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인 무주에서 학교가 있는 안성까지 통근을 한지도 어느덧 일년이 넘었다. 아침 출근길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아침 신문 훑어 볼 기회를 번번이 놓치곤 한다.
버스 바깥 풍경이 철따라 시시각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요, 다른 어느 곳보다도 차안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 아이들과 함께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정리하기에 더없이 좋기 때문이다. 무주 남대천 앞 부미봉, 적상산, 덕유산,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산에는 철마다 들꽃들이 다투어 피고 사람의 손길따라 논과밭도 매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변화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과 들꽃이름 하나라도 더 알고자 하는 마음이 눈길을 딴 곳으로 쉬 옮길 수 없게 한다. 도 차창 밖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며 아이들에게 주었던 내 매운 매질이, 피곤함을 핑계로 아이들에게 소홀히 했던 애 무심한 태도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한다. 오늘은 아이들과 좀 더 밝은 모습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야지 하고 다짐을 하다 보면 출근길 30분은 잠깐이다.
작년 9월 군대에서 제대를 하자마자 정신없이 첫 발령을 받고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학기중간에는 그것도 처음 해보는 담임인지라 아이들이나 나나 모든 점이 어설프기만 하였다.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일들은 많았으나 머리 속에서만 맴돌 뿐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겨울 방학 하는 날 만두와 떡볶기 잔치를 해보았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운동장에서 기념 사진도 찍었다. 아이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며 바로 이거로구나 하는 생각에 좀 더 일찍이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좀이 못내 아쉬웠다.
올 3월초 지난 한 학기를 거울 삼아 올해는 야무지게 반을 운영하자고 다짐하고 학급 연간 운영 계획을 세웠다. 주위 선배 선생님들의 경험과 그간 틈틈이 읽었던 학급운영에 관한 책들을 참고하였다. 우선 큰 원칙을 정했다. 몇몇 성적 뛰어난 아이들 위주가 아니고 소외된 아이들에게도 관심과 참여의 기회를 고루 주는 민주적인 우리반, 쉽고 편한 일보다 힘들고 궂은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자율적인 우리반, 나 혼자보다는 함께 하는 기쁨을 경험케 하는 공동체로서의 우리 반을 만드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원칙을 구체적 실천사례를 통해 학급에서 하나하나 구현해 나가는 일이었다. 원칙이 생각과 말로만 끝난 경우가 많았음을 선배 선생님들게 귀뜸 받았으므로 우리 학급에서 실현 가능한 행사들은 아이들과 함께 생각해 보았다. 생각 끝에 학급신문, 학급일기, 학급문고, 생일잔치, 반 단합대회 등을 하기로 결정했다. 큰 줄거릴 정하고 그 외 작은 행사들은 그때그대 상황을 보아가며 융통성 있게 실행하기로 했다.
먼저 3월초엔 새로 만난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게 했다. 16절지에 자기 사진을 붙이고, 이름, 가족소개, 태어나서 가장 기뻤던 일, 슬펐던 일, 가장 좋아하는 친구 소개, 존경하는 선생님과 그 기유, 나의 장․단점 세 가지, 나의 별명과 이유, 현재의 소원, 1학년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장래희망, 학급친구․부모님․담임선생님께 바라고 싶은말, 생년월일, 주소 등을 적어내도록 했다. 아직 아이들을 제대로 파악하기 못한 학리 초라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음으로 한 개 모듬에 6~7명으로 해서 5개의 모듬을 구성했다. 스스로 모듬장도 뽑게하고, 모듬 이름도 짓게 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의논하여 깨비, 상록수, 조약돌, 가치, 사소한(사랑스럽고 소중한) 아이들이란 제법 근사한 이름을 지었다. 모듬별 첫 행사로 모듬일기 쓰기와 한솥밥 비벼먹기를 하였다. 모듬일기는 각 모듬마다 일기장을 순서를 정하고 하루씩 돌아가며 쓰라고 했다. 혹시 아이들이 일기 쓰는 것을 귀찮아 하지나 않을까 처음엔 걱정도 했지만 그건 담임의 기우에 불과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쓰려하였고 처음엔 창피하다고 자신의 고민 쓰기를 주저하더니 지금은 그런 주저함이 없이 곧잘 자기 고민을 일기장에 털어 놓는다. 도리어 내가 가끔 일기장에 담임 답신 쓰는 것을 힘겹고 귀찮아 할 때가 있다. 그럴때면 지난 시간 내내 열심히 써준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는 한다. 좋은 글은 2학기 말에 만들 학급 문집에 싣는다고 하니 아이들은 요즘 더욱 의욕을 갖고 일기를 쓰고 있다.
예부터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친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한 지붕 밑에서 잠을 자고 한 솥에 지은 밥을 먹는 짓을 제일로 쳐왔다. 그래서 시작한 학급행사가 한솥 비빔밥이었다. 어려가지 양념과 밥이 알맞게 고루 섞여야 비빔밥이 좋은 맛을 내듯이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친구들이 모여 화합하는 우리 반이 되자는 취지로 한솥밥 비벼먹기를 하자고 하였더니 아이들은 대찬성이었다. 모듬별로 큰 그릇을 준비하고 각자 싸온 도시락과 반찬을 그릇에 부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호응이 좋아 생일잔치와 함께 매달 말 정기적으로 실시했다. 학급신문도 만들었다. 한달에 한, 두 번 꼴로 내어 지금은 9호를 준비하고 있다. 국어 작문시간, 남는 자투리시간을 이용하여 썼던 글을 모으고 학급 행사가 끝난 후 반원 모두가 느낀 점을 글로 쓰게해서 신문의 글감으로 삼았다. 학급신문은 아이들이나 다른 선생님들게 인정받는 우리반 특색 사업이 되었다. 신문 발행이 늦어질 때면 늦다고 아우성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독촉에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신바람 나서 신문을 만들고는 한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신문을 만들고자 하는 아이들의 자발적인 모습에 대견함과 보람을 느낀다.
아이들이 집에 잇는 책 한 권씩을 가져오고 아이들과 내가 용돈을 절약하여 서점에서 새 책고 구입하나 약 60여권의 책이 모아졌다. 헌 사과 상자에 뚜껑을 해 달아 학급문고를 설치하였다. 도서부장을 선출하고 도서대출규칙을 정하여 자율적으로 학급 문고를 운영하게 하였다. 점심 시간,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책을 읽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책에 대한 관심도 부쩍 많아졌다.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담임의 설교(?)도 훨씬 설득력이 있어졌다. 손만 내밀면 가까운 곳에 좋은 책이 있으니 책이 없어 독서를 못한다는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아이들에게 협동심과 급우애를 기르는 경험을 갖도록 반 단합대회도 실시하였다. 등산, 밤낚시, 야영 등으로 다채롭게 실시했다. 등산은 학교 뒤쪽에 있는 가까운 산을 택하여 토요일 오후에 반 전체가 올랐다. 아이들은 힘은 들어 했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을 한눈에 내려본다는 점에 신기해했고 힘든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기뻐했다. 싸가지고 간 도시락으로 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꼭대기에서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다함께 힘차게 부른 후에 내려왔다. 6월달에 간 밤낚시는 어둠 속에서 머리를 맞대고 얽힌 낚시줄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아이들의 진지한 표정과 한 삶이 미끼를 낄 때 옆에서 전지불을 밝혀주는 다른 친구의 다정한 모습에서 우리반의 우정과 하나됨을 느낄 수 있었다. 텐트가 부족하여 이불도 없이 모래사장에 누워 서로 사는 이야기로 밤을 새운 우리는 이곳이야말로 즐거움이 넘치는 진짜배기 교실임을, 함께 사는 기쁨을 배우는 참교육의 산 현장임을 몸으로 느꼈다. 9월엔 안성 칠연 계곡에 있는 용추 폭포로 야영을 갔다. 모듬 별로 텐트나 먹거리, 취사 도구를 준비하고 낚싯대로 지참하였다. 낮에는 계곡에서 수영을 하고 폭포 밑에서는 낚시를 했다. 저녁 식사땐 밥과 찌개를 어느 모듬이 가장 잘 하는지 내기를 하였고 취침 전에는 한사람씩 돌아가며 느낀 소감을 말하고 모듬별 장기자랑을 하였다. 언제 어느 곳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안전 사고를 걱정하며 노파심에 젖어있던 나에게 아이들은 큰 탈 없이 지내줌으로써 기쁨을 선사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이 잡아온 송어와 메기, 빠가사리로 매운탕을 끓여 아침밥을 푸지게 먹은 우리는 우리반 창영이가 몰고 온 경운기에 짐과 몸을 싣고서 털털거리며 돌아왔다. 우리의 학교가, 교실이 이 곳에서 처럼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 할 수 있기를 손모아 빌어보며….
1년동안 학급 운영을 계획하고 실천해 오면서 아이들이 담임을 믿고 따라주며, 반에 강한 애정과 소속감을 느껴 자율적으로 학급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볼 때에는 담임으로서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아쉬움 또한 크다. 학급행사들을 좀 더 짜임새 있게 체계화하고 심화하여 아이들을 지도하고 안내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행사를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치루어 내는 데 만족했고, 행사간의 연계와 치밀한 사후 지도도 부족했다.
분명 아이들은 혼자서도 자란다. 차창 밖 덕유산 자락의 들꽃이 혼자서도 꽃을 피우듯. 그러나 조금만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살펴본다면 금방 알 수가 있다. 단지 현상적으로 혼자 자라는 것처럼 보일 뿐 한 송이 들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가를. 마찬가지로 학교와 가정과 사회, 선생님과 또래 동무들과의 세계 속에서 옹골진 영향을 주고 받을 때만이 우리 아이들은 건강하고 이쁘게 자랄 수 있다. 아이들은 착하고 순박한 만큼 이기적이고 영악하다. 활기차고 의욕적인 만큼 또한 쉽게 포기하고 침울해 한다. 선생님을 믿고 따르는 만큼의 선생님의 작은 편견과 잘못에도 쉽게 실망하고 좌절한다. 이런 아이들은 교사들 스스로 교육과 교육현실에 대한 뼈를 깎는 고민과 그 고민 끝에 나온 명확한 실천이 없다면 들판의 잡초처럼 제멋대로 자라날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우리들은 아이들의 이기심과 무례함이 원래 그들 속성인양 몰아 세우리라. ‘요즘 아이들 큰일이라고.’ 요즘 아이들이 큰일이라면 마땅히 요즘 선생님들도 또한 큰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성을 쏟는 만큼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우리 아이들과 아이들을 위해 오늘도 진지한 고민을 하고 온몸으로 묵묵히 참교육을 실천하는 동료 선생님들을 볼 때, 참교육을 위한 신념 하나로 강단지게 척박한 교육 현장을 뛰어 다니는 전교조 선생님들을 만나뵐 때, 나는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굳건한 믿음이 솟는다. 저 성경의 한 구절 처럼, “뿌린대로 거두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