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읽었거나 관람했던 소설이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을 대할 때 흔히 가지는 기대감이 있다.
곧 자신이 가졌던 경험이-극중인물이나 사진, 분위기와 주제 등-화면을 통해 그대로 들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친숙하기 때문에 이미 느꼈던 정서적 감흥을 영화관에서 다시 기대하는 것은 어쪄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상상을 통해서 그려 보았던 이야기들이 실제 눈 앞에서 펼쳐진다면, 그것도 평소 자주 접해 왔던 연출자(감독)나 배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그 재미나 감동을 한결 더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는 어쪄면 영화라는 예술 장르가 가지는 최대의 매력일 것이고, 이 매력이 가지는 영향력은 그 대중성과 다양성에 있어서 직접적인 효과가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의깊은 관객은 영화를 감상할 때 소설이나 연극에서와 똑같은 대사나 이야기 진행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영화를 통해서-영화를 만든 사람의 시각의 변화를 관찰하면서-자신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하는 즐거움(때로는 고통과 분노)을 맛보려 한다. 이런 고급관객은 영화가 원작(영화의 스토리 전개의 바탕이 되는 문자언어의 기록,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익히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도 포함하자)을 충실히 모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영화는 나름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매체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에 대한 결정적 효과가 다르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나아가 영화연출자의 어떤 창조적 재능의 변화가 가져오는 예술성의 변화까지 생각하고 작품을 감상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같은 <헴릿(Hamlet)>이라도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서사적이고 토니 리처드슨(Tony Richardson)의 작품은 주로 심리적인 탐구라는 전적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지만 그 작품들은 함께 훌륭한<헴릿>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든 영화 각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관용성 곧 새로운 창조적 재능에 의한 일종의 시적 파격어법(Poetic license)이 발휘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작가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정당하게 수행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아무나-영화감독이라고-흉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정한 영화작가(auteur : 자신이 창작할 영화의 기본 개념을 생각하고 찰영 대본화하고 촬영, 편집함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남기는 감독)는 고유의 스타일이 있다. 영화작가는 자신의 지성과 감수성 상상력등을 통해 영화의 모든 유의미한 구성요소-줄거리 극적 구조 상징 성격화 갈등 무대장치 자막 반어법 촬영기법 편집 필름의 종류와 화면비율 음향효과 대사 영화음악, 연기 등-의 주조와 조합으로 영화작품을 형태 지움으로써 창조적인 예술적 비전과 철학을 드러낸다.
그리고 보편적이며 지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흥미있는-단순히 오락의 뜻이 아니라 영화의 본질적 차원에서-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한 편의 영화에서 옅은 감각의 오락을 추구하는 관객은 상관없지만 한권의 책을 고르듯이 영화를 대하는 관객에게는 바로 이와 같은 작가정신을 대할 권리가 있다. 오늘의 한국영화가 관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는 ‘영화의 날’을 맞아 입장료를 안받는게 아니라-그나마 예향 전주에서는 2천원씩 받았지만-바로 이 작가들을 키워 내는 데 있고 그런 의욕이라면 얼마든지 한국영화를 찾을 관객은 많을 것이다.
금년 한국영화의 두드러진 흐름으로 이른바 ‘원작’을 가진 영화의 양산을 들 수 있다.
김윤희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볼구가 된 한 남자에 대한 여인의 헌식적인 사랑을 눈물나게 보여 준 〈잃어버린 너 〉(원정수감독/김혜수・강석우 주연),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이야기 〈사의 찬미〉(김호선감독/장미희・이경영 주연), 유부남인 방송국 PD와 신입여자아나운서와의 사랑을 담은 〈테레사의 연인〉(박철수감독/황신혜・이영하 주연・미개봉), 아내와 아들을 잃고 자신도 섬강에 몸을 던진 장재인교사의 삶을 그린 〈섬강에서 하늘까지〉(유진선감독/이경영・김미현 주연・미개봉) 등 주종을 이루는‘순애보’와 지난해 11월 27일 MBC텔레비전 〈인간시대〉를 통해 심금을 울렸던 수잔 브링크의 인생유전을 담은〈수잔 브링크의 아이랑〉(장길수감독/최진실 주연), 70년대 최대의 섹스 스캔들 ‘정인숙사건’을 다룬 〈나는 너를 천사라 부른다〉(김인수감독/강리나 주연・미개봉)등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실화를 다룬 작품, 주먹세계의 왕자 김두한과 시라소니 이성순의 이야기를 담은〈장군의 아들・2〉(임권택 감독/박상민・이일재 주연)〈시라소니〉(이일목감독/라재웅 주연・미개봉)같은 액션물, 제2대 동학교주 해월최시형의 삶을 담은 〈개벽〉(임권택감독/이덕화・김명곤・이혜영 공연, 안정효씨의 원작소설〈은마(silver stallion)〉를 바탕으로 한 〈은마는 오지 않는다〉(장길수감독/이혜숙・방은희-큰 가능성이 엿보이는 이 여우를 주목하자-주연), 북한 인민배우 홍영회의 실제 아버지를 모델로 한 홍상화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옮긴 〈피와 불〉(선우완감독/전무송・박근형 주연・미개봉등 역사적 사실과 분단의 갈등을 그린 작품에 이르기까지 20여편이 개봉되었거나 만들어지고 있다.
이같은 경향은 8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 진 문단의 ‘수기문학’ 버람과 어울려 베스트셀러의 대중적인 인기에 편승, 작품의 흥행을 보장받으려는 영화제작자들의 관심과 ‘무언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체취를 남기려는 신세대감독들의 의욕이 맞물린 결과로 볼 수 있으며, 몇몇 작품의 흥행성공과 더불어 한국영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게 한 것처럼 보인다.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경향은 그 동안 한국영화의 구조적 어려움증의 하나로 꼽혀 온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빈곤, 즉 영화작가의 역량부족의 대안으로 빚어진 결과라는 의견도 가능하다. ‘실화’가 즐겨 영화의 소재로 선택되는 것은 그 자체가 강력한 극적구조(dramatic stucture-한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바탕으로서, 최대치의 정서적・지적・극적효과를 성취하기 위해서 영화의 각 부분과 요소를 미적・논리적으로 배열하는 구조를 의미한다)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의 고질적 병폐인 핍진성(verisimilitudity-그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믿음)의 결핍을 쉽게 해소해 주기 때문이다. 덧붙여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서 관객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끌어올 수 있다는 면도 중요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같은 바탕을 이미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등장인물을 성격화하고 그 테마를 드러내는 것은 감독의 몫에 속한다. 원작영화붐이 그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또 하나의 소재주의-유행병에 그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작품이 인감본질에 대한 객관적인 진실을 반영함으로써 신빙성이나 필연성의 법칙에 충실할 수 있는 동시에 일련의 내적 진실을 갖추고 있는 인물의 성격화에 실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영화작품이 구조화되고 단일한 통일적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는 테마가 지나치게 빈약하게 설정되고 있다는 점에 이유가 있다. 투자환경의 열악함과 제도적통제, 기술축석의 상대적 빈곤극복이 영화인 모두의 숙제라 할 때 한 편의 작품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작가의식의 신선한 변모가 더욱 절실하다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