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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11 | 연재 [문화와사람]
판소리 명창(9)명창 정정렬(丁貞烈) (1)최동헌․군산수산전문대교수
최동헌 군산수산전문대교수(2004-01-29 16:54:21)


일제치하의 판소리를 대표하는 근세 5명창들 치고 현대 판소리의 형성에 기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정정렬은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다. 정정렬은 전통 판소리의 전승과 발전, 변모,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의 적응을 위한 창극과 신작 소리의 개척, 현대적 감성에 맞는 새로운 창법의 개발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정정렬은 50여년 전에 죽었지만, 그가 생전에 추구하던 판소리의 길은 현재에도 역시 유효한 방향타가 되고 있다. 정정렬 판소리의 현대성, 혹은 미래지향성은 그가 다른 5명창들과 같은 연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송만갑등에 의해 신식 판소리꾼으로 일컬어졌다 든가, ‘정정렬은 30년 앞을 내다보고 소리를 한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가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이제 그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통해 그가 남긴 위대한 판소리에 접근해 보자.
정정렬은 1876년 전북 익산군 망성면 내촌리에서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그곳에는 정정렬이 살았던 집터가 지금은 논으로 바뀌어 남아 있고, 그곳 노인들도 소리 잘하던 정정렬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 정정렬의 제자라는 김창룡이란 소리꾼이 얼마 전가지도 활동하였다고 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정렬이 익산군 망성면 내촌리에서 살았던 것만은 틀림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정렬이 그 곳 태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여러 다른 정황으로 보아 정정렬은 본래 전남 나주나 함평 근방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싶다. 백보 양보해서 혹 정정렬은 익산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정정렬의 아버지 대에는 나주나 함평근방에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정정렬이 7세 때 맨 처음 소리공부를 시작했다는 정창업이 함평 사람이고, 정창업은 정정렬과 같은 집안이며 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정창업과 한 집안이라는 것을 보면 정정렬의 집안도 음악과 관계가 깊은 집안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정정렬의 음악적 소질을 간파한 정정렬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당시 이름을 날리던 정창업 문하에 들여보내 수업을 받게 했다. 정창업은 박유전의 대표적인 네 사람의 제자 중 한사람으로, 나주 함평 등지에 박유전의 소리인 서편 소리를 전승시킨 사람이다. 5명창 중 제일 선배격인 김창환이 그의 제자인 것을 보면 정창업 소리의 세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정렬은 정창업을 통해 정통 서편 소리를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정정렬은 스승 복이 없었던 모양이다. 첫 번째 선생 정창업은 정정렬이 1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두 번째로 찾은 선생은 담양출신 이날치였다. 이날치 또한 박유전의 제자로, 줄광대였다가 고수를 거쳐 소리꾼이 된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이날치는 또한 <새타령>을 잘 불렀다고 하는데, 5명창 중에서는 이동백이 그에게 배운 바 있다. 그러나 이날치 또한 정정렬이 16세 되던 해에 죽고 말았다.
정정렬은 마침내 스승 복이 없음을 한탄하고 홀로 수련을 쌓은 독공에 들어 갔다. 그는 소리 공부 외에는 만사를 잊어버리고 소리에 <미쳤다>고 한다. 그가 독공한 곳은 익산의 신곡사, 충남 흥산의 무량사, 공주 감사 등이었다. 정정렬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긴 독공기간을 거쳤다. 대체로 그의 나이 40세까지 독공을 했다고 하니, 30년에 가까운 기간을 독공으로 보낸 것이다.
그가 그렇게 긴 독공기간을 보내야만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그의 창조적 정열을 들어야 할 것이다. 흔히 정정렬은 성대가 좋지 않아서 명창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자칫하면 목이 쉬어버리기 때문에 그 약한 성대를 단련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성대만을 단련시키기 위해 그런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의 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있다. 물론 고음을 낼 수 없는 탁한 수리성을 지닌 것으로 보아 그의 성대가 좋은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나와 부른 소리는 예전의 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아주 독특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독특함으로 인하여 정정렬은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그가 그런 오랜 수련을 해야만 했던 것은 변화된 상황에 맞는 독특한 소리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0이 넘어 수련 기간을 마친 정정렬은 마산으로 내려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곧 그의 이름이 사방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동년배의 소리꾼들이 이동백이나 송만갑이 20대 이전부터 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것에 비하면 늦어도 보통 늦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정렬의 소리가 40대에 완성되고 거기서 그친 것은 아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음반을 통해 보면 정정렬이 아주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 부른 것이 더러 보인다. 예를 들면, <어사 남원행>같은 것이 그것인데, 이는 다른 소리들이나, 심지어 정정렬의 소리를 이어받은 최승희나 김소희의 것과도 다르다. 사설은 같은데, 최승희나 김소희는 자진모리고 부르고, 이 음반에서 정정렬은 중모리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역시 정정렬은 한 평생 쉬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소리들을 꾸준히 개발하고 실험한 소리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 정정렬은 가끔 전도성에게 들러 소리에 대해 묻기도 하고, 토론도 자주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때는 정정렬이 명창으로 이름을 얻는 후였다. 정정렬은 그렇게 명창이 된 이후에도 쉬지 않고 탐구하는 그런 소리꾼이었던 것이다.
마산에 있던 정정렬은 곧 서울로 올라오라는 친지들의 권유를 받아 상경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51세가 되어 정정렬은 중앙무대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정렬이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중요한 일들을 해내게 되는 것도 바로 서울에 올라와 활동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51세에 상경하여 비로소 정정렬은 자신의 판소리 광대로서의 예술적 천재성을 유감 없이 발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한국의 판소리는 변화된 상황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또 한번의 도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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