머리에 앉아 흑판에 쓰여진 하얀 글씨를 노트에 그대로 그릴려고 애쓴 아이들 이 아이들도 영어 철자 그리다 틀리면 창피하다고 말할까? 아니 남들은 욕할 것이다. 분명히 나 자신도 그들에게 멍청하다고 속으로 욕을 하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도중에 어떤 선생님의 다독거림과 도움으로 견딜 수는 있었지만 가슴 쓰리기는 여전하였다. 한달 정도 지나자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었는지 두 아이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제법 자리가 잡혀가고 있다. 읽을 줄도 안다. 아직 겹받침의 글자를 소리나는 대로 쓰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한번 그 어린꾸러기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구질 한다. 이제 한글기초펜습자 책을 가지고 석달째 접어 든다. 교육이란 바르게 가르쳐서 올바르고 바람직한 인간을 형성하는 가장 인간적인 사회적 활동이다. 인간의 그 무한한 가능성은 언제든지 용기있는 자, 하고자 하는 신념의 소유자에게만이 발휘한다. 그 어린꾸러기들에게도 신념과 투지가 있다. 산다는 것은 투쟁의 연속이다. 그토록 내가 바라던 교육현장. 비록 많은 선배들이 떠난 덕택(?)에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분들이 사랑했던 아이들이고 내가 사랑해야할 아이들이다. 이 땅 어디에 버려질 아이들이 있겠는가? 교육심리에 발달과업이란 것이 있다. 아동이 타고난 성숙수준과 학습의 가능성을 가지고한 사회안에서 발달할 때 그 과정에서 반드시 습득해야할 과업을 발달과업이라 한다. 따라서 이 발달과업은 그들의 성숙수준에 따라 습득할 결정적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 습득해야 만이 다음에 겪을 과업을 순조롭게 수행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 자신의 불행과 사회의 무시 등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내 아이들은 다만, 그 결정적 시기를 놓친 더디가는 사람일 뿐이다. 극한 이농현상으로 인한 시골 아이들의 서러운 교육현실, 전혀 인간화에 대한 개념도 없이 그저 월급봉투만을 받는 즐거움으로 교육현장을 회사로 생각하는 몇몇 교사의 불순한 의식, 그리고 표현하는 능력의 차가 인정되지 않는 제도 교육 등은 이 아이들을 사람답게 사는 구실을 못하게 하고 만다. 내가 지금껏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항상 생각해 보는 것은 그들의 장래 모습이다. 아이들이 바르고 당당하게 자기를 세우고 또한 꾸준히 그것들을 지켜내면서 너나 할 것없이 모든 이웃과 함께 나눠 갖는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우리 교사란 이렇게 아이들이 현실을 딛고 일어서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필요한 것이다. 담임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오래 처음으로 남낫습니다. 그래도 저는 선생님을 조하하고 존경햇기에 이러케 어린 마음에 선생님에게 펜을 듭니다.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니까 멀로 쓸만이 업지만 선생님 저희들을 여폐서 지켜 주시고 늘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제자 ○○올림. 며칠 전 내게 보내온 한 아이의 편지이다. 이 글을 보고 ‘그래 내가 선택했고 사랑하는 자들은 내가 지켜 나가야지’하고 생각 했다. 이제 지금 현실에서 내 아이들이 다음 장면에서 정면으로 부딪히게 될 뜨거운 세상에 대해 나는 시인 이장희의 앙증맞고 교태스러운 그리고 생기있는 푸른 봄이 아닌 찬란한 슬픔의 봄을 느낀다. 그러나 언젠가는 더욱 생기있는 봄이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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